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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 (마 8: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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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 (마 8:14~17)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이름이나 출신을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한 문둥병자, 한 백부장의 하인, 한 중풍병자,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자, 혈루병을 앓는 여인, 어떤 소경이라 불릴 뿐입니다. 

저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들 모두는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름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눈먼 소경이 바로 우리였고, 앉은뱅이처럼 무기력했던 자들이 바로 우리였고, 영혼의 문둥병을 앓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주님은 단지 그들의 고통을 제거해 주는 데만 열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병을 고치기만 하면 되었지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보상을 받으려 하거나 무슨 업적을 자랑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치유 사역에 방해가 될까 기적을 행하시고도 잠잠할 것을 명하시거나 은밀히 치유를 행하셨습니다.


열병으로 앓아누운 베드로의 장모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사건은 두 절로 짧지만 치유를 받은 자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할 것입니다. 그는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복음서에 기록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전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열병은 아마 장티푸스나 콜레라일 것입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병은 단순한 감기 정도의 병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장티푸스를 앓아 본 적이 있습니다. 장티푸스는 4주만에 그 생명이 결정됩니다.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펄펄 끊다가 4주를 견디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제가 처음 장티푸스를 앓을 때 그냥 감기인줄 알았습니다. 자취할 때였는데 감기약만 2주 동안 먹다가 도무지 견딜 수 없어 병원에 가니 장티푸스라 하였습니다. 죽을 뻔했습니다. 의사 분에게 혼 많이 났습니다. 제가 당시 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그때 제 전공이 미생물학과였습니다. 미생물학과가 장티푸스도 모르냐고 놀림을 받았습니다.

열병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병이지만 주님은 이보다 더한 병들도 고치셨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쳤다는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치유의 당사자가 베드로의 장모였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베드로는 참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결혼 풍습을 보면 여자가 남자 집에 시집 와서 사는 것이고 남자의 부모를 모시는 것이 가부장제도 하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처의 어머니인 장모를 모시고 있습니다. 장모가 단지 놀러왔다 병에 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에서 우리 신앙인들의 가족 사랑이나 부모 공경이 어떠해야 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마10:35-37)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가족관계를 파괴하라는 의도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가족의 핍박이 심할 것이며 이때 굴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굳건히 가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주님은 부모 공경에 대해서 말씀하셨고(마15:4, 19:19), 디모데전서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가 추석이었습니다. 가족들간에 화목한 만남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단지 명절 때만 우리가 부모님께 효도하고 가족 간에 우애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생명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땅히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남편의 부모뿐만 아니라 아내의 부모도 소중합니다. 양가의 부모에 대해서 공경하는 것은 신앙인들의 마땅한 바입니다. 가족은 피와 인연으로 맺어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서로 돌보고 우애하는 것은 우리를 한 혈육으로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신앙인들이 교회 일에는 열심 하면서도 가족일은 등한시 하여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심으로 가족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 장모의 열병의 정체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베드로 장모의 병이 단지 육신의 병만이었을까요? 그녀가 마음의 병에 걸려 누워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화병이라 부릅니다. 열불 나는 병입니다.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막1:29)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는 서로 형제입니다. 그리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이웃에 사는 형제들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자기 딸을 베드로에게 시집 보내며 행복하게 살 것을 소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부자는 아니지만 배 한 척을 소유하고 그런대로 딸을 행복하게 해주며 살았습니다. 더구나 장모인 자기에게도 매우 친절한 사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라는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자기 사위가 예수에게 홀랑 미쳐 배를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더 이상 고기는 잡아오지 않고 영적인 양식을 듣는다며 산으로, 바다로 나가며 도통 집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그 형 안드레와 그 이웃집 두 총각들까지 미쳐서 야단입니다. 그러니 이런 꼴을 보고 있던 장모가 속에서 불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열불이 난 것이지요. 저도 사위인데 제 장모님을 볼 때마다 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귀한 딸을 데리고 와서 엄청 고생시키고 있으니까요?

