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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니고데모의 신앙 (요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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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신앙 (요 3:1~3)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니고데모!  여러분 많이 들어보신 이름일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할만한 점은 이 니고데모가 요한복음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제외하고 두 부분에 더 나오는데 그 부분부터 먼저 살펴보시죠.  

먼저 7장 45부터 51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모의를 하고 있는 가운데 니고데모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반대의견을 표하다가 오히려 위기에 몰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19장 38절부터 40절입니다.  제자들도 무서워서 다 도망간 그 날, 예수님의 장례를 치른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이야기는 빠짐없이 나오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 마가, 누가가 놓치고 있던 그 사람, 니고데모를 요한은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장례를 치렀다고 등장하지 않고, 그 전에 바리새인들의 모의에도 있었다고 전해주고 있고, 또 그전에 예수님을 처음 찾아온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네 가지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 당장 대답을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사실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하시는 동안 자신에게 계속 질문하셔야 할 것들입니다.  펜이 있으신 분들은 제가 드리려고 하는 질문마나 표시해두시고, 성경을 펴다가 이곳을 보게 될 때마다 다시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1. 밤에...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관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밝히고 있는 시간으로 본다면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펜이 있으신 분들은 이 ‘밤’이라는 단어에 표를 해두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니고데모는 왜 하필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아니면 요한은 굳이 왜 그 때가 밤이었는지를 밝히고 있을까요?  19장에서도 다시금 밤에 찾아왔었던 니고데모라고 설명합니다.  

니고데모를 변호하려는 해석도 많습니다만, 이어지는 니고데모의 말을 통하여 볼 때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예수님께 찾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 거죠.  

니고데모는 오늘날로 치면 옥스포드 교수정도인 반면 예수님은 무슨 시골 떠돌이 부흥사 같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 낮에,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무언가 물어보러 간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대놓고 뭐라 그럴려고 한다면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위엄있게 큰 소리 칠 수도 있겠지만 그럴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밤에 조용히 찾아온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생각해 볼만한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지는 않으시는지요.  회사에서나 동네에서 아니면 친구들 사이에서 예수 믿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애쓰지는 않습니까?  교포 교회의 특성상 한국에서 교회를 한 번도 다니지 않은 분들도 외국에 나와서 처음으로 교회에 발걸음을 하게 됩니다.  

또는 한국에서 드문드문 교회를 다니다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각오로 시작하려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참으로 다양한 신앙경력을 가지고 계신 걸로 압니다.  이제 처음 나오시는 분들부터 시작해서 태어나면서부터 큰 의심없이 지금껏 교회에 출석하고 계신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러 가던 첫 시간을 기억하십니까?  니고데모처럼 ‘밤’에 찾아가시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처음 찾아 간 시간보다 아직도 여전히 예수님을 밤에만 찾으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신앙의 연륜이 쌓여가지만 아직 세상도 만족시키고 하나님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밤에 예수님을 찾고, 밤에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니고데모와 같습니다.  적당히 그들의 시선도 만족시키고, 적당히 교회 생활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백한 것은 처음 예수님을 만나러 나오는 것이 ‘밤’일 수는 있지만, 계속 그런 밤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들어서 종교 이야기는 일종의 금기사항입니다.  참 어려운 세상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유대인들은 누가 메시아인가 궁금해 하고, 헬라인들은 지혜, 진리를 찾고자 애를 썼는데 지금 우리 현대인들은 오직 돈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나마 유교의 영향으로 저희가 어릴 때까지는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명예를 위한다는 사람은 찾기가 힘듭니다.  오직 돈이죠.  진리, 종교는 그야말로 돈 안 되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깜깜한 밤입니까?  

사탄은 참 머리가 좋구요, 우리들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입니다. 인간이 사탄 앞에서 백전백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전에는 거짓 진리로 현혹시켰다고 한다면, 이젠 더 이상 종교, 진리에 대해서는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것들에 대해 고민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철학적인 것, 삶의 근원,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은 현대인들에게 실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일종의 문화생활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국생활이 한국보다 바쁘지 않고 주일 오전에 그다지 갈 곳도 많지 않아서 큰 유혹거리가 없습니다만, 다시금 바쁜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이렇게 예배하러 모이실 분들이 얼마나 되실런지요.  학생들은 지금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혹은 방학이라 조금 여유가 있습니다만, 에세이 제출기한이 다가오고, 월요일에 튜토리얼이 잡혀 있고, 시험기간이 될 때 또 몇몇 학생들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집니다. 

