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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히 11:13~16, 벧전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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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히 11:13~16, 벧전 1:11~12) 


저희 교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가까이 있는 중국동포교회를 방문합니다. 수요예배에 참석을 해서 찬양을 인도해 주고, 간증도 하고, 또 함께 예배를 나눕니다. 때로 음식을 준비할 때도 있고, 옷가지를 가지고 가서 나눠드릴 때도 있습니다. 대게 그 예배에 참석하는 분들은 조선족들이 많고, 또 중국에서 온 한족들도 있습니다. 또 때로는 스리랑카, 네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외국에서 오신 분들도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곤 합니다. 대게 그분들에게 느끼는 것은 그분들이 매우 피곤하고 고단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익숙한 자기의 보금자리를 떠나서 낯선 곳에 와서 생활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우리들의 찬양과 위로를 매우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여깁니다. 우리는 그분들을 가리켜서 외국인, 혹은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국동포교회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병원 한 귀퉁이에 보면 그분들의 숙소가 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양쪽으로 짐이 주욱 놓여져 있습니다. 와서 일은 하고 있지만 아직 집을 구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그곳에 와서 기거하는데 참 복잡합니다. 들어가면 냄새도 나고, 작은 방에 100명, 200명씩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참 보통일이 아닙니다. 나그네 생활은 그처럼 고달프고 참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이들의 삶을 나그네 삶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 스스로 자신도 자신의 삶을 “난 나그네다. 난 우거하는 자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3장 4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이 햇족속에게 가서 거했는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 사라를 매장할 막벨라굴을 얻는데 그들에게 요청한 내용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다. 우거하는 자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47장 9절 말씀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요셉을 따라 애굽에 내려간 야곱도 자신이 나그네 삶을 살았다고, 130년의 세월을 지내는데 길진 않지만 매우 험악한 삶이었다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2대왕인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역대상 29장 15절 말씀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 찾아보니까 ‘자기고장을 떠나 낯선 곳에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 혹은 임시거주자’ 이런 사람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자기 나라에, 자기 고향에 사는 사람은 나그네라는 말을 안 붙입니다. 낯선 곳에 가서 잠시 머무는 사람들, 또 임시거주자들을 우리는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오늘 베드로 기자는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가 바로 나그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베드로사도가 초대교인들을 향해 하신 말씀이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들에게도 너희도 바로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도 인생을 나그네와 같다고 말합니다. 제가 중학교때인가 많이 암송했던 시가 박목월시인의 ‘나그네’라는 시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아주 서정적이고 고향의 향취가 물씬 풍겨오는 그런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유행가 중에도 또 좋은 유행가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최의준씨라는 분이 예전에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하숙생’이라는 노래입니다. 한번 가사를 들어보세요.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2절은 좀 더 은혜가 됩니다. 2절 첫 구절입니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그렇습니다. ‘공수레 공수거’ 우리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세상 유행가도 그렇게 인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외국인이며 나그네임에는 틀림없지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나그네와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말하는 나그네는 정처없이 이곳 저곳을 떠다니는 구름따라 바람따라 다시는 나그네가 아니라 목적지가 있는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가야할 곳이 있고, 돌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향이 2개인 사람들입니다. 혹은 두 나라 시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16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본향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앞에 나온 본향은 아브라함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출신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그를 부르셔서 그는 육신의 고향을 떠나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육신적인 고향을 의미합니다. 제 고향은 강원도 평창입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서도 고향을 찾아서 멀리 전라도, 경상도로 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부모님이 여기 계시기 때문에, 또 신길동이 고향이기 때문에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고향이 있습니다. 16절에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새번역에는 더 좋은 본향이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더 좋은 본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천국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향이 2개인 사람, 고향이 2개인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바로 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면서 이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갈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 난 사람은 땅에 묻히지만, 하늘에서 온 사람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품, 천국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바로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좋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에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는 첫째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오늘도 이 나그네의 길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갈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 순종해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어떤 믿음을 가리킬까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는데, “내가 네게 복을 부어주겠다. 