베드로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는 것은 좋은데 자기 아내나 가족들에게는 미안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과 가족을 섬기는 것은 이처럼 서로 조화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면 가족이 어려울 때가 있고, 가족을 위해 살면 주님의 길을 가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불교의 스님이나 천주교의 신부님들보다 기독교의 목회자의 길이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또 구도자의 길을 걸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 목회자들의 사치나 물질에 대한 탐욕이 문제가 되는데 이는 구도자로서의 실존과 가장으로서의 실존을 둘 다 감당하려다 빚어진 비극이라 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 신앙 선배들은 가장으로서의 길은 포기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복음전도자의 한 길로만 갔습니다. 그들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하늘나라” 하며 천국의 낙원을 생각하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목회자들은 세상에서도 잘 되고 죽어서도 잘되려고 하니 오히려 세상에서나 하늘나라에서나 비난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버리라는 뜻을 아닙니다. 가장의 역할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의 제자로서 부름 받은 이상 가장 중요한 본분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구도자의 삶입니다. 자기 가정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은 필요하나 필요 이상의 물질은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의 길을 쫒는 제자의 마땅한 모습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삶은 제자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는 귀한 모범입니다. 이처럼 가정을 버리며 나갔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변변히 대접도 못하고 장모님은 몸져누워 있습니다. 베드로는 가족들에게나 예수님에게 모두 죄송스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베드로의 이 곤혹스런 마음을 아셨는지 아무 말씀도 없이 베드로의 장모에게 다가가 그 손을 만지셨습니다. 그 순간 열병이 떠나고 베드로의 장모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나아갈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그것이 먹을 것이든 그것이 입을 것이든 그것이 건강이든 그것이 어떤 생활의 필요이든 채워주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필요를 채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를 이제 주님의 사역자로 만듭니다. 15절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수종들다’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 입니다.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봉사 사역을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에 열심 하면 우리 가정에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던 사람을 바꾸어 오히려 주님의 사역자로 만들어주십니다. 그를 반대자가 아니라 변하여 열렬한 지지자가 되게 만드십니다. 장모의 열병이 떠나고 그가 봉사의 일을 하게 되자 베드로의 집은 이제 교회가 되었습니다. 회당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반대하여 주님의 사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베드로의 집이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16절 보십시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그의 손을 만지시니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실 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8:3)하시니 문둥병자가 깨끗해졌습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8:13) 하시니 백부장의 하인의 중풍병이 그 즉시로 나았습니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9:6) 하시니 침상에 누워있던 중풍병자가 침상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말씀 한 마디로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 주님은 말씀이 아니라 직접 손을 만지심으로 병자를 고치실 때가 있습니다. 앞서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마8:3)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실 때도 “그의 손을 만지시니”(15)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의 손을 만지셨다, 영어로는 touch 했다고 표현하는데 단지 만지셨을 뿐입니다. 

주님의 손은 곧 능력의 통로를 의미합니다. 손을 통해서 능력이 나갑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손이라는 것이 단지 능력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손으로 베드로의 장모의 거칠고 상처난 손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오랜 세월 고생으로 딱딱해진 손을 어루만지신 것입니다. 그때 그 여인의 열병이 떠났습니다.

바로 이 순간 예수님은 그의 육신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의 병까지도 고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질병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런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만지시는 순간 우리의 상처가 눈 녹듯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 복음 성가 중에 “그는 나를 만졌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는 나를 만졌네 내 영혼을 나는 그를 느꼈네 그 숨결을” 