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지입니다. 왜 사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도 마냥 좋아라 하며 살아가게 만들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며, 왜 가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데, 도대체 왜 그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깜깜한 밤입니다. 멀리 보지 못하고 당장 눈 앞에 있는 것들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아직 구원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모르시는지요 또한 그 분이 나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달려 죽으신 것을 모르시는지요.  아니면 그런 것들은 알고는 있지만 낮에 사람들 보는 앞에서 선뜻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기가 민망하십니까?  가족, 친구, 회사동료들의 시선 때문에 예수님께로 나아오기 힘드시다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나러 굳이 밤에 온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밤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3장 18,19절을 봅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은폐시키기 위하여 빛을 멀리하고 어두움을 이용하고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러 올 때에는 어두움에 몸을 숨기면서 왔을 지 몰라도 점차 그는 빛 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아직 어두움에 몸을 숨기고 계신 분들 있으신 줄 압니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 오십시오. 혹은 신앙생활 오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즐기고 계신 분들 있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어두움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빛의 자녀가 아닙니다.  결단하고 나아오십시오.


2. 우리가...

계속해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에게 어떻게 말씀을 드리는지 봅시다.  이번에는 ‘우리’라는 것에 동그라미를 해 보십시오.  사실 국어에서는 이 표현이 익숙합니다.  외아들이면서도 ‘우리 부모님’이라고 하고, 심지어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라고 하는 정도니까요. 일부다처제도, 일처다부제도 아닌데...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라는 것이 그런 의미로 쓰였는지 혹은 ‘나’라는 것을 조금 숨기면서 불특정다수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정말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딴지 건다고 하실 분도 있으시겠지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각자각자가 한 사람의 개인으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장면을 봅시다.  

누가복음 5장 3절부터 11절입니다.  특별히 8절을 보시면, 베드로는 ‘우리’는 죄인이라고 고백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죠.  사실 동료들도 옆에 있었고 니고데모보다는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 더 잘 맞는데,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성격을 보면 남의 일에 관심 많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시면 재미있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베드로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는 당부의 말씀을 다시 하시는 장면입니다.  

21절을 보시면,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옆에 있는 제자, 아마 요한으로 추정되는 그 제자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합니다.  이렇게 남의 일에 참 관심 많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는 ‘우리’라는 단어 뒤에 숨지 않고 ‘나’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십시오.  혹시 ‘우리 신앙’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자신을 파묻고 익명성을 보장 받으려는 것. 자신의 말과 행동을 ‘우리’라는 단어 안에 넣어 보호 받으려는 생각.  나서지 않으면 중간은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혼자 서야 합니다. ‘신 앞에 선 단독자’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물론 그 용어가 원래 가지는 철학적 의미를 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일단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야 합니다.  ‘우리 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구원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지만, 모여 있는 우리가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 앞에 홀로 서셔야 합니다.  

어학원 친구 따라, 옆에 사는 한국 가족분 소개로, 한국 사람들 만나러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편하고, 그런 사람이 없으면 오기도 싫고, 예배 끝나면 혹은 밥만 먹으면 빨리 집에 가고 싶습니다.  얼굴 아는 어떤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우리’라는 울타리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예!  처음 가는 곳, 익숙하지 않은 곳에 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처음 이곳에 ‘우리’로 왔지만 지금 이 시간은 여러분 각자각자가 하나님 앞에 ‘나’로 서야 합니다. 니고데모는 혼자 예수님을 만나러 왔지만 그래도 아직은 ‘우리’라는 단어 속에 자신을 넣어두고 싶어 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라는 단어를 쓸만한 동료들이 옆에 있었고, 남의 일에 신경 쓰기를 좋아하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주여 우리는 죄인이로소이다’ 가 아니라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니고데모도 결국 바리새인들과의 회의 중에서 더 이상 우리가 아닌 자신만의 생각을 피력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라는 단어로 자신을 감싸며 왔지만, 결국은 회의 중에서나 장례를 준비하며 니고데모 한 사람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3. 선생...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선생’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를 해 볼까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순히 선생일 수 없습니다.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과격하게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지 못 하신다면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선생님도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믿는 사람은 미쳤거나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그것만 제외하고는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해서 선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위 공무원 한 명 청문회 하려고 할 때, 보유 재산, 부동산, 위장전입, 병역기피 등을 현미경 들이대듯 검사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허경영씨였던가요? 이상한 주장하고, 사진위조하고 그러다가 사기죄로 고소당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존경 받을 만한 선생님도 못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은 과대망상 환자니까요.

지금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로서 왔다고 합니다.  어중간한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분명 자기 입장에서 극존칭을 하는 상투적인 용어라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무슨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좋은 집안도 아닌 삼십대 청년에게 선생은 무슨 선생입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오늘 베드로가 니고데모에 비교되면서 상대적인 점수를 많이 따고 있는데요, 베드로는 한참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그런 고백을 했다고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장에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 고백한 것을 보시겠습니까?  

1장 49절입니다.  예수님이 표적 한 번 행한 적도 없던 그 때, 나다나엘은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니고데모는 표적을 이미 보았거나 들었고, 비록 밤이지만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도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해 고민 많이 했을 겁니다.  

