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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 (빌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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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 (빌 1:9~11)


- 본문 : 빌립보서 1:9-11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기도합니다. 이미 바울은 4절에서 “너희를 위해 간구할 때마다”라 하여 이 기도가 편지 서두의 의례적인 기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감옥에 매여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감옥에 매여 있으면 아무 일도 못할 거라 예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곳에서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편지를 쓰는 일과 다른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부지런히 편지를 썼습니다. 그 중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는 옥중서신이라 불리는 위대한 성경이 되었습니다.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 사도 바울이 정성들여 쓴 편지가 성경이 될 것이라고 바울 자신이 상상했겠습니까? 

오늘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이라 하면 성공회신학대학교의 신영복 선생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분은 20년 동안 통혁당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옥살이 중 신영복 선생은 틈틈이 편지를 썼습니다. 형수와 계수, 그리고 부모님들께 드리는 편지입니다. 감옥에서 쓰는 편지지이기에 종이 질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 편지지 안에 작은 글씨로 정성들여 감옥에서 사색했던 내용들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지마다 작고 예쁜 그림들을 하나씩 그려 보냈습니다. 이 편지지들을 모아서 만든 책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선생의 대표작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을 향하여 정성스럽게 쓴 편지가 한 세기에 감동을 주는 대작이 된 것입니다.

 밀턴의 『실락원』도 감옥에서 쓰였습니다. 20세기 독일의 대 신학자요 나찌 독일의 저항가였던 본 훼퍼도 감옥에서 편지들을 썼고, 그가 죽은 후 이 편지들을 모아 『옥중서간』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이 『옥중서간』 또한 글 내용이 감동적이며 20세기 신학의 흐름을 바꾼 책으로 인정됩니다. 송명희 시인은 소아마비 몸으로 집안에서 꼼짝 할 수 없는 몸이지만 그가 썼던 주옥같은 신앙시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환경이나 처지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그 순간에 충실하다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지고 계획이 성취되는 현장이 됩니다. 

