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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뱀의 머리를 짓밟을 예수님 (창 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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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머리를 짓밟을 예수님 (창 3:13~15) 
 

❚대림절을 맞으며

오늘은 대림절(Advent) 첫째 주일입니다. 오늘 주보에도 나왔지만 대림절은 한 마디로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교회 절기’라 하면 보통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정도만 기억하지만 사실 교회가 정한 절기는 이 세 개의 가장 큰 절기 말고도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활절을 기다리며 40일 동안 지키는 사순절(四旬節=Lent)인데 ‘성회수요일’ 혹은 ‘재의수요일’이라고 부르는 수요일로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사순절의 四旬, 즉 ‘네 개의 열흘’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동안 지키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참회하며 보내는 귀중한 절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절기가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절(待臨節)입니다. 대림절은 대강절(待降節)이라고도 부르는데 한자로 뜻을 풀어보면 둘 다 “(주님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뜻이므로 대림절이나 대강절이나 같은 뜻입니다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자면 어쩐지 ‘대강절’이라 하면 ‘대강 대강’ 기다린다는 뜻처럼 들려서 같은 뜻이라도 ‘대림절’이 낫겠다 싶어 저희 교회나 총회에서도 ‘대림절’이라는 말을 씁니다.

대림절은 성탄절이 오기 전 네 번의 주일을 포함해 4주간 지키는 절기입니다. 서양교회에서는 4세기부터 이 절기를 지켜왔는데 성탄절 4주 전 주일, 바로 오늘이 대림절 첫 주일이고 이날은 (앞을 가리키며) 이렇게 네 개의 작은 초 가운데 첫 번째 초에 불을 붙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고대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다음 주일, 즉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는 촛불 하나가 더 켜집니다. 세 번째 주일에는 세 개, 네 번째 주일에는 네 개의 초에 모두 불이 켜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탄절이 되면 가운데 있는 가장 큰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이지요.

오늘 대림절을 맞으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지키는 사순절이 그렇게 중요하고, 마찬가지로 성탄절을 앞두고 4주간 지키는 대림절이 그토록 중요한가? 그것은 바로 ‘준비하는 자세’ 때문입니다. 

모든 큰일을 앞두고 준비가 참 중요합니다. 비유가 좀 그렇습니다만 제사를 지낼 때도 준비하는 자세가 참 중요하더군요. 제사상에 올릴 음식(제수)을 준비할 때 그냥 대강 대강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모여 정성스럽게 준비하면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합니다. 잘못 하면 부정 탄다고 해서 준비하는 동안 부정한 말이나 행동도 금지했습니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주는 심지어 부부관계조차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인 부활절과 성탄절을 맞으며 대강 대강 보내다가 날짜가 되면 덜컥 부활절 예배, 성탄절 예배 한 번만 드리고 마는 그런 식의 부활절, 성탄절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부활절 40일 전부터 주님의 부활을 맞을 준비를 하고, 적어도 성탄절 4주 전부터 주님의 오심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이나 성탄절이나 가장 크고 기쁜 절기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한 가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부활절을 기다리는 사순절은 분위기가 무겁고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분위기가 가볍고 즐겁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순절은 회개와 참회의 성격이 강하고, 대림절은 기쁨과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기다리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사순절이든 대림절이든 결코 헛되이 보내지 말고 그 취지에 따라 잘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부활절과 성탄절을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시작되는 4주간의 대림절은 결코 대강 대강 보내는 절기가 아니라 정말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며 마음에 촛불을 하나씩 켜면서 기다리는 귀한 절기가 되기 바랍니다.


❚기다림의 묘미

이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4주간 대림절에 나눌 말씀은 바로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이라는 주제로 구약과 신약에 나온 기다림의 신앙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다림’이라는 말을 들을 때 크게 두 가지 느낌을 갖습니다. 하나는 ‘두근거린다’이고 또 하나는 ‘지겹다’입니다. 뭔가 중요한 일, 좋은 일을 앞두고 기다려야 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기다림의 기간을 두근거리고 떨리는 심정으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기다리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시간이 너무 안 간다고 지겨운 마음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 대림절은 지겨움이 아니라 두근거리고 떨리는 마음, 기대로 가득한 행복하고 즐거운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다림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버스나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 시험을 치루고 발표를 기다리던 일,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일, 반가운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일 등 수없이 많은 기다림을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경험하며 삽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이었습니까? 지겨운 기다림이었나요? 아니면 즐겁고 행복한 기다림이었나요? 오늘만 해도 예배시간을 앞두고 예배당에 먼저 와서 기다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늘 적어도 예배 시작 10분 전에 오시라고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짧은 기다림을 지루하게 여기며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며 허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 짧은 시간에 오늘 부를 찬송과 설교본문을 미리 찾은 후 조용히 오르간 반주에 따라 기도하면서 소중히 보내기도 합니다. 