그래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그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번성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붙들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난 나그네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자신의 의지나 어떤 자신의 경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이 나그네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아.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함은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으로 영접할 거야! 오늘 우리들을 위해서 아름다운 처소가 천국에 예비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천국을 보신 분 있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천국에 다녀오신 분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으니까. 인간의 말은 어제 오늘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늘 변함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말씀하신 바를 손해가 될지라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에 보니까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주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믿는 도리에 소망을 붙들고 앞을 향해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떠나온 본향을 향해서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더 나은 본향을 향해서 나아간다면 우리는 절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절제란 무엇입니까? 자기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욕망을 자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그네로 살 때에, 외국인으로 살 때에, 임시로 거주할 때에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자기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올무에 빠질 수밖에 없고,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면 늘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디 가서 장사를 해도 꼭 이 2가지 장사를 먼저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보석장사입니다. 보석은 부피가 적습니다. 그래서 자기 본향으로 돌아갈 때 얼른 가져갈 수 있다고 합니다. 또 그들은 채소장사를 주로 한다고 합니다. 채소는 가져갈 것이 없습니다. 다 썩기 때문에, 버리고 가면 된다고 합니다. 미련이 없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더 이상 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늘 그들이 갈 새로운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아주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종종 대하던 안재환이라는 탈랜트가 사채 40억을 얻어 쓰고 그 빚을 못 갚아서 협박을 받고 괴로워하다가 비참한 자살을 감행한 것을 뉴스에서 본 일이 있습니다. 참 안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한 탈랜트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을까? 조금만 더 참으면 되었을텐데, 아니 왜 욕심을 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 정도 삶에 만족하면 되지.’ 성경에 보니 뭐라고 합니까? 디모데전서 6장 8절에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탈랜트가 되가지고 굶어 죽겠습니까? 먹고 입으면 되었지. 또 부인 정선희씨가 잘 벌면 같이 살면 되지. 그렇게 과도하게 사업을 벌여서 실패를 거듭해 사채를 끌어들여 40억이라는 빚을 지고 해결 못하니까 결국 죽음으로 마칩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우리 삶은 이것이 아닙니다.

사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죠? 한번 신문보도를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사채를 급해서 천 만원을 꿨다고 합니다. 그런데 7개월 동안 이자를 하나도 못 갚는 경우 천만 원을 꾸면 한 달 이자가 200만원씩 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7개월 동안 한 번도 못 갚으면 그 이자가 복리로 계산되어 7개월 만에 5천만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니 옆에 분들에게 약속해야 합니다. “우리 절대 사채는 쓰지 맙시다!” 굶더라도 사채는 쓰지 맙시다. 정 먹을 것이 없으면 교회에 오십시오. 여러분이 굶지 않게 쌀은 교회가 대 드리겠습니다. 교회가 못 해 드리면 제가 드리겠습니다. 사채는 쓰지 마십시오. 무서운 것입니다. 마치 사채업자를 보면 저승사자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붙들려 갔을까요? 너무 무섭습니다. 우리 안재환씨가 조금만 절제했더라면, 좀 성공하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돈 좀 적게 벌면 어떻습니까. ‘조금만 절제했더라면 그렇게 비참한 일은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절제하는 사람만이 신앙의 승리자가 될 수 있고, 영원한 본향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나왔던 책 중에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교수가 실험을 하는데 4살짜리 아이들 600명을 전국에서 모았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교실로 아이들을 한명씩 들어오게 합니다. 4살짜리 애들이 절제가 없죠. 마시멜로라는 것은 미국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 이름입니다. 그 마시멜로 하나씩을 병에다 집어넣어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약속을 합니다. “너가 15분 동안 먹고 싶은 걸 참고 있으면 15분이 지나면 마시멜로 하나를 더 줄게” 아이들이 혼자서 참는 것입니다. 그 15분이 얼마나 긴지 모릅니다. 혼자 있어보십시오. 얼마나 지루합니까? 사탕이 먹고 싶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못 참고 사탕을 꼴깍 먹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사탕을 먹고 싶은 욕망을 참습니다. 나중에 못 견디다가 사탕을 집습니다. 냄새 맡아보고 자세히 살펴보고 혀로 좀 핥아보고, ‘아니야! 먹으면 안되지. 15분만 참으면 2개가 생기는데’ 그래서 다시 병 속에 집어넣습니다. 이 실험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10년 후에 그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그 600명이 어떻게 중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15분을 못 참고 먹었던 아이들은 별로 그렇게 기대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5분 동안을 참았던 아이들은 아주 공부도 열심히 잘 하고, 친구관계도 좋고, 삶이 성실했습니다. 그걸 하나 놓고 글을 쓴 분은 이런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 15분 동안 마시멜로우를 참았던 아이들이 성공할 확률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먹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도 범죄할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보디발의 부인을 내칠 수 있었습니다. 그 마시멜로우를 참아낸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는 성공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니까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너무 지나친 욕심은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한 왕이 자기가 좋아하는 이발사가 있어서 그 이발사가 늘 왕의 머리를 깍게 합니다. 그 이발사는 왕의 머리를 깍으면서 늘 얼굴에 웃음이 있고 행복합니다. 콧노래를 부릅니다. “자네는 도데체 뭐가 그리 행복한가?” 이발사가 말합니다. “제가 임금님의 머리를 깍는데 왜 안 행복합니까? 제가 먹을 게 있고, 입을 게 있는데 전 이걸로 족합니다.” 너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임금님이 어느날 이 이발사를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명절이 되어서 이발사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은전 99개를 선물로 줬습니다. 근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발사는 이 귀한 선물을 받고 은전을 세어보았더니 99개였습니다. 한 개만 더 있으면, 100개를 채우면 너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이발사는 100개를 채우기 위해서 악을 쓰기 시작합니다. 