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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덕을 세우자 (잠 22:11~12, 고전 1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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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덕을 세우자 (잠 22:11~12, 고전 14:10~12)


오래 전 중국 성도(청두)에서 무후사(武候祠)라는 사당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유비의 무덤인 혜능이 있습니다. 조조는 죽은 다음 자신의 무덤을 파헤칠까봐 100개의 비슷한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조조가 죽은 후에 그의 무덤을 찾아 파헤치기 위해 100개의 무덤을 다 파헤쳤다고 합니다. 그 곳에는 유비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그 무덤 하나만 길이가 12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유비의 무덤은 크지 않지만 그러나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삼국지에는 관우나 장비와 같은 용장(勇將)이 있습니다. 조조와 같은 지장(智將)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비와 같은 덕장(德將)이 있습니다.
  
일전 어느 신문에 “위기에 필요한 인재”라는 제목의 리더에 관한 글이 실렸습니다. 맹장과 지장과 덕장 가운데 요즘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의 형태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답은 물론 덕장입니다. 덕이 있는 리더가 어떤 리더보다 힘이 있습니다. ‘용장이 지장을 못 이기고, 지장이 덕장을 못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뱃심으로 이끄는 용장과 머리로 이끄는 지장과 가슴으로 이끄는 덕장 가운데 덕장이 제일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사는 시대는 감동시대입니다. 감동을 주는 리더가 좋은 리더입니다.
  
덕이란 인간 삶에 나타나는 모든 종류의 바람직한 인격과 그 인격의 발현으로 나타난 결과를 뜻합니다. 덕이란 유가의 정치사상의 핵심인 덕치주의(德治主義)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윤리와 수양의 측면에서 군자라는 바람직한 인간상과 연결되어 인격 및 여러 덕성으로 표출됩니다. 오랜 인간사에서 덕이란 지식이나 지혜 보다 인간을 다스리는 도구이며, 덕은 인격으로 여겨집니다. 근대사에서 역사적 리더들을 보세요. 히틀러나 스탈린은 용과 지를 가지고 있어도 덕이 없었기에 역사의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만들어내는 제품이 아니라 우리를 빚어내는 덕입니다. 우리 안에 덕이 있어야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잠언 22:11에는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고 합니다. 마음의 정결이 입술에는 덕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는데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친구가 됩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된다면 임금에 비하겠습니까?
  
영성가 아가도는 “스스로를 살피지 않는 사람은 아무 덕도 이룰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기 훈련, 영적 단련을 통하여 덕을 이룹니다. 덕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덕이 있고, 덕을 세우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이고 우리가 자신을 살피므로 가능한 것입니다. 로마서 15:2에는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에 덕을 세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는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영적인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12절 상반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덕(德)을 세우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오이코도멘’입니다. 이 말의 명사형은 ‘오이코도메’입니다. ‘집’이나 ‘권속’을 뜻하는 ‘오이코스’와 ‘짓다’라는 의미의 ‘데모’의 합성어입니다. 집이나 어떤 영적 건물을 세우는 것이 ‘덕을 세움’의 원래 의미입니다.
  
공동체가 미덕이 있다는 것은 공동체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용서, 섬김 등의 미덕을 세우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도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섬기고 동참하여 모두가 미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참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좋은 교회입니까? 건물 때문입니까? 기구나 내용입니까? 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미덕 때문입니다. 그들이 떡을 떼고, 교제하고, 사랑하고,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죽고, 함께 살았습니다. 그 때 성도들은 미덕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서로 덕을 세웠습니다.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 교제였습니다. 이런 미덕이 초대교회로 하여금 모범적 교회가 되게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1에는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영적인 것을 사모하라는 말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영적인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결과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모하는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영적인 교제, 영적인 섬김을 사모하는 이런 영적 요소들이 교회에 덕을 세웁니다.
  
사람은 영적이며 육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영육합일체라고 합니다. 사람은 육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육적인 것만 가지고는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헬라어 원어에는 육체라는 말은 두 용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륵스’와 ‘소마’입니다. 선하거나 중립적인 의미를 말할 때는 ‘소마’라는 단어를 씁니다. 경멸적이고 부정적인 육체를 말할 때는 ‘사륵스’를 씁니다. 죄를 지어 죽는 몸은 ‘사륵스’입니다. 건강하고 매력적이고 남에게 덕을 끼치는 몸은 ‘소마’입니다. 우리는 육체만을 가지고는 결코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덕을 세우는 것은 영입니다. 영을 사모해야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법보다 덕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법으로 따지고, 치리하고, 벌을 주기만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만 있으면 덕이 없어집니다. 율법만 있으면 죄를 짓게 하고, 죽게 하고, 멸망하게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고민하던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덕이 없으면 메말라지고, 비판하고, 규정하고, 정죄하고, 결국은 죽입니다.
  
