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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이 불공평합니까?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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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불공평합니까? (마 20:1~16)


에모리대학교 설교학 교수로 명성을 떨친 후레드 크레독(Fred Craddok)박사의 재미있는 일화입니다.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금연석(No Smoking Section)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옆 자리의 사람이 큰 시가를 물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크레독 박사는 통로 쪽에 앉고 담배를 피우는 남자는 건너편 통로 쪽(aisle)에 앉아있어서 담배연기가 사정없이 자기에게 몰려왔습니다. 견디다 못한 크레독 박사는 승무원을 불렀습니다. 매혹적인 팔등신 미인 승무원이 다가왔습니다. “내가 잘못된 좌석에 앉아있습니까? 나는 분명 금연석을 원했는데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여승무원은 시가를 물고 있는 남자에게 “손님, 이곳은 금연구역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승무원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담배연기를 내뿜었습니다. 크레독은 다시 승무원에게 불평을 얘기했고 승무원은 다시 그 남자에게 금연석임을 주지시켰습니다. 그래도 그는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크레독은 격분했습니다. 조금 후에 매혹적인 승무원은 음료수 쟁반을 들고 왔습니다. 그녀가 크레독과 담배 피는 사람 사이에 섰을 때 갑자기 배행기가 하강수직기류(an air pocket)를 만나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여승무원은 균형을 잃고 음료수 잔이 가득찬 쟁반을 담배 피는 남자의 앞자락에 엎고 말았습니다. 균형을 잡으려고 일어났던 이 매혹적인 여승무원이 또다시 비행기의 진동으로 크레독의 무릎에 넘어져 크레독 교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크레독은 흐뭇한 웃음을 띠우며 “하나님이 없다고 내게는 말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답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도적떼들이 디 블리스(Dee Blythe)라는 여인네 집에 들어와 리빙룸에 있는 값나가는 물건을 모두 훔쳤습니다. 방을 나오려는데 탁자 위에 놓인 흰 가루가 든 플라스틱 봉지를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Charlie”(찰리)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Charlie는 코카인 마약을 지칭하는 은어였습니다. 그리고 디 블리스 여인이 기르던 죽은 개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며칠 뒤 범죄뉴스에 범인 일당들이 잡혔다고 나왔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친 도적질뿐 아니라 마약밀매 죄에다가 개를 화장시킨 재(ashes)를 마약으로 속인 사기죄까지 덮어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디 블리스 여인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라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미국 크라이슬러 자동차 회사 회장을 역임한 리 아이아코카(Chrysler Corporation Chairman Lee Iacocca)의 경험담입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반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투표에서 두 표 차로 떨어졌습니다. 다음날 동급생들이 개표한 숫자가 학급학생 수보다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부정선거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아코카는 선생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담임선생님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일을 더 이상 거론하지 말고 내려놓으라고 하더랍니다. 부정선거를 덮어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회상하기를 그가 맨 처음 세상만사가 언제나 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교훈을 그때 배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불공평합니다(Life isn't fair!). 심지어 우리가 느끼기엔 하나님도 공평한 일만 하시는 것은 아닌듯합니다. 가끔 하나님의 불공평한 처사를 보고 인생들은 분노할 때가 많습니다. 독일 나치시대에 600만명이 넘는 유태인들이 가스탱크에서 실험용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안 계시다”(God is nowhere). “하나님은 불공평한 신이다”(God is not fair)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느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성경말씀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그때에 아침 일찍부터 저녁때까지 온종일 일을 하면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포도원주인은 이른 아침 6시쯤 인력시장에 가서 일꾼들을 데려와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켰습니다. 9시쯤(성경의 제3시) 나가보니 인력시장엔 아직도 사람이 있어 데려와 일을 시켰습니다. 열두시, 세시, 다섯 시에 나가봐도 아직 일자리를 못 구한 사람들이 있어 데려다 포도원에서 일을 시켰습니다. 성경의 하루 시간은 아침 6시가 1시이고 저녁 6시가 12시로 일을 마감하는 시간으로 삼고 있었기에 11시 즉, 저녁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한 사람은 한 시간 밖에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포도원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오후 5시쯤부터 와서 일한 품꾼들에게 먼저 품삯을 계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놀랍게도 그들에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때 아침부터 일한 일꾼들이 가슴이 설레기 시작합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을 한 데나리온 준다면 12시간 일한 자기들에게는 더 많은 품삯을 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한 데나리온만 주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12시간 일한 사람을 똑같은 품삯을 준다는 것은 너무 불공평한 일입니다. 당연히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일꾼들이 항의와 불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항의를 받은 주인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3-15)

