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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요일 3: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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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요일 3:13~24)


뉴욕시 즉결심판부에 ‘라과디아’라고 하는 유명한 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가게에서 빵을 훔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서 즉결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남의 가게에서 빵을 훔치게 되었는가 물었더니 노인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판사님! 한 사흘 동안 굶었더니 아무것도 안 보입디다.” 그러나 판사는 근엄하게 그를 꾸짖고 그에게 벌금형을 언도했습니다. 10불의 벌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 판사가 일어나더니 자기 주머니에서 10불을 꺼내서는 그 노인의 벌금을 대신 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곤 말합니다. “사실은 나도 따지고 보면 죄인입니다. 우리 뉴욕시 안에 이렇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늘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벌금을 대신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모자를 벗어서 그 방청석에 있는 방청객들에게 돌립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이 모자에 헌금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모자가 한 바퀴를 돌고 왔는데 47불의 돈이 걷혀졌습니다. 그것을 그 노인에게 주었더니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그리고 그는 “이제 제가 다시는 도둑질하지 않고 제 힘으로 일해서 먹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유유히 재판정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이 ‘라과디아’판사는 그 일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에 뉴욕시장이 됩니다. 불행히도 그는 세상을 떠납니다만 뉴욕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해서 뉴욕의 새로운 공항을 건설하는데 그 공항의 이름을 ‘라과디아공항’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판사, 그 유명한 시장의 이름을 오래 오래 기억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다시금 기억하는 것은 그가 바로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 물질과 시간을 드려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목사님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회심을 하는데 3가지를 회심해야 온전한 회심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머리의 회심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적으로 보던 자기 생각이 바꿔지지 않으면 그는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회심은 가슴의 회심입니다. 마음이 바꿔져야 합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마음이 예뻐야 여자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미워하던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증오하던 마음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분노하던 마음이 평안한 마음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 회심했다고, 거듭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말하는 

세 번째 회심은 돈지갑의 회심입니다. 진실로 그의 씀씀이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의 가진 재물을 가치 있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실로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실천은 이와 같이 구체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여러 가지 많은 비유를 들으셨는데 대표적인 비유 중 하나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서 쓰러져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보고 “어이구! 안되었네. 정부가 왜 이런 사람을 빨리 구조해 주지 않나? 왜 도둑때들을 막지 않나?” 불평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직접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그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그가 가진 기름으로 그의 상처에 부어주었습니다. 자기의 나귀에 태우고 여관에 데려가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자.’ 그러나 그것은 말로 되어 지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사랑이 구체적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심판장의 자리에 앉으셨는데 온 인류가 그 앞에 나아갑니다.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양과 염소로 나눕니다. 오른쪽에는 양이 된 사람, 왼쪽에는 염소의 무리로 나눕니다. 양은 구원받은 백성들이고 염소는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 때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나를 찾아왔고, 내가 목말라 있을 때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 내게 입을 것을 주었다.” “아니! 저희가 언제 주님께 그런 일을 했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바로 이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십니다. 주님은 구체적으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벳새다 광야에서도 오천 명의 굶주린 무리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축복하시고 오병이어를 떼어서 그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물론 그 전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희가 먹을 것 주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도 오늘도 우리의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도록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아주 구체적인 사랑을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17절~1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궁핍한 형제를 보고 맘을 열고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 가운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 이 행함과 진실함이 무엇입니까? 구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구체적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할까요?

