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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만남의 축복 (롬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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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만남의 축복 (롬 1:5-7)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살수도 있고, 불행한 인생을 살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로마 교회와 성도들을 만나기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13)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은…” 바울은 로마에 가고 싶은 소원이 간절했다. 로마 관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남에는, 화가 되는 만남이 있고, 유익한 만남이 있다. 

  먼저 만나면 피곤하고, 불편한 사람이 있다. 아무리 비싼 밥을 사줘도, 소화가 되지 않고 불편하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상한 소리가 되어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고,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들어, 영적으로 약해지게 만든다. 이런 만남은 유익하지 못한 만남이다. 

  반면에 만나서 말은 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만남이 있다. 늘 기대되고, 만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모든 면에서 유익하고, 축복되는 만남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만남에는, 늘 좋은 만남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심으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여러 차례 재혼했으나, 거듭 실패했다. 그런데 클린턴이 잘못된 길을 걷지 않고, 잘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초등학교 다닐 때, 교회학교 선생님을 잘 만났기 때문이다. “너는 육의 아버지는 안 계시지만, 더 좋은 영의 아버지가 계시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아버지로 삼고, 힘들 때마다 그분과 상의하고, 그분께 네 인생을 맡기면, 너는 승리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어 주었다. 

  또 하나, 빌 클린턴을 대통령이 되게 한 만남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난 경험이다.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미국 전역의 고등학생 가운데, 40명을 선발해서 백악관으로 초대한 일이다. 그때 초대된 학생 가운데, 빌 클린턴이 있었다. 

  학생을 대표해서, 케네디 대통령과 직접 악수하는 사진이,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이 만남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빌 클린턴에게, 최고의 흥분과 기대감을 가져다준 사건이 되었다. 그때부터 빌 클린턴은 비전을 가졌다. 

  ‘나도 케네디 대통령처럼, 백악관에 주인공이 되겠다.’는 자화상을 그리고, 인생의 목표를 대통령에 맞추고,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가를 지불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그 믿음 위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비전의 씨앗을 심고 가꾸니, 결국 대통령이라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클린턴은 ‘내가 대통령 된 것은, 케네디와의 악수의 힘 때문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므로 만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만남은 내 인생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의 만남이 서로 유익을 주고, 영적으로 성숙함을 줄 수 있는 만남이 되기를 축원한다. 


1. 성도의 만남은, 서로의 믿음을 견고케 해야 한다. 

본문은 성도들의 만남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먼저 11절은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방문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나누어주어,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를 원했기에, 성도의 만남은 서로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만남이어야 한다. 바울은 내가 왜 로마를 방문해서, 너희를 보기를 원하는 줄 아느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주어, 너희 믿음을 강하게 하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서로 나누고 섬겨, 다른 사람의 믿음을 견고케 하는 만남이, 성도들의 교제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무엇이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1) 은사는 하나님이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요 축복이기에, 바울은 축복을 사명으로 알았다. 우리가 은사를 받음이 축복이 아니다.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을 견고케 할 때, 진정한 축복이 된다. 따라서 성도들은 모여서, 자기 자신의 잘났다고 떠들며, 자랑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이다. 왜 위대하신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아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 많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에 위대하시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하게 살라고 말씀하신다. 

  복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공하는 복, 또 하나는 위대해지는 복이다. 성공을 남보다 잘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대신 진정으로 위대해지는 복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제일 심한 욕이 무엇인가? 나는 너 때문에 예수를 못 믿겠다. 너를 보면 오히려, 시험에 든다, 너를 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 네가 인간이 되면, 그때 내가 예수를 믿겠다. 네가 변화되면, 내가 교회에 나가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것보다 비참한 말은 없다. 

  왜 이런 말을 듣는가?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축복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이 무엇인가? 목소리, 악기연주, 음식 솜씨, 물질…, 이런 축복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도구가 되기 바란다. 성도들이 만나서 서로 섬김으로, 서로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바란다. 

