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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룻의 아름다운 프로포즈 (룻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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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의 아름다운 프로포즈 (룻 3:1~13) 


I. 지난 줄거리 흐름

오래 전에 종영된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에는 여자들을 설레이게 했던 프로포즈들이 나옵니다. 
남자 주인공인 "사랑해도 되나요?" 피아노를 연주하며 했던 사랑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네 눈엔 내가 안 보이니? 이 안에 너 있다."는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명 대사가 되었습니다. 

「빅 피쉬」라는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에드워드는 사랑하는 여인 산드라가 황금 수선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 전지역에서 1만송이 황금 수선화를 공수해 옵니다. 그리고 산드라의 집 밖을 가득 채웁니다. 밖을 내다보다 깜짝 놀라는 산드라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산드라, 난 너를 사랑해. 너랑 결혼할거야." 

오늘 본문엔 사랑스런 여인 룻의 프로포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룻기는 단 넉 장으로 구성된 짤막한 단편같은 성경이지만 룻기를 바라보는 눈(관점)은 참 다양합니다. 
① 룻기는 한 이방 여인의 개종을 통해 구약에도 누구나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약의 사도행전이라고 합니다.(A.S. Herbert)
② 룻기를 국제결혼을 금지한 유대 율법에 반항하는 개혁 문학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③ 룻기는 다윗 왕권으로 정통성을 옹호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쓰여진 정복자의 논리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④ 약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준 민중 문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⑤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보아스는 그리스도를, 룻은 성도를 즉 교회를 의미한다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여기 나오미는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성령님이라고 합니다. 혹 나오미를 목회자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룻기를 어두운 사사시대와 다윗 왕조의 역사를 연결하는 구속사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야 룻기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숨은 주인공이 보입니다. 그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암울했던 사사시대 남편들마져 그들을 돌봐주지 못하고 이 땅에 버려진(남겨진) 여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룻기의 주제입니다. 그래서 룻기는 하나님의 손에서 펼쳐지는 연약한 성도들의 아름다운 인생 역전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헷세드는 아무에게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간 사람에겐 철저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안일을 찾아간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헷세드는 순간적인 행복을 포기하고 신앙의 길로 들어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얻기 위해 당당히 댓가를 지불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룻기 2장에 들어오면서 룻은 은혜의 백성이 버린 은혜의 이삭을 줍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짓밟은 언약의 이삭을 줍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당신의 은혜의 이삭 한 줌이면 나는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의 눈빛 한번이면 나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부스러기 한 토막이면 내 인생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으로 갑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분면 우연입니다. 그러나 그 배후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웃기 저자는 외칩니다. "보라, 보아스가 나타났다. 짠, 보아스 나타나다." 룻 앞에 등장한 보아스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축복의 사람이었습니다. 룻의 인생을 역전시키는 은혜의 날개였습니다. 그래서 날개란 말이 2장에서도 나왔고 이제 곧 3장에서도 나올 것입니다. 

보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룻기에는 어두움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 가난과 절망, 고독과 외로움의 사건으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짠! 하고 나타나자 룻기의 이야기는 풍요와 회복의 이야기로 그 흐름이 바뀌어졌습니다. 희망의 햇살이 돋고 있습니다. 

이제 보리 추수와 밀 추수가 끝나고 오늘밤 보아스의 밭에서 마지막 타작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룻은 더 이상 이삭을 주울 수가 없습니다. 보아스의 사랑안에서 지내던 40여일 행복의 순간도 마무리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룻과 보아스의 만남도 어려워집니다. 

마지막 이삭줍기를 마치고 돌아온 며느리 룻에게 나오미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합니다. 지난 며칠동안 시어머니가 무슨 작정 기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룻은 가질 수 있었습니다. 며느리의 손을 꼭 잡은 시어머니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3장 1절 - 드디어 나오미가 말을 합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보리타작을 하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단정한 예복을 입고 타작 파티가 끝날 때까지 몸을 숨겨 있다가 보아스가 야영 침실에 들어가면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리하면 그가 너의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지난 줄거리와 오늘 3장 본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흐름을 잡으셨습니까? 


II. 룻의 프로포즈(3:1-7)

1절을 보십시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서 룻을 복되게 할 안식이 뭘까요? 가정을 이루어 얻는 행복을 말합니다. 시편 23편에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안식(메누하)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안식을 잃어버렸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남편을 얻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신앙적, 환경적 복을 누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가 누구를 염두에 두신 걸까 궁금해 하는 룻에게 보아스 얘기를 합니다. 그는 우리 친족 중 기업을 무를 고엘 중 한 사람이라고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 "보라" "힌네"라고 합니다. 2:4에서 마침이라고 번역했던 바로 그 말입니다. 제가 "짠"이라고 했던 그 말을 여기서는 "보라(behold)"라고 번역했습니다. 잔뜩 호기심이 차 있는 룻에게 "짠"하고 보여주는 인물이 보아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타작을 마치는 날 밤이 늦도록 먹고 마시고 파티를 여는 풍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파티가 늦어지면 성문이 닫혀 성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날밤은 주인도 야영 캠프에서 잠을 자는 겁니다. 물론 일꾼들과는 다른 곳에 별도로 준비가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이날 밤 거사를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을 꼼꼼이 일러줍니다. 먼저 몸을 깨끗이 씻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몸에 기름을 발라 몸을 매끈 매끈하게 하랍니다. 다음엔 결혼할 때나 입는 아름다운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이런 준비는 결혼식 때나 하는 행위입니다. 