첫째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경 16절 말씀을 다시 읽어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먼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마치 내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것이 지당하고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의 잔치가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이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고, 그가 피를 흘리심으로 인류의 죄가 용서받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말로만의 사랑이 아닙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우리 주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시는데 그 새 계명이 실천적인 사랑을 요구합니다. “내가 너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다.” 증표가 됩니다. 사랑은 제자의 증표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서로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너에게서 제자의 징표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5장 7절에 보니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가난한 형제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구제할 것이고, 인색한 마음으로 구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될까요? 사랑의 실천은 구원과 믿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증거, 우리의 구원의 증거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한번 읽어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구나.”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이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때 우리는 아직 사망의 거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간 줄 우리가 알거니와” 사랑은 구원의 증거입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은 사랑의 징표를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고,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증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니 아주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헐벗고 가난한 형제가 있는데 말로만 “가서 밥해먹지 왜 굶고 있어?”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데 “아! 가서 장작불이라도 떼지 왜 그러고 있어?” 이런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구원과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생명 있는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사랑을 구체적으로 행하십시오. 성경은 그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왜 구체적으로 사랑해야 될까요? 사랑의 실천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다양합니다. 우리의 몸으로도, 우리의 시간을 내어서, 우리를 드려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물질을 드려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구제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주님은 가장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만약 어느 부모에게 자녀가 5남매 있다고 합시다. 둘째가 사업에 부도가 나서 아주 어렵습니다. 아이들 등록금도 챙겨주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다 모여서 “우리 둘째가 어려우니까 우리가 조금씩 도와주자.” 이래서 누구는 아이들 등록금을 대주고, 누구는 생활비를 대주고, 누구는 직장을 알선해 주었다고 예를 들어봅시다. 그럴 때 부모가 그것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정말 너희들 참 훌륭하다.” 부모의 마음에 너무너무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적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집안에 있는 자녀이고 불신자들은 집 밖에 있는 자녀입니다. 집안에 있는 자녀보다 집 밖에 있는 자녀가 더 불쌍해질 수 있습니다. 더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서로 어려움을 도울 때 하늘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기쁘게 하는 사람을 또한 축복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구제하는 사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도 그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1절, 22절 말씀을 한번 같이 읽어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그의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구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켜 그의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이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을 실천할 때, 구제할 때 우리의 기도에 더 빨리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 기도가 급속히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8장에 보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이렇게 시작되는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종종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모습을 갖는 회개하는 금식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면서 서로 다투고 미워하고 증오했습니다. 자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58장 6절 이하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입니다. 벗은 자를 보면 입혀주는 것, 가난한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유대인들의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이웃을 사랑할 때 너의 질병이 치료받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사야 58장 9절에 보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우리의 기도에도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실천, 구제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구제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너무 너무 잘 기억하십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 백부장으로 소개되는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고넬료는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천사가 고넬료를 찾아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우리의 구제를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여러분! 옆에 분들에게 이야기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구제를 기억하십니다.” 물론 구제받는 것도 기억하시겠지만, 우리가 남을 구제하는 것을 더 잘 기억하십니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느 집사가 아무개에게 얼마를 구제했지.” “어려운 사람이 오니 쌀 한 됫박을 나눠줬지.” “누구에게 돈 2000원을 줬지.” 하나님이 다 기억하십니다. 일일이 다 적어놓으십니다. 천국에도 전산장치가 다 되고, 컴퓨터 장치가 다 되어서 일생의 기록이 다 기록됩니다. 버튼만 누르면 즉석에서 펼쳐 나옵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웃을 위해서 우리의 손을 베풀고 나눠주었는가.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시고, 우리의 구제를 기억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구제하는 사람을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보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할렐루야! 우리가 남에게 베풀 때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구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저는 10월 달이 되어서 우리 교회 53주년 창립의 달이 되어서 너무 맘이 기쁘고 즐거운데, 어느 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그런 책망을 하십니다. “야! 창립한 달은 니들만 좋아하냐? 니들끼리 한마음대축제 서로 뛰고 줄다리기하고 선물 나눠 갖고, 또 성가대 칸타타하고 너희들끼리 찬양하고, 또 기관 찬양대회 한다고 너희들끼리만 하냐? 대체 이웃에게는 무엇을 나눠주고 무슨 기쁨을 나눌 것이냐?” 