만약 왜 이리 예배 시간이 빨리 안 오냐며 지루하게 보낸다면 여러분은 일찍 오나 마나입니다. 그래서 이 10분의 시간이 아까워 오늘도 시간에 딱 맞춰 허겁지겁 예배당에 들어서거나 혹은 예배가 시작한 후에 도착했다면 오늘의 예배가 은혜롭기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렇게 급하고 바쁜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 틈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습관이 중요합니다. 예배시간에 딱 맞춰서 오거나 몇 분씩 늦게 오는 것도 습관이요 예배시간보다 5분, 10분 정도 일찍 와서 기도로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그런데 이 습관을 잘 들여서 항상 예배시간에 일찍 와 기다리는 분들은 신앙적으로 빨리 성장합니다. 이 기다림의 습관을 잘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실 기다림에는 참으로 큰 묘미가 있습니다. 기다림 자체가 참 즐겁고 두근거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방금 전에 예배시간 기다리는 일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같은 기다림이라도 기쁘고 행복하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겹고 힘들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기다림을 좀 즐기면서 소중하게 여겼으면 합니다. 

제가 중학생 때 아버님이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일본에 출장 갔다 올 때 네 전자 손목시계 하나 사다주마 하고 말입니다. 지금은 중학생들도 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니 줘도 안 찰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CASIO’라는 상표를 단 일제 전자손목시계가 정말 인기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비싼 것도 아닌데 이거 하나 차고 다니면 친구들이 모두 부러워했습니다. 하지만 4형제의 막내인 제가 이런 좋은 시계를 얻어 찰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요. 그런데 아버님이 제 졸업선물로 사다주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니 아버님이 출장에서 돌아오시는 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겠습니까? 정말 시간 안 가데요. 그래서 기다림은 지겹고 힘들다고도 하는가 봅니다. 

하지만 저는 시간이 안 가서 지루한 것보다 선물을 받을 것을 기대하는 즐거움이 훨씬 컸습니다. 얼마나 기대가 되고 가슴이 두근거리는지요. 그러니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선물을 받은 그 날보다 그 선물을 기다리며 기대하던 날이 제게는 훨씬 더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다림의 가치요 묘미입니다. 이 가치와 묘미를 아는 사람은 기다림이 행복합니다. 그래서 잘 기다릴 줄 압니다. 준비하면서 말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들

우리가 대림절을 보내며 지금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도 방금 말씀 드린 행복한 기다림이 되기 바랍니다. 기다림의 묘미를 느끼며 잘 준비하며 기다리는 절기가 되기 바랍니다. 구약 시대에도 이런 마음과 자세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몰랐지만 메시야를 기다린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메시야’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러 오실 구세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야를 고대했습니다. 특히 이방인들의 침략을 받고 그들에게 지배당하고 압제와 설움을 당할 때 이 메시야 신앙, 구세주를 기다리는 신앙은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 나온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첫 번째 내용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만드십니다. 이어서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 이번에는 여자인 하와를 만드십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잘 삽니다. 단 한 가지,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있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킨다는 전제 하에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하와를 유혹합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도 절대 죽지 않아. 하나님이 어수룩한 너희를 속인거야. 바보같이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냐? 실은 그 열매를 먹으면 너희가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속인 거라구.” 하와가 이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합니다. 정말 자기를 지혜롭게 해서 하나님처럼 만들어 줄만큼 탐스럽게 보입니다. 그래서 여인이 먼저 그 열매를 따먹고 그 다음에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함께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죄 지은 다음입니다. 아담은 “너 왜 내가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었느냐?”고 하나님이 추궁하시자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남 탓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창 3:12) 하고 하나님 탓, 마누라 탓을 합니다. 여자도 남편을 본받아 “뱀이 나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뱀 탓으로 돌립니다.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엎드리면 어떤 큰 죄라도 다 용서 받지만 아담과 하와 부부는 여전히 죄를 깨닫지 못하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데 급급합니다. 그러니 더 큰 벌이 내릴 수밖에요.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먹게 한 뱀뿐 아니라 하와에게도 아담에게도 무서운 저주가 내립니다. 뱀은 평생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여자는 임신하고 해산하는 고통을 받게 되고 남자는 평생 땀을 흘리고 고생하며 일해야 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 두 사람 다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쫓겨나고 맙니다. 무엇보다 영원히 살 수 있었던 그들이 이제는 죄 때문에 죽음을 맛보고 흙에 묻혀야 할 처지가 됩니다. 