이제 어둠이 깔리면 몸을 숨겨 먹고 마시는 파티를 지켜보고 주인 보아스의 침실을 잘 확인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보아스가 누워 잠자는 곳으로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라고 합니다. 히브리 문학에서 "발"은 성생활에 대한 완곡한 표현합니다.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 첫날밤 행사가 있을 수 있겠구나 독자들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러한 나오미 와 룻의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성경 어디에 여성이 결혼을 위해 남성을 이처럼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일이 있더란 말입니까? 과부 시어머니가 과부 며느리에게 부자 영감을 유혹하도록 치밀하게 지시를 합니다. 깊은 밤 혼자 사는 남자의 이불 속으로 단장한 젊은 여자를 밀어 넣다니? 나오미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젊은 여인 룻은 시어머니의 이런 부도덕한 계획을 그대로 따릅니다. 독자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룻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일순간에 무너집니다. 젊은 과부가 야밤에 남자의 이불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다니?

오늘 우리의 문화적인 시선, 도덕적인 잣대로 본문을 보면 이처럼 불순하게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인 관습으로 보면 이건 대단히 정중하고도 겸손한 프로포즈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행위였습니다. "당신이 나를 아내로 삼아 침실의 여주인으로 받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는 정중한 제의였습니다. 멋진 프로포즈였습니다. 

룻은 지금 아무에게서나 이런 프로포즈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아스는 당시 법이 정해주고 성경이 인정해준 남편될 자격이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룻기 어디에서도 나오미와 룻의 이런 계획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성경보다도 더 거룩한 척하지 마십시요. 이런 제안을 받은 보아스도 룻의 행동을 부도덕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사실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다"는 이 말이 성관계를 요구한 것인지 침묵의 프로포즈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룻에 저자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 버립니다. 상상에 맡겨 주었으니까 제가 한번 상상해 봅니다. 제 상상에는 대단히 적극적으로 프로포즈를 한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왜 이렇게 정중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대단히 적극적으로 프로포즈를 한 것일까요? 
첫째는 나이든 보아스의 입장을 세워드린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을 좋아하고 있다는 심증을 여러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내심 좋아하면서도 나이 들고 젊잖은 사람으로서 젊은 여자에게 먼저 프로포즈를 하기가 쑥스러웠을 것입니다. 

둘째 보아스는 기업 무를 친족 중 최우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기업 무러줄 것을 요청해야 한다면 제일 순위자 그 사람을 찾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오미가 아무리 기도를 해 보아도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은 보아스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중 사람 보아스 - 그러니 기업 무를 제일 순위자가 아니라는 현실에서 나오미는 바로 이런 적극적인 프로포즈를 선택한 것입니다. 

보아스의 결정에 모든 것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백지 위임장을 맡겨 주는 것입니다. "당신 뜻에 우리는 모든 것을 맡깁니다. 문제가 있어도 당신이 원했다면 당신이 물어 가십시요. 당신의 뜻이 아니라면 그것으로 우리는 O.K.입니다." 이런 백지위임 프로포즈를 보아스는 기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룻기 저자는 이 프로포즈를 성경 최고의 프로포즈로 해석한 것 같습니다. 음탕한 여인 룻이 아니라 지혜롭고 향기로운 여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고부간에 함께 제안했던 이 프로포즈는 보아스의 신앙과 인격에 대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보아스의 영적, 현실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아스에 대한 무한한 신뢰! 백지위임을 했을 때 멋진 작품을 만들어 줄 것이라는 믿음! 자신을 단정하게 준비하고 그분에게 몸을 던지는 헌신! 바로 이런 자세와 태도가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신랑되신 예수는 우리를 짓밟지 않습니다. 그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께 나를 드리지 못합니다. 나의 시간을 바치지 못합니다. 나의 물질을 맡기지 못합니다. 내 인생계획을 위탁하지 않습니다. 


III.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3:8-9)

타작 파티를 마치고 곡식 단 더미에서 잠을 자던 보아스가 한밤 중 뭔가를 느끼고 화들짝 놀라 일어납니다. 돌이켜 보니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누워 있는게 아닙니까? "당신 누구요?"라고 물었겠지요. 발치에 누웠던 여인이 머리를 만지며 일어나 단장을 합니다. "저는 당신의 여종 룻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당신은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2:13에서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만나 자기를 소개할 때 자신을 "당신을 하녀"라고 합니다. 여기 하녀(쉬프하)는 신분과 존재가 달라 결혼 같은 건 엄두도 못낼 관계입니다. 그러나 본문 3:9에서 말하는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시첩(아마)으로 결혼이 가능한 관계를 말합니다. 자신의 정체의식에서 상당히 당당해졌습니다. 