(2) 바울은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고통을 사명으로 알았기에, 어려움 당하는 로마 교회를 도울 수 있었다. 앞으로 로마 성도들에게 닥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겪은 어려움은 사명이다. 나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눔으로, 믿음을 견고케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지난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이번 올림픽선수위원이 된, 문대성 선수를 기억하시나요? 가난한 형편에, 누나가 넷이나 있는 가정에 태어난 문 선수는, 어릴 적에 수제비만 먹으면서 어렵게 자랐다. 초등학교 때, 친구에게 맞는 것을 본 어머니 손에 이끌려, 처음 태권도를 시작했다. 

  가난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운동을 했다. 선수생활도 평탄하지 않았다. 대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로 아시아선수권에 나갔는데, 8체급에 출전한 우리 선수 8명 중, 7명은 메달을 땄다. 그러나 문 선수만은, 예선에서 탈락을 하고 말았다.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시합에서 부상을 당해, 다리를 자라야 하는 위기를 맞게 되지만, 다행히 자신의 몸에 맞는 항생제를 찾아서,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규정이 바뀌어, 다른 선수에게 대표자리를 내주고, 실의에 빠져 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후로도 불행은 계속되었다. 부두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손가락 3개가 잘리는 사고를 당했고,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큰누나는 갑상선 암 선고를 받았다. 이렇게 겹치는 불행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문 선수는, 그제야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는, 내 인생도, 내 가정도 바꿀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붙들었다. 이후 문 선수는 2002년 부산 아시아게임에서 우승함으로 재기에 성공했고, 그 다음 해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에 이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많은 좌절과 시련을 겪은 후에, 하나님을 만나 더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비행 청소년들을 선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쓰임 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강하게 하는 사람인가? 시험에 들게 하고, 약하게 하는 사람인가? 


2. 성도의 만남은,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어야 한다(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우리의 만남은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든든히 세워 주기 위해서이다. 

  안위한다(쉼파라칼레오)는, 함께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말이다. 성도들의 만남은, 서로 (함께) 위로하고, 격려하는 만남이 되어야 한다. 가정과 교회는, 서로 함께 위로하고 격려하는 공동체이다. 함께 모여서 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고통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만남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상한 갈대와 같이 연약하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날마다 즐겁지 않다. 피곤하고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 힘을 공급받지 않으면, 주저앉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포기하기에, 위로가 반드시 필요하다. 

  위로는 쓰러지려는 우리를 세워주고,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준다. 계속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해 주고, 전진할 수 있도록 능력을 준다. 교회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공동체이다. 

  우리 중에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는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하다. 힘들고 어렵고 마음이 아플 때, 누군가가 한마디 해 주는 말이, 내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 누군가 내게 와서 등을 두드려 주고, 손을 잡아 주면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된다. 

  예수님께서 많은 환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셨다.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환자를 고치실 수 있으셨지만, 왜 안수하시고 병을 고치셨을까? 그들에게 손을 얹으심이 위로요, 격려였기 때문이다. 문둥병에 걸렸다고 하면, 문병도 오지 않고, 감히 손을 얹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부위에 손을 얹으시고, 그들을 고쳐주셨다.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고치실 수 있지만, 눈먼 자의 눈을 만지시고, 상처받고 거절당하고 외로운 자의 육신에 손을 얹고, 축복하셔서 낫게 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마8:14-15)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 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그의 손을 만지심으로, 그를 치료해 주셨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는 문제를 들어주고 품어주고 위로해주는 공동체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네가 기도를 안 하니까, 말씀을 안 읽으니까 그런 문제가 생긴다. 그런 병에 걸렸다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보다는,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고 하신 예수님처럼, 가서 그 손을 만져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을까요? 

(1) 칭찬하라. 
우리는 칭찬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좋은 성품에 대해 칭찬을 받거나,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칭찬을 받을 때, 위로와 격려가 된다. (히10: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다. 

  칭찬은 상대방의 좋은 점, 밝은 점, 장점을 부각시킨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변화의 가능성까지 보면 칭찬할 수 있다. 바나바가 바울을 칭찬할 수 있던 이유는, 바울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가능성을 보고 부르셨다. 덤벙대어 실수만 연발하는 시몬을 보시고, 장차 너는 게바(베드로)라 하리라 하셨다(요1:42). 예수님의 눈으로 보자, 바울은 교회의 핍박자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열심을 보니, 이방의 사도가 될 가능성을 보았다. 

