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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불황이 없는 하나님의 일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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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이 없는 하나님의 일 (마 9:35~38)
      
  
국내 대기업과 증시가 내세운 2009년 사자성어를 보면 현재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진감래-힘든 날이 가고 좋은 날이 온다, 질풍경초-격심한 바람이 불고 나서야 강한 불의 존재를 안다, 거두절미-불필요한 자산분산을 줄이고 핵심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식으로 모두가 경제적인 현신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다들 내년이 어려워질 것을 예측하고 또 어려움 속에 기회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저희 교회 표어를 그런 식으로 지으려다가 제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그의 신장을 보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너희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골리앗의 신장과 그의 투구와 갑옷과 무기를 보는 한은 그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러나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자기의 적수의 키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몸이 큰지 또 그 갑옷이 얼마나 두꺼운지, 그의 무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지 않고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사실 또 하나님이 과거에 자기를 도와줬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고 나가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경제적인 현실, 돈의 문제만을 보고 두려워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들을 따라간다면 우리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이방인들이나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잘 아는 성경구절입니다. 실천을 못하니까 문제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현재의 문제를 유물론적으로만 보면 해결책을 알 수 없습니다. 써프라임 위기가 왜 생겼습니까? 인간의 탐욕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거품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결국 탐욕의 거품입니다. 계속해서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 써프라임의 위기가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에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무슨 장사를 하여 이를 남기겠다고 말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오히려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가 살고 이것도 저것도 하리라’ 이렇게 말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공산주의가 붕괴한 다음에 미국의 후쿠야마라는 교수가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인간의 정치든 경제든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을 써낸 지 십 년이 못돼서 이번에는 자본주의가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기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전도사라고 부르는 그린스펀 같은 사람마저도 자유 시장에는 결함이 있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자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 와서 후쿠야마는 뭐라고 말할지 궁금한 것입니다. 

인류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는 과거에 중단 없는 전진, 또 끊임없는 발전을 말하면서 살아왔는데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세계 모든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소유하고 좀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을 지향하게 된다면 지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게 돼 버립니다. 자원이 부족하고 환경이 너무 훼손됩니다. 만약 중국과 인도의 인구가 마이카 시대를 맞게 되면 지구에서 나는 모든 기름을 써도 부족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때가 되면 우리가 어떻게 살려고 합니까.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까를 염려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돈을 잃지 않을까를 염려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펀드니 뭐니 다 절반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돈을 잃지 않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제 우리의 삶의 질, 또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되는 시점에 다다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러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예수님에 대해서 반드시 생각해야 될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셨지만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지만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의료보험제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느냐?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하셨고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 그러시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이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땅의 일을 생각하면 사방이 막힌 것처럼 보일 때가 많아요. 땅의 일을 생각하면 기회가 보이지 않고 답답하고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 앞이 훤하게 트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예수께서 추수할 것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많다, 물질적으로 세상을 보면 많은 게 아니고 부족하고 적습니다. 자원도 부족하고 돈도 부족하고 기회도 부족하고 물질적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부족해 보이는데 영적으로 보면 많은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할 일이 많고 추수할 것이 많고 하나님의 능력이 많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많아요. 추수할 것이 많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미국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실업자가 늘어나니까 뭐가 많아지는지 아십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그래요. 그래서 교회마다 짧은 기간에 교인 10%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와서 직장 잃지 않게 기도해 달라, 취업하게 기도해 달라, 이렇게 기도를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교회에 나오지 왜 이렇게 돼서 이제 와서 천부여 의지 없으니 불쌍히 여겨달라 이렇게 나옵니까.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교회에 나온 것은 다행입니다. 하나님이 원래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영적인 부요함과 물질적인 부요함은 반비례적으로 역사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하면 신앙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반대로 물질적으로 빈궁해졌을 때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영적인 부요함과 물질적인 부요함은 반비례적으로 역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 것이라고 했고 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풍요해지면 물질적으로는 가난해진다는 얘기냐, 그건 아닙니다. 사람이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할렐루야! 

영혼이 잘 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그랬기 때문에 다만 범사에 잘 되고 나면 다시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멀리 떠날까 그게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풍요함을 얻은 후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또 세상적으로 성공한 다음에도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변화된 인간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런데 세상에 많고 많은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이에요. 세상에는 죄인들 천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에는 불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에 불황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죄인들이 줄어들면, 없어지면 아마 그러면 예수님도 할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어요. 예수 믿는 나라든 안 믿는 나라든 죄인들 천지입니다. 죄인들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불황이 없습니다. 세상에 죄인들이 많은 한 교회 비즈니스는 불황을 맞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또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쉴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미국 윌로우 크리크 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가 자기 책에서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차를 타고 출근하면서 라디오를 틀어서 지난 밤 일본 니케이 지수가 얼마나 올랐는지를 체크하고 가는 길에 스타벅스에 들러서 오늘 아침에는 어떤 커피를 마실까 고민을 하다가 어느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데 내가 아침 일찍 지난밤에 일본 증시가 얼마나 올랐나 이거나 관심을 갖고 있고 스타벅스에 가서는 거기서 일하는 직원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늘 아침에는 어떤 커피를 마실까 이러면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대인이 모습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일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추수할 일꾼이 없다고 말씀하신 게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추수할 곡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추수할 곡식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누가 추수할 곡식인지 눈에 보일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우리의 평소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까. 그런데 그 성경구절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느냐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귀신들이 많았나봐. 그러니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귀신을 쫓아내시지.’ 이건 인간의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이나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니까 사방에 치유 받아야 될 사람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사방에 병든 사람, 또 영적으로 눌린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그들을 고쳐주신 것인데 우리는 영적인 것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심하니까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외모만을 보고 외적으로만 생각하지 그들의 중심의 상태를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그제야 세상에는 추수할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는 말은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 이렇게 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고 이해관계 속에서 생각하지 말고 남자냐 여자냐, 지위가 높으냐 낮으냐, 잘생겼냐 못생겼냐, 이런 것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영혼을 보라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person-인격으로 바라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의외로 그 사람의 참모습이 우리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그 사람의 고민, 그 사람의 고독함, 또 그 사람의 영적인 빈곤을 깨닫게 되고 진지한 대화의 물고가 트이게 됩니다.

사람들을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이유는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세상 사람들은 다 고독하고 번민하고 또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대로 고생하고 유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마음 깊은 곳에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양과 같습니다. 양은 목자가 필요합니다. 유일하게 목자가 돼 주실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재벌이든 연예인이든 대통령이든 외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다 목자를 필요로 하고 예수님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길 잃은 양과 같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방황하는 사람들 많고 이미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도 영적으로는 주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도울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봐야 됩니다. 그걸 보게 되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줄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학벌이나 재물이나 이런 것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줄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내게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게 있는 이것을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때 비로소 우리의 열등감을 극복하게 되고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고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고 우리가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게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귀중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큼 우리의 삶을 보람 있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성직자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건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유리한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이 땅에 유리하는 자가 된 것처럼 ‘유리’라는 것은 죄인의 저주입니다. 죄인은 이 땅에서 유리하면서 삽니다. 정처 없이 삽니다. 쉴 곳을 얻지 못합니다. 방황합니다. 고독합니다. 아버지 집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 없는 양은 고생하며 유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추수할 것이 많아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여러분이 할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불황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찾고 그 일을 하는 동안에 여러분 자신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편안해 지고 그리고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더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해 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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