얼마만큼 당당해졌느냐?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 여종 나를 덮으라고 요청합니다. 여기 옷자락은 2:12에서 나왔던 "날개"라는 말과 원문상 꼭 같은 말 "카나프"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베들레헴에 온 것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온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룻은 보아스에게 이제 당신의 날개를 펴 벗은 나를 덮어 달라고 합니다.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남자들이 프로포즈를 할때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옷자락으로 자신을 덮어달라는 것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결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부를 지도할 때 수련회에 가서 보면 가끔 날씨가 쌀쌀한 밤 여자 청년이 남자 청년의 상의를 걸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당한 수준에 접근이 된 겁니다. 얼마간 지나다 보면 결혼하겠다고 찾아옵니다. 옷을 함부로 줄 것도 아니고 옷을 걸쳐 준다고 함부로 입어도 안됩니다. 

에스겔 16:8에 보면 하나님의 옷자락으로 벗은 이스라엘을 덮어 신부로 맞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달라는 말은 자신을 보호해 달라는 겁니다. 날 책임져 달라는 겁니다. 나의 남편이 되어 나를 따뜻하게 해 달라는 정중한 청혼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기업을 무를 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업 무르기와 결혼을 동시에 요구한 것입니다. 룻은 자기 백성과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찾아 왔습니다. 죽은 남편의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입니다. 룻은 끊어질 위험에 처한 유다 가문의 대통을 이어가는 여인으로 쓰임받고 있습니다. 그 가문을 타고 메시야가 이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룻의 지금 행동은 성적 욕망이나 단순히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업에 대한 거룩한 열망일 뿐입니다. 영적 유산, 하나님의 기업, 구원의 축복을 이어가는 충성되고도 신비한 행동입니다. 

룻기에서 옷자락으로 룻을 덮는 일 그리고 기업을 무르는 고엘 제도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피묻은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어 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잃어버린 천국기업을 무러 주시고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룻의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신비한 연합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IV. 현숙한 여인 룻(3:10-11)

룻의 당당하고 적극적인 프로포즈를 받고 보아스는 "내가 네 말대로 다 행하리라"는 말로 프로포즈를 받아 들입니다. 그리고 여러 말로 룻을 격려합니다. 보아스는 칭찬과 격려 그리고 축복의 천재입니다. 
① 먼저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을 빌어 줍니다. 
② 둘째 볼수록 귀한 헤세드의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나쁜 인상을 받았는데 볼수록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엔 인상이 좋았는데 갈수록 나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인상은 좋지 않았는데 겪어갈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좋은 인상으로 만났는데 볼수록 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겁니다. 

③ 셋째로 걱정스러워하는 룻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합니다. 청을 거절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④ 넷째로 성읍 백성이 함께 인정하는 "현숙한 여자"라고 칭찬합니다. 

우리 말로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면 성경이 가지고 있는 본래 의미와는 다른 뜻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조용하고 얌전한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2:1에 보아스가 "짠" 나타날 때 그를 일컬어 유력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유력한 자 - 깁보르 하일은 능력도 있고 성품도 아름다운 실력자라는 뜻이었습니다. 

여기 현숙한 여자 - 에쉐트 하일은 깁보르 하일(유력한 자)과 같은 말입니다. 
남자는 깁보르 하일이요 여자는 에쉐트 하일일 뿐입니다. 능력있는 여장부라는 뜻입니다. 

깁보르 하일과 에쉐트 하일 - 능력있는 남자와 능력있는 여자의 만남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CF의 카피를 따르면 그때 우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 그것 내 스타일이야!"

솔로몬의 잠언 마지막 주제가 현숙한 여인입니다. 잠언 마지막장 31:10-31에 보면 에쉐트 하일에 관한 설명이 잘 나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10절)

① 에쉐트 하일은 살림을 잘하는 여인입니다.(11절)
② 에쉐트 하일은 가난한 자에게 선을 베푸는 여인입니다.(20절)
③ 에쉐트 하일은 남편으로부터 신뢰를 받으며 그 남편을 존귀하게 높여주는 여인입니다.(11,23절)
④ 에쉐트 하일은 말이 아름다워 그 입에 헤세드가 넘치는 여인입니다.(26절) 
⑤ 에쉐트 하일은 맡겨진 일에 성실한 여인입니다.(27절)
⑥ 에쉐트 하일은 공동체안에서 언제나 칭찬을 받는 여인입니다.(31절)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눈빛을 보니 자신을 가리키며 그런 여인 여기 있다! 하는 눈치입니다. 여러분 모두 깁보르 하일, 에쉐트 하일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룻의 아름다운 프로포즈로 보아스를 만난 사건이 우리 성도들이 신랑 예수를 만난 사건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보아스를 만난 룻의 인생은 가난에서 풍요로 반전됩니다. 버려지고 남겨진 인생에서 선택받은 인생으로 역전됩니다. 이 시간 신랑 예수 앞에 우리의 영혼을 단정하게 준비하여 백지위임 프로포즈를 하시지 않겠습니까?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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