제 마음 속에 회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사람들에게 무엇을 나눠주고, 기쁨을 함께 나눌 것인가? 우리끼리의 잔치가 아니었나?’ 제 마음 속에 그런 회개의 기도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쌀 나누기를 해서 이 시대에, 경제위기에, 금융위기에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에게 조그만 사랑이라도 나눠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그런 광고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경제 원리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어려우면 자꾸 지갑을 닫고 돈을 안 씁니다. 사실은 경제위기는 돈을 너무 안 쓰기 때문에 옵니다. 해외에 나가서 과소비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국내에서는 적당히 돈을 써야 경제가 활성화되고 경제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불신 때문에, 믿지 못하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현금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돈을 꽉 쥐고 있으니까 경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적당히 돈을 쓰시기 바랍니다. 쓰던 대로 쓰십시오. 너무 절약하지 말고. 그 돈을 쓸 때 경제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어려울 때 하나님의 경제 원리는 무엇입니까? 이웃을 위해 구제하고 선교할 때 하나님도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들도 많은 교회가 있지만 구제 열심히 하는 교회, 선교 열심히 하는 교회는 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 원리입니다. 우리는 그저 끌어안으면 부자가 되는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잠언 11장 24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어떤 사람은 그렇게 구두쇠같이 사는데도 늘 가난합니다. 맨 날 돈 꾸러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늘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 나눠주는데 그래도 풍족하게 살아갑니다. 

잠언 11장 25절에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경제 원리입니다. 우리가 나눌 때, 베풀 때, 하나님은 더 흔들어 채워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명기 15장 10절에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가 구제할 때 그의 손으로 하는 일에, 그의 범사에 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을 한번 실천해 보셨습니까? 자꾸 움켜쥐지 마십시오. ‘나도 어려운데. 부자나 구제하는 거지.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구제를 해. 사치스럽게.’ 여러분!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닙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부자인 것입니다. 마음의 부자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십시다. 자꾸 끌어안으면 그는 점점 더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언 19장 17절에 보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남에게 구제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돈을 꿔드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빚쟁이가 되어서 언젠가 그것을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구제하는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빚을 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물질을 이제 가치 있게 사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원리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가치 있게 사용하실 때 하나님은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어려울 때가 더 구제해야 할 때입니다.

다윗왕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 왕이 언젠가 누구에게 보석하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보석에 좋은 글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석기술자를 불러서 “여보게! 내가 전쟁에 이겨도 내가 교만하지 않고, 내가 너무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 그런 좋은 구절을 여기 새겨주게.” 이 보석기술자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런 구절을 생각해 내지 못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솔로몬의 나이가 10살밖에 안 되었는데 솔로몬이 그 때도 지혜로웠다고 합니다. 솔로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왕자여! 부왕이 이런 것을 원하는데 좋은 글귀가 없을까요?” 솔로몬이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잠시 후면 죽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제 당신의 생명을 하나님이 거둬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금 힘들다고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도 잠시뿐 곧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엔 기회가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기회, 베풀 수 있는 기회, 나눌 수 있는 기회,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도울 수 있을 때 돕는 것입니다. 내게 도울 힘이 있을 때 남에게 선을 베풀면 하나님이 그것을 다 기억하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제가 종종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전에 공릉동에 있는 공릉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을 때입니다. 20년도 넘은 이야기입니다. 돌아가신 김정현 목사님이라고 계셨는데 그 목사님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대만에서 기독교인 몇 분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그 교회에서 잘 대접하고 여행도 시켜드리고 한국의 교회도 보여드리고 했습니다. 그리곤 이제 그분들이 갈 때 교회에서 만든 열쇠고리를 하나씩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잘 배웅을 해 드렸는데 그 후 한 1~2년 지나서 목사님이 대만을 가시게 되었습니다. 어떤 회의차 대만을 갔는데 찾아갈지 알았는데 그만 주소를 잊어버려서 찾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택시를 탔는데 큰일입니다. 어떻게 찾아가야하는지. 그런데 택시기사가 택시운전을 하는데 열쇠고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그 열쇠고리를 자세히 보았더니 그게 공릉교회 열쇠고리인 것입니다. 물어보니 그분이 공릉교회를 방문했던 그분이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그분이 하루 일을 내려놓고 목사님을 모시고 하루 종일 회의를 다녔다는 것입니다. 선을 베풀었더니 대만에까지 가서 보답을 받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잊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기억하시고 선행으로 갚아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 선한 일에 사용합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입니다. 어떤 목사님들 모임에 갔더니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의 한 교인이 남편이 돌아가시면서 500만 불을 상속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이 갑자기 많은 재산이 생기니까 이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돈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걱정하실 것 없이 한 절반은 떼어서 자선단체에 기부하십시오. 그것이 하늘의 상급을 쌓는 일입니다. 또 나머지 일부는 선교헌금을 드리세요. 선교사들 나가서 고생하는데 선교헌금 드리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본인이 사셔야 하니까 그것은 잘 저축해 두셔서 매일 매일 필요한 만큼 찾아 쓰십시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응답을 하고, 자선단체에 재산을 기부하는 서약서를 써야 하는데, 다 써놓고 손이 떨려 사인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사인을 못하고 자꾸 하루 이틀 미룹니다. 일주일을 미뤘습니다. 