베드로전서 2:2에는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매일 신령한 것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령하게 변하고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로마서 14:21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형제에게 덕을 세우기 위하여 내가 좋아하는 일도 거절하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는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제의 덕을 위해서는 내가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해야 좋은 성도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어떤 아이가 목사님의 방을 방문했습니다. 목사님의 방에는 난파선의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바다에서 허우적거립니다. 구명보트 안에서 보트 너머로 손을 뻗어 사람들의 손을 잡으려고 합니다. 이 그림을 본 한 소년이 물었습니다. “사람들을 구하려고 손을 뻗는 거예요? 아니면 악수하려고 하는 거예요?” 언제나 두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악수하는 것이 전부인 교회가 있는가 하면 멸망하는 사람에게 손을 뻗는 교회가 있습니다. 악수하는 것도 좋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적 관심이며 영적으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한대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합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해야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는 우리가 됩시다.


둘째,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가 풍성해야 합니다.

  12절 하반절입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교회의 덕은 은사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드시 은사도 주십니다. 은사도 주시지 않고 일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각자가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없습니다. 또한 모든 은사를 소유한 개인도 없습니다. 각자의 은사를 발휘하면 교회에 덕을 세우게 되고, 풍성하게 됩니다.
  
성도는 모두에게 은사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두에게 각양의 은사가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7:7에는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합니다. 모든 성도는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은사를 발견해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6에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합니다. 은사는 다 다릅니다. 다양한 은사가 하나의 교회를 위하여 사용됩니다. 교회의 지체들의 기능이 다 다르기 때문에 다양한 은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몸의 장기들이 그렇습니다. 심장과 폐와 위장 등의 다양한 장기들이 있지만 그 기능은 다 다릅니다. 이 모든 장기의 기능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베드로전서 4:10에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합니다. 각각 받은 은사라는 말은 모두가 은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은사는 문자적으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성도는 선한 청지기로 봉사해야 은사가 은사다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은사는 우리 자신이 아닌 교회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에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예언이든, 방언이든, 치유이든 모든 은사가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유익을 주는 은사인지 아닌지는 열매를 봐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은사이든지 교회에 해가 되는 것은 참 은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7에는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을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가진 은사를 사용하세요. 교회를 비판하는 것도 은사라고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판도 교회를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그 비판이 교회를 오히려 병들게 한다면 은사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모두가 달란트가 달랐습니다. 12제자의 유형은 각양의 달란트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유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2제자 가운데는 아무 달란트도 없는 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다대오나 시몬 같은 제자들은 뭘 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만히 따르는 은사는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음치라는 말에서 요즘에는 춤을 못 추면 춤치라고 합니다. 길을 잘 알지 못하면 길치라고 합니다. 방향을 잘 알지 못하면 방향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음치라고, 춤치라고 절망할 게 없습니다. 그것만이 은사가 아닙니다. 음치라도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춤치라도 다른 특기는 있습니다. 길치, 방향치도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정말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발달해서 길치가 길을 잘 찾아갑니다.
  
어떤 책에는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는 7가지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살고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유혹을 견디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보화를 천국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여섯째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복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는 우리의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영적 은사를 이 땅에서 다 사용하세요. 

하늘나라에 가지고 갈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죽을 때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쓰고 두고 가야 합니다.
  
요즘에는 ‘카리스마’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아무개는 카리스마가 있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 원래 카리스마는 성령이 선물로 준 우리 각자가 타고나는 은사를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이 은사 즉 카리스마가 풍성해야 합니다. 이 카리스마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에는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풍성해집니까? 나의 은사를 다른 사람의 은사와 나눌 때에 풍성하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1:5-6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작은 믿음이 더욱 커집니다. 믿음은 다양한 은사와 더불어 풍성하게 됩니다. 덕과 더불어 공급해야 할 것들을 열거합니다. 덕과 더불어 온갖 은사가 풍성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결론

히틀러는 암살 당할까봐 몹시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는 한 점성가에게 상담을 하였습니다. 점성가는 말하기를 “당신은 축제일에 암살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의 친위대 사령관을 불러 유대인의 축제일에는 경비를 보통 때의 열배 아니 50배로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때 점성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암살되는 날이 바로 유대인의 축제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덕으로 다스리지 못하면 두려운 사람이 많아집니다. 덕으로 섬기지 못하면 하나님이 두려워집니다. 덕으로 교회를 섬기지 못하면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에는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사람들은 덕을 세우지 못한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일이 비록 보잘 것 없다고 하더라도 덕을 세우면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가 위대한 리더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나의 작은 자리에서 모든 이에게 덕을 끼치는 사람이 되면 교회에는 유익하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두가 교회에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덕을 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작은 은사를 통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영광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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