구두쇠가 되고, 수전노가 되고, 악착같이 벌기 시작합니다. 얼굴에 웃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결국 그는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이 99%의 함정을 여러분도 조심하십시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 결국은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99%면 어떻고, 90%이면 어떻고, 80%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 자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행복한 사람이요. 그런 사람이 바로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신령한 성도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은 그렇습니다. 저도 1년을 되돌아보면 작년 9월말에 추석 지나자마자 교회에서 허락해 주셔서 안식년 휴가를 3개월 다녀왔었습니다. 가기 전에는 ‘3개월 동안 부부가 살려면 뭐가 필요할까?’ 하와이 코나 열방대학에 가서 생활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집을 쌌습니다. 짐을 싸다보니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모기가 많다고 해서 모기약을 사가야 하는데 누구한테 부탁을 했습니다. 모기약을 사달라고, 전기 꼽으면 되는 홈매트인가. 그런데 가서 풀어보니까 전기 꼽는 기구는 없고, 약만 가득 사다 놨습니다. 그래서 하나도 못 쓰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 왔습니다. 그렇게 가서 생활을 했습니다. 방이 원룸인데 그 안에 침대가 있고, 화장실이 있고, 싱크대가 있고, 두 부부가 살기에 딱 좋습니다.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먹는 건 식당에서 먹고 하니까.

그런데 하나 좋은데 그 옆에 부띠끄라고 조그만 상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무료였습니다. 거기 생활하다가 가는 분들이 짐이 많으니까 필요없는 것들을 물건을 다 두고 갑니다. 옷, 신발, 커피 포트 등등 거기 가면 옷을 다 세탁을 해 가지고 다려서 진열해 놓았습니다. 전기기구부터 책까지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거기 오는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필요한 것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생활하다가 자기가 갈 때는 또 두고 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이게 인생이구나, 이게 나그네 삶이구나’ 느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결국은 다 두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저희 집사람은 시간 날 때마다 부띠끄 가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어디 입을 옷 없나’ 나중에 파티를 하는데 어떤 여자 집사님은 거기 가서 근사한 드레스를 입고 왔습니다.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더니 부띠끄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남이 입다가 두고 간 것을 그냥 입어도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인생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살다가 그냥 두고 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그네의 삶입니다. 있는 동안 남에게 나눠주며 잘 쓰다가 갈 때는 두고 가는 것이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부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3남매가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답니다. 어머니가 “내가 한가지 소원이 있다” “어머니 소원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들어드리겠습니다.” “내가 평생 고생하느라고 다이아 반지 한번 못 끼워봤다. 다이아 반지 한번 손가락에 끼고 죽으면 한이 없겠다.” 어머니 소원이니까 이걸 어떻게 안 드릴 수가 있습니까? 빛을 내서 사드릴까 하다가 그러지 말고 앞집 아줌마가 몇 일전에 다이아반지를 샀는데 그걸 좀 빌려오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번만 꼈다가 가져다 드린다고 하고 빌려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손가락에 껴드렸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더니 물 한잔만 달라고 하셨습니다. ‘왜 어머니가 갑자기 물을 달라고 하실까?’하고 물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다이아반지를 쏙 빼서 입에 넣고는 물을 마시더니 삼켜 버리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가지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삼켜 버렸으니 이걸 어떡하나? 3남매는 어머니 배를 자를 수도 없고 큰일 났습니다. 고민 고민하는 중에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배설하셨는데 몇일만에 나왔습니다. 세상에! 부식이 되어서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가져다 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3남매가 어렵게 돈을 모아서 다이아반지를 사주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가져 갈 수 없습니다. 다 두고 갈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던, 아무리 좋은 차를 타던, 아무리 좋은 보석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 두고 갈 것입니다. 욕심내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에서 절제하며 사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은 선한 행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베드로전서 2장 1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인들은 때론 비난도 받고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선한 행실의 삶을 살아서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요즘 이 시대 참 기독교인들과 불교도들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정부과 불교와도 갈등이 있고, 또 대통령이 장로이다 보니까 그런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부는 모든 종교에 공평해야 하겠습니다. 또 기독교인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서 정말 선한 행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어느 종교인들보다도 더 사랑하고 더 관용하고 더 나누고 더 동정하고 더 자비를 베푸는 그런 삶을 살 때에 사람들은 내가 교회는 안 나가지만 정말 기독교인들을 우러러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선한 행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 이하에 보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또 우리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추석 명절이 되면 가족이 많이 모입니다. 의견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작은 일에 삐져가지고 말도 안 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용납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고향을 바라보며 살지만 우리는 더 좋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자기 고향 선산 앞에 묻히는 것을 기대하지만, 우리는 더 좋은 하나님의 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안인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는 다 어떤 시한, 기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제가 언제 부름받아 갈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함께 생활하는데, 의견이 다를 때도 있고 갈등 할 때도 있습니다. 자꾸 다투는 부부를 보면 TV체널을 가지고도 싸웁니다. 남편은 송일국이 나오는 ‘바람의 나라’를 보자. 부인은 아닙니다. 요즘에 나오는 ‘베토벤바이러스’가 더 재밌다고 막 그걸 보자고 합니다. 이러다가 리모컨을 내치고, “니나 보라고” 싸우고 이러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싸우던 부부가 어느날 남편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다녀왔는데 검사를 받고 결과를 보니까 중병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이 되었습니다. 6개월 밖에 못 삽니다. 이제 TV체널 가지고 싸울까요 안 싸울까요? 서로 양보합니다. 