세상에! 일주일을 미뤘다가 어느 날 밤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사인도 못하고. 여러분! 그 재산은 누구의 것이 되었습니까? 자기는 한 푼도 써 보지도 못하고, 좋은 기관에 기부도 못하고, 그냥 놔버린 것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남에게 베푼 것이 남는 것입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줄때 그것이 바로 천국에 보화를 쌓는 일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미국의 한 구두쇠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재산을 좀 모았습니다. 그런데 자기 재산을 자식들에게 주고 싶지 않고, 다 가져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을 때 관에다가 돈을 다 넣으면 좋겠는데 자식 놈들이 아무래도 그렇게 안 할 것 같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 아는 목사님하고 의사하고 변호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십만 불씩 각자 맡겼습니다. 내가 죽을 때 이 돈을 꼭 관 속에 넣어달라고, 내가 이것을 꼭 좀 가지고 가고 싶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얼마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의사, 변호사가 와서 장례를 치러드리고 그리고 잘 묻어드리고 마차로 돌아옵니다. 

셋이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그 십만 불 관 속에 분명히 넣었죠?”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그걸 다 넣을 수 있나요? 십일조는 떼어야죠.”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십만 불은 다 넣었습니까?” 
“그럴 수가 있나요? 그분이 나한테 신세진 게 얼만데. 병원 수리할 곳도 있고 해서 50%는 떼고, 50%만 넣었습니다.” 

변호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10만 불을 다 넣었습니까?” 
“아! 그분이 현금으로 가져가려면 힘들 것 같아서 내가 가계수표로 대신 써 드렸습니다. 현금은 다 빼고.” 

가계수표라는 것은 은행에 가서 내야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가계수표를 가지고 어디 가서 청구하겠습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유익한 일에 사용할 때 그것이 바로 내 것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천국의 보화를 쌓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이 물질, 정말 이웃을 위해서 선한 일에 아름답게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것이 곧 주님께 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에 신실한 군인이며 크리스천인 마틴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인데, 어느 추운 겨울날 그가 길을 걸어가는데 한 사람이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배고파서 추위에 떨고 있는데 뭔가 도와주려고 보았더니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너무 안타까워 그냥 갈 수 없어서 자기 군인 외투를 벗어서 반을 잘라 반을 그 걸인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자신은 반만 입고 돌아왔습니다. 밤에 꿈을 꾸었는데 예수님이 보좌에 앉아계시는데 천사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군인외투 반쪽만 입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가 묻습니다. “아니! 예수님 어떻게 외투를 반쪽만 입고 계십니까? 그걸 누가 준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기를 “내 사랑하는 종 마틴이 내게 준 것이다.”하시면서 너무 기쁘게 대답을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꿈속에서 보고 마틴은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우리의 한번밖에 없는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하나님 기뻐하는 이 사랑의 실천, 이 구제하는 일, 그리고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실함과 행함으로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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