물론 이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방향에서 할 수 있습니다. 읽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그중에서 제일 많이 접근하려는 방향은 구원론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택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들의 구원의 길을 다시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보다 늦게 택함 받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먼저 된다는 비유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16절의 말씀이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둘째로 일의 질로 접근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른 아침에 불려 와서 일했던 사람보다는 오히려 해질녘에 늦게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는 사람들이 더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하루를 공치면 집안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는데 뒤늦게 불러서 일을 시킨 주인이 너무 고마웠을 것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됨은 바로 일의 질이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바로 일의 질을 보고 감동되어 똑같이 품삯을 주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주인의 사랑입니다. 다섯 번에 걸쳐 시간차를 두고 일꾼들을 불러왔으나 모두가 하루 품삯은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 사회복지 차원에서 골고루 하루치를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사회복지의 목표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두 잘 사는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는 물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를 골고루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요, 사탄의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또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픈 해석이 있습니다. 이 비유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우주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여 나갑니다.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善하십니다. 선하다는 말은 의로우시다는 말이요, 공평하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는 언제나 공평하시지(정의롭지) 결코 불공평하시지 않습니다. 

타이 콥(Ty Cobb)이라는 야구선수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야구경기의 온갖 기록은 다 보유하고 있던 선수입니다. 그가 세운 최다 참가 경기기록, 최고 타율기록, 최다 도루기록, 최다 훔치기 기록 등을 반세기 동안 깨는 자가 없을 만큼 야구계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타이 콥은 품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인종차별 주의자였고, 포악했습니다.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죽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그의 죽어가는 병상을 찾아가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것을 강권했습니다. 그때 타이 콥은 “죽음이 얼마 안 남았는데 지금 회개한다고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온 생애를 죄만 지었는데 지금 회개 한다고 됩니까?”고 말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지금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타이 콥은 목사님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자마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목사님은 그가 구원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여러 논쟁들이 벌어졌습니다. 평생 동안 교회를 다니며 주일학교 교사로 충성한 사람과, 온갖 나쁜 죄를 짓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한 사람이 함께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간다면 얼마나 불공평한 구원이냐는 논쟁입니다.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평하지는 않다”(That's wonderful, but it's not fair). ‘만일 구원이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면 경건하게 살 필요가 없다. 나가서 마구 죄를 짓자. 그리고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지 않는가?’ 이런 문제 때문에 갈등하며 고민했던 유대교 수도사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허만 와우크(Herman Wouk)라는 유대교 학자가 “이것이 나의 하나님이다: 유대인들의 삶의 길”(This is my God: The Jewish way of life)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집에서 있었던 경험담을 얘기 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신앙심이 깊고 공부를 많이 한 경건한 분이셨습니다. 할아버지 집에는 무식하고 난폭한 성질의 하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가족이 모여 회개의 율법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방에서 엿듣던 하숙생이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습니다. “무엇이라고요?(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 다고요?) 무신론자들은 위스키를 폭음하고 돼지고기를 먹으며 평생을 여인들만 탐닉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모든 죄가 다 없어진다고요? 그렇다면 무엇 하러 평생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합니까?” 할아버지는 성경책을 가리키며 “이 책에 그렇게 쓰여 있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써 있다구요!” 그는 고함을 칩니다. “책이 있다! 책이 있다!” 그는 소리치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그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느냐는 항변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를 씻는다는 것은 그 과거를 성취의 기록으로 돌린다는 말이 아니다. 그 과거는 다만 빈칸으로 남겨질 뿐이다. 엎질러진 낭비의 시간들로 남겨질 뿐이다”(It leaves it blank, a waste of spilled years). “사람은 빨리 돌아설수록 좋다. 아직도 삶의 이야기를 쓸 만한 여유가 있을 때 돌아선다면 그만큼 이룩하여 써야할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회개하면 과거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자리가 공적으로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은 낭비된 빈칸으로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죽을 날이 언제인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No man knows his death day).

‘하나님을 믿고 구원 받읍시다’라고 하면 “무엇 하러 지금 하나님께 갑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어떤 이는 “왜 기다립니까? 지금 알았으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야지요?”라고 대꾸합니다. 이 두 질문 사이에는 큰 갭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을 즐기다가 죽기 전에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된다는 사상이 먼저 질문이요, 언제 죽을지 모르니 깨달았을 때 속히 믿어야 된다는 것이 두 번째 사상입니다. 

유대교의 유명한 랍비 엘리제가 “네가 죽기 하루 전에 하나님께 돌아오라”(Turn to God one day before your death)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제자가 묻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죽을 날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How can a man know the day of his death?) 랍비가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아마 너는 내일 죽을지 모른다. 이와 같이 매일 매일이 돌아오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매일을 종말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일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선하신 분입니다. 너무 일찍부터 하나님을 믿는 바람에 세상을 그 만큼 덜 즐겼다고 억울해 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죄의 시간들은 빈칸으로 남아 있을 뿐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엎질러진 시간일 뿐입니다. 오래, 그리고 더 많이 믿은 만큼 하나님은 위대한 상급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죽어가는 병상에서 회개하고 예수님 믿어 구원받았다고 자랑할 것 못됩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로 구원은 얻지만 부끄러운 구원일 뿐입니다.

