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심 (고후 4:1~6)

  • 잡초 잡초
  • 239
  • 0

첨부 1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심 (고후 4:1~6)

     
지난 주일에 우리는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과 은혜와 용서의 복음을 증언하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읽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첫 번째 종류의 사람은 율법주의적인 자세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불평하고, 율법의 자대로 남들을 정죄하는 그런 사람이 있고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용서와 은혜와 자비를 생명을 전하는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을 통해 고백하기를 자기 자신처럼 영광스러운 구원과 생명과 용서의 새 언약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꾼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증언하는 새 언약의 일꾼이십니까?  아니면, 율법에 기초해서 남들의 실수와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그런 옛 언약의 일꾼들입니까? 

사도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자기 자신처럼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불러주시고 그런 귀한 직분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대하여, 몇 가지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몇 가지 신앙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 정말로 새 언약의 일꾼이 된 사람,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하는 직분을 받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에 대한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자 합니다. 

첫 번째, 4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 

우리말로는 조금 해석하기가 어려운데요, 영어성경이나 표준 새 번역 성경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따라, 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힘입어 이 직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생명을 전하고 구원을 전하고 용서를 전하고 사랑을 증언하는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직분을 받게 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요,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자격이 있어서 여기 와 있을까요?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목사로서 또 성례를 집행하는 목사로서 제가 그런 자격이 있어서 여기에 섰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가 다 여기 이 자리에 와서 존귀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형편과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와 긍휼 때문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과 용서와 사랑과 생명의 복음을 증언하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그리고 긍휼과 자비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사도바울은 초대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옥에 가두는, 교인들에게는 아주 적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뿐인가요?  기독교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유대교회 율법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바리세인 중에 바리세인이었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고,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었다고 자기 자신은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고 여겨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변화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증언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증언하고 그리고, 도처에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된, 이 사도바울, 자기 자신이 그렇게 변화된 것, 이것이 무엇 때문에 가능했을까요?  사도바울이 많이 배웠기 때문에요?  율법학자였기 때문에요?  또는 바리세인이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율법의 사람으로서 옛 언약의 사람으로 살아왔던 사도바울을 들어, 이제는 더 이상 정죄하고 심판하고,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는 생명의 사람으로 사도바울을 바꿔주신 아버지 하나님, 그렇게 사도바울이 변화되게 된 결정적인 것은, 바울 자신의 조건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과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복음을 증언하는 것도, 모두가 다 우리가 잘나서 능력 있어서 할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직분을 주신 것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 가운데 한 여자집사님이 20년 동안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남편 되시는 분이 지금 여기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예수 믿기 전에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구박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요, 교회를 다니는 것을 아주 싫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10년 넘게 아내를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이 분이 몸이 조금씩 아파가기 시작해 어느 날 중병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 때 목회자의 도움을 받고 기도를 받고 그가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고 아내를 핍박했던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망과 용서의 복음을 듣고 변화 되, 그 다음부터는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믿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사람이 되어 예배드리고 계십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비판하고 핍박하던 자리에서 사랑하고 용서하는 구원의 자리로 바뀌어 졌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비라고 하는 말, 긍휼이라고 하는 말, 은혜라고 하는 말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8-9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 축복이라 선물이라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인간적인 자랑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토록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자리에서 생명을 전하고 교회를 위하고 믿는 사람들의 종으로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게 된 결정적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한다면, 구원과 자비였다고 한다면, 오늘날 여러분과 제가 일할 수 있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자비와 긍휼의 복음의 감동이 된 사람은 늘 하나님께 엎드려 “아버지 하나님 저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용서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를 들어내지 않습니다. 절대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고 봉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지요.  