(2)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 주라.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좌절한다. 그때 위로가 필요하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해 주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해 줌이 위로다. 

  바울은 과거에 교회를 핍박하던 자다.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상처를, 성도들에게 남긴 사람이다. 그런데 바나바가 바울을 이해해 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입장을, 이해해줬다. 슬픈 일을 당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3) 용기를 불어넣어 주라. 
격려는 영어로 ‘encouragement’다. 이 말은 en(안에) + courage(용기) = 낙심된 사람에게 용기 안에 있도록 함이 격려다. 인간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저앉기에,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줘야 한다. 

  우리 안에는 욕망과 꿈이 있는데, 인간들은 힘든 일을 만나면, 의욕을 상실한다. 그 의욕을 상실할 때, 인간은 무너져 내린다. 그것을 침체라 하고, 슬럼프라 한다. 의욕을 상실하게 되면, 바람이 빠진 타이어와 같다. 그러면 차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기에 주저앉고, 계속 다니면 타이어는 못쓰게 된다. 

  위로와 격려는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위로와 격려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한 가정을, 한 교회를, 한 국가를,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바나바가 바울에게 베푼 위로와 격려로, 세계는 복음화 되었고,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았다. 우리는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자. 


3. 성도의 만남은, 열매가 있어야 한다(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이 왜 로마 교회에 가기를 원했는가? 열매 맺기 위해서다. 열매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유익과 축복이다. 사과나무가 사과나무로만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사과나무에는 사과 열매가 맺혀야, 다른 사람들이 그 사과를 따먹음으로, 유익을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만남으로 열매를 맺어, 세상이 그 복을 누려야 된다. 우리의 믿음과 성품이 변하고, 사고방식이 달라짐으로 말미암아, 결국 세상 사람들이 그 열매를 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빚진 자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훼방자요, 핍박 자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보니까, 복음의 빚진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복음의 빚진 자로서, 평생토록 빚 갚는 삶을 심정으로, 이방 세계에 나가서 복음 전도에 힘썼다. 

  따라서 예배당 안에 모여 있는 우리는, 너하고 나하고 좋아서 만은 안 된다. 서로의 믿음을 격려하는 수준에서 끝나면 안 된다. 열매가 맺혀야 된다. 그래서 그 열매가,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해야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했다. 사람을 창조하신 후, 제일 먼저 복을 주셨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이후,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복을 잃어버리고, 저주와 멸망 속에 살아가고 있다. 타락한 자들에게, 복을 회복시켜 주시기 원해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다. 복을 구하는 것이 기복신앙이 아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복을 구하여, 복을 받은 인생이 되었다. 

  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이고(시73:28)고, 복을 주신 이유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하였다. 성도는 다른 사람에게, 그 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배달부가 되어야 한다. 이를 알지 못하기에 문제가 된다. 

  우리로 인해, 세상이 복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게 되기에, 너희가 사로 사랑함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는 말이다. 성도는 열매를 맺어서, 세상에 나누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 어떤 열매를 맺고 있나요? 우리 교회는 어떤 열매를 맺어 가고 있나요? 

  우리끼리만 좋아서는 안 된다. 우리끼리만 누리는 열매가 아니라, 예배당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열매를 맺어야 된다. 그것이 성도들이 교제를 하는 이유다. 물이 언제 썩는지 아나요? 고여 있으면 썩는다. 머물러 있으면 썩는다. 나만 보기 시작하면 나눌 수가 없다. 

  나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볼 줄 알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줄 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열매는 영향력이다. 오늘 우리 교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가 축복을 받고, 변화되고, 위로하는 역사가 있어야, 열매 맺는 삶이 된다. 

  성도는 열매를 맺어서, 내가 가지려고 하면 안 된다. 성경적인 열매의 의미는, 나누어주는데 있다. 나누어줄 때 영향력이 생긴다.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어서, 세상에 영향력을 주기를 원하나요? 이제 세계를 가슴을 품고 기도하자. 


  결론이다. 

만남은 하나님 안에서 축복이다. 만남의 축복을 이루려면 (1) 서로 믿음을 견고케 해야 한다. 우리의 고통과 축복을 서로 나눔으로 믿음을 견고케 하자. (2) 서로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어야 한다. (3)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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