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온전히 사랑하라 (요일 3:14~16)

  • 잡초 잡초
  • 276
  • 0

첨부 1


온전히 사랑하라 (요일 3:14~16)
  

인도의 성자 썬다싱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어느 날 눈 덮인 히말라야 산을 넘어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썬다싱이 그 사람을 데리고 가자고 하니까, 그의 친구는 나도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어떻게 이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있느냐고 그냥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도저히 그냥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그 사람을 업었습니다. 
완전히 몸이 늘어지는 사람을 업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추위가 심했지만 힘드니까 오히려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 참을 가다보니 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겁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까 혼자만 살겠다고 먼저 간 바로 그 친구였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서만 살려고 하면 모두가 함께 죽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산 어느 작은 연못의 이야기를 아시죠?
그 연못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동안 사이좋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두 물고기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한 마리의 물고기가 죽게 되었죠. 
이제 남은 한 마리가 모든 것이 다 자기 차지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죽은 물고기는 썩기 시작했고, 물도 따라 썩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 썩은 물속에서는 살 수가 없어 그 남은 물고기도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 물고기도 살지 않는 연못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서로 물고 먹으면 함께 죽게 되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며 돌보고 섬길 때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고 말씀하셨을 때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려면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날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우리도 이 세상에서 남은 날들을 더욱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것이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계를 어렵게 하는 높은 산들이 있습니다. 

1. 오해라는 산이다. 

오해는 서로 생각의 차이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의사소통의 장벽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의 생각이 서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서로 기준도 다르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의견차이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서로 표현 방식이 다르다고 합니다. 
개는 반가우면 꼬리를 높이 세우고 흔듭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이것을 싸우자는 표시로 받아들이고 으르렁거립니다.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비슷해도 마음이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 지내다가도 서로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의사소통의 장벽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정확하게 전달되기보다는 자기 방식대로 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닌데, 상대방은 아니다.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똑같은 자리에서 함께 말씀을 들어도 기억하는 내용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또 서로 이해하는 것도 다릅니다. 듣는 말을 자기가 취사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로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무슨 설교를 그렇게 하느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가 듣고 이해한 것이 다 옳고, 맞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비슷한 것 같아도 결과는 전혀 다르게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2. ‘나 먼저’라는 산이다. 

이것은 인간이 이기심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생깁니다. 
“당신이 먼저 나에게 맞춰주면 그때 나도 당신에게 맞춰주지” 이런 방식입니다.
항상 자기주장부터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필요가 뭔지 맞춰주기보다는 먼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한쪽에서 지면 끝나지만, 양쪽에서 팽팽하게 맞서면 갈등은 점점 깊어집니다. 
그리고 양보한 사람도 마음에 평화가 생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협상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양측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제3의 대안을 모색할 때 시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끝까지 자기감정만 내세우거나 고집을 피우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해결을 위해서는 서로 열린 대화를 해야 합니다.

3. 실수라는 산이다.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르고, 일을 크게 그르칩니다. 
이런 실수는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처를 받았을 때, 다시 상처받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에 담을 쌓게 됩니다. 이 장벽은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게 됩니다. 
우리는 관계를 올바로 맺기 위해서 이런 험한 산을 잘 극복해야 합니다. 
실수를 통해서 관계를 맺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 개인의 고집을 넘어서 관계 맺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관계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관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조금씩 쌓여져 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도 안 됩니다. 

여기에는 초월적인 도움, 즉 하나님의 능력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관계를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관계를 위해서 기도하고 응답받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어려움 속에 있을 때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고, 회복되게 하여 주십니다 
더 많은 경우에는 제 자신의 마음과 태도를 바꿔주십니다. 그러면 회복됩니다. 
기도에 응답받을 때 이처럼 신나고 기분 좋은 일은 없습니다.
관계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이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기 바랍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입니다. 

1. 용납

롬15:7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라.”
관계에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가 상대방을 바꾸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면,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아무도 상대방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만 바꿀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뚝뚝한 사람을 애교 있는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야단을 치면 그렇게 됩니까? 
애교가 넘치는 사람을 조용히 있으라고 윽박지르면 그렇게 바뀌게 되던가요?
용납이란 배우자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게 지켜 봐주는 것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그를 소중히 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다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아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비록 부부는 다르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자기가 자랑스럽고 자신만만해서 부끄럽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그들은 서로 그들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가릴 것이 없었습니다. 
차이를 인정하고 그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우리 방식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용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2. 사랑의 행위

우리가 일단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게 되면 
사랑으로 붙들어주는 힘이 나옵니다. 
그 사랑의 행위는 드라마틱한 어떤 감동적인 일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쌓이면 튼튼한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하찮아 보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행동들 말입니다. 
어떤 게 있을까요?

첫째, 배려하기입니다. 

빌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자기 일만 돌보는 것이 아니고 배우자의 요구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그냥 내가 사랑하는 배우자이기에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둘째, 합력하기입니다. 

많은 부부들은 서로를 섬기고 합력하는 대신 서로 경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두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 합해질 때 하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를 상처 입게 한다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상처 입히는 것입니다.
만일 배우자를 비평하고 깔본다면,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비평하고 깔보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을 날이 가까이 옴을 아시고 자기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특히 제자들을 섬김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일은 하인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셋째, 헌신하기입니다. 

헌신이란 단계로 올라가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헌신을 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내 욕구보다 먼저 다른 사람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내 욕구보다 다른 사람의 욕구를 채우게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올바른 관계를 맺어가려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헌신과 섬김이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그 능력을 구하기 바랍니다. 

3. 용서

골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우리도 피차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우리에게 상처입힌 사람들을 용서할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나 큰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한다고 할 때에 주님께서 하신 것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했을 때, “미안해. 용서해 줘”라고 말하고 
그 때 용서받은 경험을 통해서 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불완전한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기에 많은 상처와 아픔이 있습니다. 
부족한 반쪽과 보다 나은 반쪽이 만나서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보듬어주고 감싸줄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는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면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목숨 바쳐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을 생각하면 
작은 어촌 마을에서 다리를 작동시키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는 매일 아침 다리 옆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다리를 들어올리기 위해
조종간을 잡고 있었습니다. 
조종간을 위로 올리고 있으면, 철로가 지나가는 도개교가 위로 올라가면서 
많은 배들이 그 밑으로 유유히 미끄러져 갑니다. 
조종간을 내리고 있으면, 다리가 제자리로 내려오고 기차가 무사히 지나갑니다. 

그의 어린 아들은 거의 매일 아빠와 함께 일터에 나와, 
아빠가 다리를 들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보곤 했습니다. 
어느 날 무전이 들어왔습니다. 예정에 없던 기차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다리를 빨리 내려야 했습니다. 조종간을 아래로 내리며 창밖을 봤습니다. 
자기 아들이 해변 바로 옆 도개교의 큰 기어 안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를 향해 소리를 쳤지만, 거리가 멀어서인지 아이는 듣지 못했습니다. 
쏜살갈이 조종간 앞을 박차고 나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야 했습니다. 
그때 무서운 사실이 그의 뇌리에 스쳤습니다. 
‘지금 조종간을 놓으면, 기차는 바다로 빠진다. 수많은 승객들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다리를 내리면 아들이 죽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 소름끼치는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이 아버지는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 조종간을 잡은 것입니다. 
아이는 압사했고, 아버지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기차는 다리를 건너 안전하게 지나갔습니다.
식당차에 있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가 엄청난 희생을 한 덕에 그들은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희생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독생자를 내놓으셨습니다. 
이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희생을 달게 받으셨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이 십자가의 사랑을 확신하십니까?
이것이 여러분을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후회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고,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