여러분 모두가 이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말을 잘해서요? 오래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요?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어서 하나님이 부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할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용서를 받은 긍휼과 자비를 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은혜와 긍휼을 받았기 때문에 새 언약이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렇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기 때문에, 이 귀한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4장 1절“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사도바울은 왜 자기 자신이 낙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을까요?  사도바울은 사도바울 주위에 사도바울을 공격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첫 째로, 고린도교회 안에 자신의 사도성에 대하여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인이었다가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자꾸만 교회에 들어와 사도바울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말고 유대교의 율법이나 유대인의 전통을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증언하지 않는다고 사도바울을 비난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거짓 사도들이 많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사도바울의 사도성과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계속 비난을 했습니다. 사람이 비난을 받는 것도 한 두 번이지요, 그런데 끊임없이 이런 비난을 받으면 사람이 낙심하게 됩니다. 정말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사람이 낙심하게 되어있습니다.  근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이런 환란과 어려움이 닥쳐오게 되면, 하나님의 종들도 하나님의 일꾼도 새 언약의 일꾼을 가진 이런 사람도 근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낙심하지 아니하노라.”  왜 사도바울이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기가 증언하는 이 복음이 사람을 죽이는 옛 언약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용서하고 생명을 가져다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기 때문에 이것을 증언하는 일이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증언하는 복음,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과 용서를 증언할 때 , 혹시 사람들이 비난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증언하는 복음으로 인하여 누군가가 죽어가다가 살아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경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난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낙심하고 좌절하게 되지만 고난과 낙심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지키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아름다운 향기를 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복음을 증언하시다가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끝내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이겨서 여러분의 삶속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딸을 시집보낸 어느 부모님이 있었는데, 이 딸이 오래간만에 부모님 집을 방문했습니다.  딸이 와서 눈물을 흘려가며 이야기 합니다.  남편이 이해하지 못하고 남편이 구박하고 부정을 저지릅니다.  교회를 다니는 이 딸이 신앙생활도 어렵다고 고백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것도 너무 어렵고, 그러면서 결혼생활과 신앙생활에 일대 역경과 고난이 제일 커다란 고난이 찾아오고 있다고 엄마 아버지에게 상담을 합니다.  

엄마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 딸을 부엌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딸을 부엌으로 앉힌 다음에 냄비 3개를 물을 담아 스토브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물이 펄펄 끓기 시작할 때 쯤 돼서 첫 번째 냄비에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 달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 커피 원두를 넣었습니다. 10분 정도 지난 후에 엄마가 불을 끄고 엄마가 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보느냐?  딸이 이야기 합니다. 
“다 익은 당근과 삶아진 계란과 커피를 봅니다.” 
그러자 엄마가 이야기 합니다.  무엇을 깨닫겠느냐?  
딸이 모르겠다고 하자, 엄마가 그 때 설명을 합니다.  

“네가 살면서 남편으로부터 어려움을 받고, 결혼생활의 어려움을 받고, 신앙생활 하고 복음을 증언하는데 어려움을 받아 네가 말한 대로 네 일생에 가장 커다란 고난과 역경과 힘든 일이 너를 찾아오고 있다.  여기에 있는 이 뜨거운 물이 마치 너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역경이라고 생각해 보자, 여기에 있는 당근은 어땠느냐?  당근은 물속에 들어가기 전에 딱딱했고, 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고난의 물속에 뜨거운 역경 속에 들어가자마자 이 당근은 물렁물렁 해졌다.  계란은 어땠느냐?  계란은 겉껍질은 딱딱하지만, 속은 원래 아주 보잘 것 없이 연약한 것이었다.  그런데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뜨거운 물을 만나자 마자 겉껍질은 그대로지만 안은 딱딱해 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커피를 봐라, 커피 원두를 넣었는데 이 커피원두가 뜨거운 역경을 만나고 뜨거운 물을 만나게 되자 아름다운 향을 발하는 커피가 되지 않았느냐?  네 삶에 고난이 오고 역경이 오고 힘든 일이 온다할지라도 어떤 경우에는 물렁물렁해져 볼품없는 것이 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딱딱히 굳어질 수 있으나, 커피가 뜨거운 역경과 고난의 물을 만났을 때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커피향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네가 고난을 기쁨으로 받고 극복하는 순간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도바울은 당근이었을까요?  계란이었을까요?  사도바울은 커피향이었습니다.  고난이 찾아오고 뜨거운 역경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사도바울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라고 이야기 하였듯이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향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오고 힘들고 어려운 일이 온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다가 어려움과 낙심을 당한다 할지라도 물러서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증언하다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도바울은 부끄러움이 없는 사역을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간혹 가다가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전철 안에서 복음을 증언하시는 분들을 계십니다.  저도 목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어떤 때에는 저렇게 복음을 전해야 하나, 좀 조용하게 복음을 전해야 하나! 좀 조용하게 고상하게 복음을 전할 수 없는가!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과 함께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사람들이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 있나요?  생업을 전폐하고 어떤 경우에는 길거리에서 어떤 경우에는 전철 안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 같은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할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사역을 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부끄러워합니다.  우리가 너무너무 열심히 다니는 것 같고 예수에 빠진 것 같고, 예수쟁이가 된 것 같고, 이제는 세상을 등진 아주 고리타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보여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부끄러워 한 적 없습니까?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순간 하나님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신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증언하는 일에 절대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증언하는 새 언약의 복음이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증언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고계시는 이 계절에 우리가 오고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하게 세상에 증언할 때 주님도 우리를 자랑스럽게 여길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속임수를 행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2절 하반 절에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속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사람에게 엉뚱한 복음, 또는 사람을 속여서 계략을 짜서 예수를 믿게 만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한다는 사실이지요.  사도바울은 이것을 조금 더 강조해서 2절 하반 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혼잡하게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고린도교회 안에 유대인이었다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고 난 다음에도 자꾸만 유대인의 율법을 주장합니다.  이걸 지켜야 된다.  이것도 지켜야 된다. 유대인의 정통도 지켜야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고 하는 이 복음이면 다 되는데, 여기에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되고 유대인의 전통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이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복음이  그들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을 혼합시켜서 전락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배격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지요. 