남편은 “여보! 내가 6개월 살 사람이, 당신이나 많이 봐요.” 아내가 “아니예요. 나는 많이 보지만 당신은 곧 갈 사람이니까 당신이 보고 싶은 것 보세요.” 하고 양보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입니다. 앞으로 10년, 20년, 30년 생각하지만 여기 영원히 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 40년 후면 여기 계신 절반 이상이 하나님의 품에 가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100년 이상 지나면 아마 여기 계신 분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떠나가는 것입니다. 다 기한이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욕심 부리지 마십시오. 너무 고집피우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하나님 앞에 맡기고 서로 양보하며 화해하며 화합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떤 부인이 너무 살림이 힘들었습니다. 남편도 너무 꼴 보기 싫고, 자식새끼들도 너무 싫고, 빨리 죽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좀 빨리 데려가 주세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알았다. 너를 곧 데려가겠는데 한 달 후에 데려가겠다.” “데려가시려면 바로 데려가시지 한 달 후는 뭡니까?” “한 달 동안 시간을 줄 테니 마지막 떠나기 전에 정리할 것을 정리해라. 너 죽은 다음에 집안 꼴이 그러면 되겠느냐? 집안도 좀 청소해 놓고, 빨래도 좀 해 놓고 잘 정리해 놓고 그리고 한달 후에 오거라. 그리고 이왕이면 떠나면서 떠나는 마당에 남편에게도 좀 잘 해주고, 자식들에게도 좀 사랑을 베풀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이제 한달 남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한달 동안 열심히 남편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아이들도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간식도 만들어 주고, 양말도 제때 제때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아침마다 양말이 없다고 신경질내며 학교가던 아빠와 아이들이 달라졌습니다. 아빠와 아이들이 집에 들어오면 깨끗했습니다. 신발장부터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더러운 신발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고, 화장실에 가도 그렇게 좋고, 침실에 가도 너무 좋고, 기분이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음식도 너무 좋습니다. 너무 신납니다. 화낼 일이 없습니다. ‘우리 엄마 너무 애쓴다. 우리 엄마 너무 최고다. 너무 좋다.’ 칭찬을 합니다. 서로 도와주려고 애 쓰는 것입니다. 집안 분위기가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는 “니 탓이다.”했는데 이제는 다 자기 탓이고 서로 도와주려고 애쓰니까 가정이 너무 화목해 졌습니다.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한 달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딸아! 내가 이제 너를 데려가야 되겠다.” “하나님! 벌써 한 달이 지났어요? 나 가기 싫은데, 여기가 너무 좋은데, 나 좀 더 살다 가면 안 될까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헤어질 것입니다. 한분이 먼저 가실 것입니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이 뭐가 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더 아름다운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 나라는 오늘도 존재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고백교회 목사님인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치에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동료들과 어느 정도 있다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위해서 부름을 받습니다. 그의 이름을 부를 때 그가 무거운 문을 나섭니다. 그 때 죄수 동료들은 ‘이제 본회퍼가 마지막이구나’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님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들면서 말합니다. “동지들이여 내일 아침에 만납시다. 우리 더 좋은 고향에서 꼭 만납시다.” 이렇게 인사를 하고 유유히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아름다운 주님의 품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이 땅에서 두 나라의 시민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합니다. 믿음으로 사십시다. 절제하며 사십시다.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설 때에 잘했다 칭찬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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