한국사회에서 만만한 게 선생님, 사장님 인 것처럼 그냥 선생님이라고 했을 수도 있겠죠.  그래도 어쩝니까?  답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과대망상자거나 둘 중에 하나 밖에 없는데요.  중간 회색지대 같은 하나님에게서부터 온 선생님은 아닙니다.  사사나 선지자 정도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는 CEO 예수인가 뭔가 하는 책 제목도 봤습니다.  상담학이 유행하면서 예수님이 상담에 능하셨다, 리더쉽이 유행하면 예수님에게서 이러이러한 리더쉽을 배우자.  기타등등의 시류를 탄 주장 등이 있는데요, 물론 그럴 수 있겠지요.  어느 누구보다 각자각자의 처한 상황을 잘 아시고 그에 맞게 잘 인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만은 예수님은 그런 선생님이나 리더로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러 밤에 오시거나 우리라는 무리에 섞여 오더라도 결국 만나러 온 대상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면 과대망상증 환자 중에 하나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오게 됩니다.  결국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단순히 하나님에게서 온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된 것입니다.


4. 표적을...

이제 마지막으로 본문으로 돌아와서 ‘표적’에다가 동그라미를 해 보십시오.  표적이 무엇입니까?  기적과 표적은 조금 다른 해석이 요구됩니다.  신기한 일을 총칭해서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표적은 그런 것들 중에 의미가 있는 것을 지칭합니다.  영어로는 miracle과 sign 정도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표적 중에는 그리 놀라만한 일이 아닌 것도 있을 수 있겠구요, 기적 중에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놀랄만한 일만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의미 파악은 되신 줄로 알고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표적이 우리 믿음의 대상입니까?  아니면 그 내용입니까?  애석하게도 답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혹시 믿음의 촉매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믿음의 대상도, 내용도 아닙니다.  홍해가 눈앞에서 갈라져도 몇 일이 지나면 먹을 물이 없다고 불평하기 마련입니다.  죽다가 살아나도 몇 일이 지나면 그만입니다.  

‘나도 그런 표적이나 기적을 보면 더 잘 믿을텐데...’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죄송하지만, 꿈 깨십시오.  혹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표적은 결코 믿음의 대상도 아니고, 내용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유명한 예화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저기를 보라고 가르키면 그 대상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고 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머리 아프다면서 시계나 반지 자랑하듯이 왜 손만 바라보십니까?  길 물어 보길래 길 가르쳐 주는데, 길은 안 보고 ‘그 시계 얼마예요’ 라고 하면 참 황당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학원에서 수업 할 때 웬만하면 손에 다른 것이 보이지 않게 합니다.  학생들은 수업에 관심이 없고, 뭐 재미있는게 없을까 하는 중인데 빌미를 제공하면 안 되죠.  그래도 한 두 번은 괜찮습니다.  그런데 계속 손만 보고, 시계만 보고, 손 보여달라고, 시계 보여 달라고만 하면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런데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표적’을 요구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기 싶습니다.  ‘표적의 신앙’에서 깨어나십시오.  표적을 좇던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오히려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표적 너머에 있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 분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대상이요, 내용이 되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동그라미 한 것들을 이제 다시 봅시다.  밤, 우리, 선생, 표적!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밤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우리 가운데 파묻혀 계십니까?  아직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저 선생으로만 여겨지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좀 더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표적을 구하고 계십니까?  그런 모든 것들일랑 헐어버리십시오.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전에 성전정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런 기존의 유대교적, 종교적 관습들을 헐어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가나의 혼인 잔치 표적이 먼저 있는 것도 물을 포도주로 만들 듯이 새로운 창조가 필요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흥이 깨져버린 그 잔치에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창조는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부터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다섯 번 넘게 결혼한 경력이 있는 여자에게까지 모두에게 일어나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또한 5장에 나오는 38년이나 된 환자에게도 6장의 5000명이 넘는 사람들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되는 새로운 창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차츰차츰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밤에 찾아와 우리 뒤에 숨어서 하나님에게서 오신 선생님에게 표적을 운운하던 니고데모.  사실 그 니고데모가 언제, 어떻게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결국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숨기지 못 하는 발언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시체를 장례하기 위해 향품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곳에 올 때 한국 사람들 보고 싶어서, 비빔밥 준다니까 첫 발을 내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몇 날이고, 몇 년이고 계속 밤에, 우리에 둘러 싸여 예수라는 선생, 2000년전에 왔다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표적에 눈이 가려 표적이 가르키는 대상을 놓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이 네 가지 질문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더라도 가끔씩은 자가진단하셔야 할 질문입니다.  

사람들 눈을 하나님 보다 두렵게 여기셔서는 안 됩니다.  옆에 있는 분과 묶여서 천국 가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나라라는 신앙의 기본을 잃고, 선생의 신앙을 가진다면 기독교는 무서운 부작용을 가져 옵니다.  한국에서는 개독교라는 소리를 이미 듣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자성해볼 때 입니다. 

표적, 기적 등의 일들이 내 삶에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복만을, 복만을 바라고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런 모든 비신앙적인 행위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표적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표적이 가르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서 그 분을 만나고, 그 분을 체험하고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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