매년 추석이 되면 천주교회에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제단 앞에 제사상을 차려놓습니다.  돼지머리도 갖다 놓고요, 교인들 보고 집에서 제사 지내지 말고 교회 와서 성당에 와서 함께 제사상에서 절하라는 것이지요.  잘 아시는 대로 천주교는 전 세계에 복음을 증언하면서 어느 나라에 들어갈 때만다 그 나라의 문화와 종교를 그대로 다 수용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 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화와 종교를 배격하면 천주교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해, 천주교의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면서 그 나라사람들의 것들을 그대로 다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200년 전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불교문화 유교문화 그대로 다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우상에게 절합니다.  다 합니다.  전 세계에 천주교가 들어가는 나라는 그 나라의 문화와 짬뽕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 있는 천주교는 다 나라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시아나, 아프리카나, 북미대륙 어디를 봐도 어느 나라에 가도 기독교의 복음은 똑같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 외에 율법도 유대교의 전통도 필요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분명한 복음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도바울은 2절 하반 절에 “~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 언약의 일꾼으로 부르셨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진리만을 주셨습니다.  이 진리만을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할 때 여러분은 진리의 사람이 될 수 있고, 그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도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중심의 사역을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5절에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예수 중심의 사역을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만히 보면, 복음을 증언하거나 또는 헌신하거나 희생을 하면, 꼭 자기를 알아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들이 박수 쳐 주어야 좋아하고, 남들이 알아주어야 좋아하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역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자꾸만 들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들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자기가 고생하고 애썼던 모든 것들을 너희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주되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들을 증언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도 이런 비유를 드셨지요!  주인과 종이 열심히 들에 나가서 일을 하다가 해가 질 무렵쯤에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 다 피곤합니다.  주인이 편안히 쉽니다.  그런데 종은 그 때 음식을 준비합니다.  주인이 위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자기는 서있습니다.  똑같이 들에 나가 일을 했는데 종은 음식을 대접하고 섬김을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종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도바울은 죽어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저 지옥 속에 갈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은혜의 복음을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 고맙고 감사하여 자기를 들어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만을 증언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시다가, 교회에서 헌신하시다가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목사가 안 알아주고 교인들이 박수쳐주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헌신과 봉사를 알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 들어난다고 믿게 되면 사람의 이목과 사람의 눈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주님의 주님 되심을 증언하는 일에 연약해지면, 자꾸만 자기를 들어내고 사람을 보게 됩니다.  실망하게 되고 좌절하게 되고, 이런 교회는 사랑이 없어 못 다니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만 바라보고, 주님의 주님 되심만을 증언하게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알아주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로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직분을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갖고 옛 언약의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고,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불러주심 하나님의 은혜의 자비, 그걸 기본으로 해서 낙심하지 마시고, 좌절하지 마시고,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당당하게 여러분이 증언하는 복음으로 인해 누군가가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끊임없이 직분을 잘 감당하셔서, 주님이 오심을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