저는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낮은 데로 임하소서”란 영화가 생각납니다. 주인공 안 요한 씨가 30대에 실명을 하게 됩니다. 이에 절망하여 여러 번 자살 시도 끝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안 요한 씨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새로운 삶을 찾아 서울역을 향하여 갑니다. 그가 소경이 되어 더듬더듬 가는데 이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그 얼굴이 크로즈업 되어 나타나는데 그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만질 때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잘 터치하십시오. 말로만 말고 힘껏 안아주세요. 자녀들이나 부부나 연인끼리는 더욱 그리하십시오. 서로 터치할 때 사랑이 전달됩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아이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마음으로 터치하는 부모가 없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의 마음을 냉혹하게 만듭니다. 2차 대전 당시의 한 예입니다. 이탈리아의 한 작은 도시에 큰 강을 사이에 두고 두 고아원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시설이 좋고 영양가 있는 음식도 풍부하게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강 건너편에 있던 다른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이 미치지 못해 시설도 형편없고 기본적인 음식조차 제대로 제공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시설이 좋고 좋은 음식을 풍부하게 제공한 고아원의 유아 사망률이 강 건너 열악한 환경의 고아원보다 훨씬 더 높았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여러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전쟁이 끝나자 몇몇 학자들이 체계적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터치의 문제였습니다. 전쟁 중에 아이를 잃고 정신이 나가버린 한 엄마가 있었는데, 이 엄마가 어느 날 강 건너편에 있는 바로 이 고아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 살면서 그곳에 있는 아기들을 자기 아이로 착각해 날마다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었던 것입니다. 유아사망율이 낮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충분한 영양은 제공 받았지만 다른 사람의 터치를 받지 못했던 아이들보다, 비록 충분한 영양은 공급받지 못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애정 어린 터치를 충분히 받았던 아이들은 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티파니 필드라는 분이 쓴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선물 Touch』라는 책 중에 나온 것입니다. 티파니 필드는 이 사랑의 터치의 중요성을 알고 전세계적으로 돌아다니며 “사랑의 터치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 지난 번에 우리 교회에서 치유사역을 하셨던 토피 선교사님이 생각납니다. 이분은 얼마나 힘 있게 허깅을 하고, 또 얼마나 자주 허깅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지금도 토피 선교사님의 툭 불거진 배가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문화는 터치를 잘 하지 않습니다. 정은 많은데 이 정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도 충분히 고치실 수 있는데 손을 만지심으로써 그의 마음의 상처마저도 치유하셨습니다. 이 터치의 은혜를 경험했던 베드로 사도는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벧전5:14)고 베드로전서에서 인사하고 있습니다. 


병을 짊어지신 예수

이런 예수님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16절에 저물 때 사람들이 몰려온 이유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일의 범주에는 병자를 고치는 치료행위도 들어갑니다. 거룩하고 복된 날로 축복받은 안식일이 오히려 사람들을 얽매는 날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두 팔을 벌리고 언제든지 사람들을 치유하시려 하였지만 율법에 매인 사람들은 바리새인관 서기관들의 눈치가 보여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에 주님이 계신 베드로의 집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주님은 많은 귀신들린 자들을 말씀으로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렸다는 것은 실제 영적인 세력에 의해서 장악 당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귀신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눈에 뜨이지 않는 이유는 이들을 모두 정신병원이나 수용시설에서 감금하거나 보호해두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도 이런 심한 정신병자가 약 50만 명에 이를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외 우울증이나 가벼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 또한 많을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들을 모든 억압과 부자유함에서 자유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마음에 병든 자와 육신의 병든 자 모두를 치유하러 오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미래의 약속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지금 벌어지는 현재였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요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 영혼이 잘되는 복음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 범사가 잘되는 복음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우리 육신이 강건하게 되는 복음입니다. 이 은혜가 온전히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병들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마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 주님이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은 떠 맡으셨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행복한 교환’이라 불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시고 대신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강건함을 주십니다. 

이사야서에서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채찍에 맞아서 깊게 패인 상처는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연약함들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맞은 채찍의 상처를 대신 가져가시고 우리에게는 자신의 깨끗한 몸과 마음을 대신 주십니다.

사실 이는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프면 자기가 대신 그 아픔을 당하고 자기 자녀는 강건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부모들처럼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해서 더 아파하십니다. 마태는 이사야를 인용하며 예수님께서 우리 병을 짋어지셨다고 말씀합니다. 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때 나 홀로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간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힘들 때 “주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고 원망하지만 주님은 바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를 업고 함께 힘든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다. 

여러분 혹시 어렸을 때 갑자기 아팠던 적이 없습니까? 그때는 차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그럴 때면 어머니가 우리를 등에 업고 병원을 향해 달렸습니다. 저도 한 번 갑자기 식중독을 앓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방안을 데굴데굴 굴렀는데 그때 저희 어머니가 저를 등에 들쳐 업고 병원을 향해서 뛰었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 주님이 마치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를 업고 함께 뛰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서에서 말씀한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도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에서 확인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신음하던 주님의 고통은 바로 오늘 이 순간 내가 당하는 고통을 미리 내다보며 아파하시던 고통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어머니와 같으신 예수님 이 사랑으로 위로 받고 새 힘을 내 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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