바울은 또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옥중에 매여 있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기도하면 됩니다. 4절의 ‘간구할 때마다’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가 개척했던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어렵습니다. 하나님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론 때문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성령의 바른 지혜를 주십시오. 로마 교회는 제가 방문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저들이 기꺼이 저를 환영하게 해주시고,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 일할 수 없으면 기도하면 됩니다. 병으로 누워 꼼짝할 수 없는 형편이라면 기도하십시오. 제가 청년시절 장티푸스 때문에 병원에 한 2주간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장티푸스는 법정 전염병이라 한적한 곳에 거의 격리시키다시피 두었습니다. 넓은 병실에 저 혼자만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있으니 얼마나 기도하기 좋아요. 그때는 참 열심이었습니다. 침상에 무릎 꿇고 찬송하며 열심히 중보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도 병실에 누워 있을 때 다른 사람의 기도나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는 한가하니 당신들을 위해 기도해주겠다, 대신 당신들은 내대신 열심히 일하시오 하고 환자가 말하면 병문안 갔던 사람들이 얼마나 큰 위로와 도전이 되겠습니까?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해 주셨던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일찍 과부가 되었고 가난한 중에도 교회 일에 열심이셨지만 그만 노년에 폐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폐암에 걸리셨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으시고 기도하시다 집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분이 돌아가시기 2주 전에 제가 병문안을 갔습니다. 저는 젊어서도 고생했는데 노년에도 허름한 집에서 사시다 이렇게 암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시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달랐습니다. 저를 보시자마자 “이 목사 이제 주님께서 부르실 때가 되었나 보네” 제가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이 권사님이 “고통스럽지. 그렇지만 나는 주님의 고통과 십자가를 묵상할 수 있어 감사하고 있네. 나는 이 목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할 터이니 주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충성 봉사하게. 어렵고 힘들 때마다 요한복음 1장 29절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는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게” 병문안을 갔다가 제가 오히려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분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성경 노트가 수십 권이 나왔습니다. 글자가 틀리면 종이를 오려서 밥풀로 붙이고 그 위에 새로 글자를 썼습니다. 이분은 가난이나 고통이 그 안에 있는 감사와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 신앙인은 어떤 환경이나 어떤 어려움도 좌절시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이런 기도 모습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고 있는지 묵상함으로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사랑이 더 풍성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이 많은 교회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묵상했듯이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과 다른 교회를 위해 헌금을 풍성히 했습니다. 풍성히 한 정도가 아니라 고린도후서 8장 3절에서는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그러면 사는 형편이 나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시 고린도후서 8장 2절을 읽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빌립보교회는 많은 시련이 있었습니다. ‘극한 가난’이라 할 정도로 저들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만약 이런 형편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빌립보 교회의 사랑은 감동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그 사랑에 보답해주십시오.’ ‘빌립보교회는 가난합니다. 이제 물질적으로 풍성한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하거나 아니면 이미 사랑은 충분하니 다른 것을 간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어떠합니까? 바울은 오히려 그 사랑이 더욱더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많이 도우라는 기도입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정도면 되었다고 하며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더욱 풍성하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사는 계속 사용하면 할수록 더 채워집니다. 어린이용 복음 찬송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이상하다 동전 한 닢 움켜쥐면 없어지고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 하네” 하나님의 역사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마25:29)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잘 활용할수록 하나님은 더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동안 사랑을 잘 보여주었지만 여기서 정체되어서는 안 된다, 더 많이 베푸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기도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점에서는 좀 아쉽습니다. 우리는 교회 창립부터 33.3%를 구제와 선교비로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지난 해에도 결산해 보니 우리 헌금수입의 34%를 밖으로 내어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 면에서는 약간 후퇴를 하였습니다. 구제보다는 선교 쪽으로 더 많은 예산이 사용되었고, 후반기에는 그 액수도 많이 줄었습니다. 구제 중심으로 예산을 지출하다 2년이 넘어가니까 좀 부담감이 생겨 그동안 지원했던 곳을 정리한 결과입니다. 사랑이 더 풍성해져야 할 텐데 좀 축소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사용할수록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가 더 풍성하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 가정에도 사도 바울의 기도와 같은 이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바다의 풍부와 열방의 재물로 채우사 다른 사람을 돕고 대접하는 일이 올 한 해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비록 가진 물질이 넉넉지 않더라도 사랑의 은사에서는 후퇴 없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하는데 그 풍성해지는 방식으로 9절에서 첫째 지식과 둘째 모든 총명과 셋째 분별력을 사용해서 풍성해지기를 구합니다. 첫 번째 지식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게 되면 될수록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지식에 넘치는 곧 우리 이해 범위를 넘어가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더 깊고 더 넓게 깨달을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을 더 풍요롭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밭에 묻힌 보화와 같습니다. 

골로새서는 말씀합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2:3) 우리는 그중 채 1%도 발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순종하며 계속 파내어 들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그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서 그들의 사랑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사랑은 모든 총명으로 말미암아 풍성해집니다. 모든 총명은 실제 사랑을 행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과 민감함을 말합니다. 이는 달리 사랑의 기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하고 그 사랑이 상대방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베풀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지만 상대방이 알지 못하면 우둔한 사랑입니다. 의사 표시를 해야 하고 상대방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남자들은 사랑 표현이 좀 무뚝뚝합니다. 마음으로는 사랑하면서도 말은 퉁명하게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던져서 주면 상대방이 기분 나쁜 법입니다. 차라리 선물을 주지 않음만 못합니다. 선물을 정성껏 줄 때 그것이 서로를 기쁘게 하는 선물이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데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사랑한다 하면서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려해서도 안됩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고, 상대방의 아픔과 사랑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모든 총명으로 풍성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또한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10절에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문맥상 풍성한 사랑을 위한 간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분별한다’는 단어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주 정교하게 위조된 지폐를 가려내는 것처럼 참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을 구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사랑을 더 풍성하게 합니다. 겉으로는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거짓일 경우가 많습니다. 참 목자와 삯군 목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력은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속은 형편없는 것임을 알아보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외양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겉으로는 보잘것없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보화를 담고 있음을 알아내는 능력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눈은 그리스도를 볼 때 더 맑아지고 순수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고, 자기 감정과 생각에 연연해하면 분별력이 흐려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7,8) 말씀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판을 닦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분별력을 가져다 줍니다. 