그러니 이제는 절망입니다.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평생 농사짓고 일하고 애 낳고 고생하며 살다가 죽어 땅에 묻히고 말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따른 무서운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모진 고통과 질고가 우리 인생을 지배하게 됩니다.


❚원복음

그런데 바로 이런 무서운 저주와 심판 가운데서도 마치 진흙 속에서 보석이 찬란히 빛나는 것처럼 말씀 한 구절이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창세기 3:15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성경학자들은 이 창세기 3:15을 ‘원복음’(原福音=Proto-evangelion)이라고 부릅니다. ‘최초의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 말씀이 복음(福音)인가? 여기에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자세히 봅니다.

“내가 너로” 여기서 ‘너’는 뱀입니다. 뱀을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들이 유난히 뱀을 무서워합니다. 뱀만 보면 질겁을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다 하와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뱀은 그냥 단순히 뱀이라는 동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원수인 마귀 사탄 말입니다. 말하자면 사탄이 하와를 꾀어 불순종의 죄를 짓게 하고 남편까지 죄 짓게 해서 아담과 하와를 망하게 한 것입니다. 영원한 저주를 받아 죽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원수인 사탄이 하는 일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죄 짓게 하고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와처럼 마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저주가 내립니다. 죽음입니다. 영원한 벌입니다. 지옥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죄 짓고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그것은 사탄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귀 사탄이 기뻐할 일입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희망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 지었다고 영원히 끝이라면, 그 어떤 소망도 희망도 없다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신 말씀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여자의 후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십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브라함부터 시작해 예수님까지 이르는 족보를 소개한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 3장은 예수님으로부터 추적해 나가서 아담까지 이르는 족보를 소개한 것입니다. 바로 아담의 후손이, 즉 하와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고 그 후손인 인류 전체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받게 될 죄 사함과 영원한 구원을 창세기에서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는 뱀의 후손, 마귀 사탄과 원수가 될 것인데 그 여자의 후손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뱀은, 사탄은 예수님을 상하게 하려고 그 발꿈치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입니다. 사망이 예수님을 물고 예수님을 죽게 만듭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뱀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고 예수님은 죽고 인류의 구원은 영원히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망을 이기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십니다. 원수를 다 이기고 승리를 거두시어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뱀이 비록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셨지만 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짓밟아 승리를 거두고 원수를 영원히 멸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죄를 지어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 아담과 하와는 바로 이 창세기 3:15, 원복음의 말씀에 소망을 얻게 됩니다. 영원히 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소망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게 되어 오늘 이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소망하며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교회에 온 병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최전방이어서 뱀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어느 날 그 병사가 진지작업을 하면서 삽을 들고 땅을 파고 있는데 갑자기 커다란 뱀이 머리를 들고 달려들더라는 것입니다. 독사였을지도 모르지요. 깜짝 놀란 병사는 순간적으로 “주여!” 하고 외치며 손에 들고 있는 삽으로 그 뱀의 머리를 내리쳤답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 “주여!” 하고 외쳤는지 너 참 믿음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 뱀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삽에 찍힌 뱀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답니다. 참 재수도 없는 뱀이지요. 하필이면 삽을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납니까? 그랬더니 대대 선임하사가 와서 병사보고 그러더랍니다. “야, 그 뱀 나 주라, 두 동강은 났지만 뱀술 담가 먹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그 뱀은 그날로 바로 유리그릇에 담겨 뱀술이 되었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뱀은 달려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그러했듯이, 그리고 이 병사에게도 그랬듯이 뱀은, 마귀 사탄은 오늘도 우리의 발꿈치를 물고 그 죄라는 맹독으로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바로 그 때 우리 손에는 뭐가 들려있습니까? 삽은 아니지만 십자가가 들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예수님의 보혈의 피가 묻은 십자가 말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로 뱀의 머리를 내려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뱀은 두 동강이 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뱀의 머리를 짓밟아 두 동강 낼 무기, 십자가가 있기에 그 어떤 공격과 유혹과 위협에도 우리는 결코 흔들리지 않을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창세기로부터 시작해 구약 전체에 예언된 예수님이 2천 년 전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그리고 올해 2008년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 뜻 깊은 대림절 첫째 주일을 맞으며 이 오신 메시야,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참된 구원의 소망과 기쁨을 한껏 누리시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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