더 억울한 것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주님의 말씀을 따라 나를 희생하며 헌신했는데 배신을 당하고 뒷발로 채였을 때입니다. 더구나 못된 짓 한 녀석이 더 잘되는 것을 보면 억울함이 배나 더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사랑하면 더 나은 나를 만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현실이 그렇지 않을 때 억울하고 분합니다.

정말 어렵다고 해서 남의 돈도 빌리고 집안의 쌈짓돈까지 긁어서 꾸어 주었더니 홀딱 떼어먹고 도망가서 낭패하게 만들었습니다. 몇 년 동안 그 빚 때문에 곤욕을 치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녀석은 잘 먹고, 잘살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덕망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고 있었습니다. 까무러칠 일입니다. 간이 터질 일입니다.

우리나라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미국사람과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것을 “국제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이중문화가정이라고 부릅니다. 6.25사변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가난한 집 딸들이거나 직업여성들이 팔자를 고치려고 미군과 결혼을 많이 했습니다. 맏딸로 태어난 이 여자는 아버지가 소천한 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국제결혼을 통해 팔자를 고치는 모험을 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와서 미국 남편과 살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친정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홀어머니를 모셔오고 남동생들을 이민 초청했습니다. 동생들의 자식들을 데려와서 가르쳤습니다. 친정식구들을 위해 자신의 아이는 낳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큰 동생, 둘째동생, 셋째동생, 모두 결혼을 시키고 아이들을 낳아서 잘 기르게 되었습니다. 누나의 전적인 희생으로 미국이민의 삶을 잘 정착해갔습니다. 십여 년 동안 뒷바라지들을 해주었더니 제법 괜찮은 사업체도 갖게 되었고, 좋은 동네로 이사를 해서 지역 유지들과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모두 공부를 잘했습니다. 우등생들이었습니다. 모든 가족이 모이면 열댓 명은 족히 될 만큼 불어났습니다. 뒤에서 그들을 보살피는 누나는 멀찌감치 보고만 있어도 흐뭇했습니다. 

어느 가을 추수감사절이 다가왔습니다. 동생들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큰 동생의 집이 가장 크고 정원이 넓으니 온 가족이 모여 추수감사 만찬을 갖자고 제의했습니다. “모이기만 해라. 모든 파티 준비는 내가 해가마!” 한 달 가까이 누나는 파티를 준비합니다. 어머님을 기쁘게 할 깜짝 선물, 동생 가족들, 많은 조카들에게 줄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맛있는 터키(칠면조)를 사고 온갖 과일들을 준비했습니다. 흥분된 마음으로 11월 넷째 목요일, 추수감사일에 남편과 함께 차에 물건을 잔뜩 싣고 동생네 집으로 일찍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집안이 텅 비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남동생 혼자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누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누나의 은혜는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됐습니다. 우리끼리 잘 살 수 있습니다. 국제 결혼한 누나가 있다는 것을 알면 이곳 한인사회에서 대우를 못 받습니다. 우리들 집에 안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동생들도 같은 생각이냐?” “아침에 모여서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가끔 전화만 하시지 아이들에게도 매형과 함께 안 갔으면 합니다.” 이 여인은 하늘이 무너졌습니다. 바다가 뒤집히는 듯했습니다. 내 자식도 안 낳았는데! 그렇게도 남편은 아이를 원했지만 조카들이 다 우리 아이가 아니냐고 설득하며 지금가지 살아왔는데! 금족령이라니! 영문도 모르는 남편을 차에 태우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몇 날 몇 밤을 지새우며 차를 몰고 달렸습니다. 지구 끝까지 달리고 싶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제가 사는 남쪽 끝에 이르러 주일 아침에 음식점을 찾다가 우리 교인에게 걸려 우리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제 손을 잡고 벌벌 떨며 너무 억울하다 했습니다. 분하다 했습니다. 죽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놈들은 잘 사는데 나는 이제 가진 것이 없어요. 목사님! 이젠 다 늙어빠진 병든 몸뚱이만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나는 지금도 그녀의 몸부림을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들이 한 두 번입니까? 인생은 불공평합니다. 억울하고 분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도적질 하고 사기치고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은 배가 터지게 잘 삽니다. 정직하게 희생하며 사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도 불공평하게(God is not fair!) 보여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아닙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 보시렵니까?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나를 암흑 속에 두셨나이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시 143:3-4)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시 102:3-5)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시 102:8-9) 

이렇게 억울함을 당하던 시편기자들은 끝내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 102:26-2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시 116:8)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28-29)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평하신 분입니다. 끝내는 우리에게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하십니다. 이사야의 찬양을 들어봅시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공평하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함을 받으시리니』(사 5:16, 개역성경)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 3:13)

인생은 불공평합니다(Life is not fair). 세상이 불공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인생은 공평합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고 공평하고 의롭습니다. 그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의 손을 잡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라. 결코 낙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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