둘째,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입어야 할 옷은 진실의 옷입니다. 여기 ‘진실하며’의 원래 뜻은 햇빛에 비추어 보며 면밀하게 검사한 결과 순수한 것으로 인정됨을 의미합니다. 주로 순수한 금을 판정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햇빛에 통과시켜 보아도 여전히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깨끗해 보이는데 X선을 통과시켜 보니 그 안에 모든 거짓과 탐욕이 가득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잔과 대접의 안과 밖이 항상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겉모습만 봅니다. 여러분의 실상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실상은 대부분 가정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밖에서는 신사인데 집에만 들어가면 폭군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집사나 감독을 임명할 때 먼저 가정을 잘 다스리고 반듯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며 옷을 정결하게 씻고 다듬으며, 또한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있는 신부와 같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량한 자기 자신을 내세우고 자존심을 세우려 하니까 자꾸 거짓을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는 자기 허물이나 약점을 감추려 무의식중에 거짓말을 행하기도 합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투명하고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불안한 자기 존재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변호하기 위해 거짓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면 살수록 이상한 것은 내 자신에 대해서 더 당당해지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과 인정이 사람의 판단을 능히 견뎌낼 수 있도록 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판단보다는 영원한 진리되신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안과 밖이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진실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하니까 순간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자꾸 거짓을 행하게 됩니다. 폭력과 위력에 굴복하는 비겁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이유는 세상의 욕심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으면 무의식중에 거짓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양심을 팔고 남을 속여 먹는 일이 당연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악한 세계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그 순순함과 진실함을 지켜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의의 열매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열매를 원합니다. 씨를 뿌리고 온갖 수고를 하는 이유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꽃보다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열매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리석게도 사람들에게 칭찬과 주목만을 받으려고 하지 실제 열매를 맺는 데는 게을리 합니다. 

우리가 맺어야 될 열매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의 열매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일의 열매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봉사와 직업을 통하여 맺은 것들을 말합니다. 이 일의 열매는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만족하게 합니다. 자기가 남겨놓은 업적이 있을 때 인간은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됩니다. 중년을 흔히 사추기라고도 하는데 갑자기 쓸쓸해지거나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허무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추기가 있는 이유는 열매 때문입니다. 내가 그동안 맺은 것이 열매가 있었는가, 그것이 제대로 된 열매인지 고민하는 때입니다. 충분히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남은 인생의 후반전을 실속 있게 보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열매는 인격의 열매입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성령의 열매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 작품입니다.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맺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처음 시작할 때는 극히 작은 그릇의 인격이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주님께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열매들은 우리 힘으로 맺을 수 없습니다. 11절에서 분명히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의의 열매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는 힘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엇보다 할 일은 예수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만 잘 붙어 있으면 됩니다. 뿌리와 나무에서 올라오는 수분과 양분을 잘 빨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면 많은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때 우리 일이 잘됩니다. 일에는 하는 일과 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는 일은 우리 노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힘들고 효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되는 일이 있습니다. 되는 일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환경이 잘 풀리고 돕는 손길이 있어서 일이 저절로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시도록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인격이란 것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렇게 닮도록 되어 있습니다. 계속 바라보면 바라보는 대상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큰 바위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이 큰 바위 얼굴처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애쓰고 많이 기도하였는데 그것이 열매로 나타나지 않으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의인들에게 준 축복은 바로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은 축복입니다. 복 있는 인생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으며 모든 행사가 다 형통하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한 해가 무엇보다 손 안에 일의 열매로 가득한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수고한 대로 열매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우리 의와 인격이 더욱더 자라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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