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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나주시는 하나님 (삿 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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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주시는 하나님 (삿 6:11~18)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 바사제국의 포로출신 왕후 에스더가 위기의 상황에서 던졌던 이 한마디는 명언 중에 명언입니다. 당시 바사제국에는 왕이 부르기 전에 왕 앞으로 나아가면 사형을 당하는 엄격한 규례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아무나 만날 수 있겠습니까? 모세도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등을 잠깐 보았을 뿐이고(출33:20, 23), 아브라함도 쪼갠 고기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가는 모습만 보았을 뿐입니다(창15:17). 또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떨어지려는 법궤를 붙잡았다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삼하6:7). 또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는 순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탄식했습니다(사6:5).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만나는 즉시 죽임을 당한 이유는 바로 ‘죄(罪)’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진노(震怒)하십니다(롬1:18; 마27:46). 이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차단해 버립니다(눅16:24, 26; 롬6:23; 고후6:14).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交際)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본래의 영광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에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만나주시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고(창18:1-2; 32:24-28; 수5:13-15), 신약시대엔 하나님이 아예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 불쌍한 인생들을 만나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기만 하면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사자', 즉 하나님은 기드온을 만나주고 계십니다(삿6:11-12). 삿6:1-6은 기드온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칠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만들었다', '토지소산을 멸하다', '먹을 것과 짐승들을 남겨두지 아니했다', '궁핍함이 심했다'는 표현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드온은 밀폐된 공간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삿6:11). 그가 수확한 양이 매우 적었고, 그것마저 빼앗기지 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그는 매우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고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고(삿6:15), 또한 그의 이름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합니다.

요아스라는 이름의 뜻은 '절망(絶望)'입니다. 그 시대의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아들에게 '기드온(곡식을 베는 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너는 커서 땅을 바라보고 땅이나 파는 자가 되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드온이란 불리던 이 아이는 처음부터 꿈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자조적인 절망의 품에 안겨 평범하게 농사일이나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만나주신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勇士)여”하고 부르십니다(삿6:12). 평생 들어보지 못한 낯선 호칭에 그는 어리둥절하며 좌우를 살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은 분명히 자신을 향하여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12절에서 우리는 ‘함께’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즉, 이 말은 "너는 보잘 것 없는 존재에 불과해. 하지만 여호와께서 만나주시면, 함께 계시면, 넌 큰 용사가 될 수 있어" 이런 뜻입니다.

지난 설날, 우리 교회 13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노숙자들이 제일 많이 있는 서울역을 찾아 떡국과 방한복으로 정성껏 섬겼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오후 늦게까지 수고한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 내용이 1월 28일 국민일보와 2월 4일 기독신문 등에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빵 모자를 눌러쓰고 전체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한 청년이 있었는데, 김범곤목사님(예수사랑선교회)이 그 청년을 소개했습니다. “목사님, 이 청년 현재 총신신대원에 재학 중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노숙자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막다른 골목, 이 지하도에서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 인사를 하는 그 청년의 눈에서는 뜻 모를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영성집회를 마치고 본당 문을 나섰는데, 모자를 푹 눌러쓴 한 젊은이가 술 냄새를 풍기며 제게 다가왔습니다. 얼굴을 뜯어보니, 그는 20대부터 알콜중독에 빠져있는 형제로, 옛날에 제가 결혼 주례까지 해주었습니다. “목사님, 절대 이혼해서는 안되는데, 5년 전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애기 엄마가 분명히 다시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알콜중독자들을 위한 사역을 꼭 하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이 무척 가까이에 계신 것을 느꼈습니다. 분명히 그를 치료해주셔서 귀한 일꾼으로 사용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습니까? 물질적으로 대단히 궁핍한 상황입니까? 파종을 했는데 씨가 말라버리고, 추수라고 했는데 한 줌에 불과합니까? 의욕과 소망이 꺾여 꿈도, 의욕도 다 접어버렸습니까?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어’하며 스스로를 자학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부담스러운 상황입니까? 절망의 품에서 땅을 내려다보며 곡식이나 베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기 위해 지금 가까이 다가와 계십니다. ‘큰 용사’로 재창조(再創造)해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장 지혜로운 자는 부르짖는 자입니다(삿6:6, 7). 그 어려운 상황에서 저들은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큰 용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지금 우리 문(門) 밖에 서 계십니다. 아니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계3:20). 우리가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껍질을 쪼는 것을 ‘줄(啐)’이라 하고, 어미닭이 쪼는 것을 ‘탁(啄)’이라 하는데, 이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부화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안과 밖에서 함께 해야 일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내가 먼저 ‘줄(啐)’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이 ‘탁(啄)’하십니다(사55:6; 약4:8; 렘29:!3; 33:3).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만나주시길 원하십니다. 특별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만나주시고, 안아주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짖기고, 또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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