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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헷세드 (룻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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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세드 (룻 1:1~6)

룻기 : 서론

I. 서론

세종때 이씨 왕조의 창업 이념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용비어천가"가 있습니다. 이 글은 태조 이성계 이전 조상들과 앞선 왕들의 행적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대 중동에서도 한 왕조를 창업한 왕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때 그 가문에 얽힌 일화를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하곤 했습니다. 그런점에서 룻기는 세종의 용비어천가처럼 전혀 의도된 조작이나 미화가 없지만 "다윗 왕조의 용비어천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룻기는 언제쯤 기록이 되었을까요? 

룻기는 마지막에 기록된 족보에 보면 솔로몬의 이름은 아직 없고 "이세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룻기가 다윗 왕때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글이 다윗 왕가의 용비어천가라면 적어도 흉년을 피해 도망갔다가 저주 받아 죽은 조상 얘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룻기는 한 가문의 이야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신약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룻기의 족보는 신약 마태복음 족보로 연결되는 고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룻기를 읽을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어떤 역사를 행하셨는지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랑 - 구속사적 관점을 놓치고 룻기를 읽으면 독자들은 룻기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혼동을 겪게 됩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도피하는 과정에서는 엘리멜렉이라는 가장이 주인공으로 등장됩니다. 

모압 땅에서 엘리멜렉은 죽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는 그의 아내 나오미가 주인공 역할을 합니다. 룻기라고 책의 이름이 되어 있으니 당연히 룻이 주인공이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후반부에서는 룻의 남편 보아스가 주인공이 되어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가 됩니다. 

여기서 룻기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룻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룻기를 읽을땐 사건 배후에 숨어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룻기 신학의 주제는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룻기에서는 1:8, 2:20, 3:10 세 번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헤세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이념입니다. 헤세드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자비, 선대, 은혜, 인애라는 뜻으로 본문에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보호, 나와의 따뜻한 교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고난당한 한 가정을 향한 헤세드가 오늘 나에게도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헤세드가 없이 어찌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가?를 룻기는 말하고 있습니다. 

룻기의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사사기에서 국가를 상대로 역사 하시던 하나님이 룻기에 와서는 한 가정,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운행하시지만 공중에 나는 참새 한 마리 내 머리털 하나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의 부르짖는 회개에도 귀를 기울이시지만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룻기를 일컬어 성서학자들은 인류가 낳은 최고의 단편 문학 혹은 사사기 그리고 사무엘서라는 딱딱한 조개껍질 사이에 끼어 있는 "영롱한 진주"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룻기는 히브리인들에게 참 사랑받는 책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추수를 다 끝내고 가정에서 가족이 모여 앉아 룻기를 읽곤 합니다. 유대인들이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때 읽는 메기로스(megilloth)라 불리는 두루마리 책이 있습니다. 거기엔 아가,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 그리고 룻기 등 다섯 권의 책이 들어 있습니다. 

룻기는 4장 85절로 구성된 짧은 책입니다. 85절 중 절반이 넘는 45절이 대화체로 되어 있어 룻기를 읽을 때 사람들은 배역을 정해 입체적으로 읽곤 합니다. 

룻기에 기록된 이야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일어난 일이라고 본문 1:1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2사사 중 어느 사사가 치리하던 때 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 싸이클이 있습니다. "범죄 → 징계 → 회개 → 평안"입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모진 가뭄과 흉년의 때에 일어난 것을 보면 사사기 싸이클 중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상황인 것 같습니다. 룻기는 흉년만나 큰 불행을 겪고 있는 한 가정을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시는가 하는 얘기입니다. 


II. 흉년을 만났을 때

지금부터 우리가 듣게 되는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얘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룻기가 기록될 무렵에도 벌써 옛날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옛날 얘기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화롯불가에서 어릴적 할머니에게 듣던 옛날 얘기는 무조건 재미가 있었습니다. 옛날이라고 하면 무조건 좋았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 옛날이여 아름다운 그 시절 다시 돌아올 수 없나.
3000년도 더 된 이 옛날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게 생긴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먹을 것을 찾아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은 시어머니와 두 젊은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그 땅이 어떤 땅입니까?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를 것이라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가나안 땅입니다. 약속의 땅에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만사형통이어야지 왜 고통이 오느냐고 항거합니다. 

약속의 땅에 왜 고통이 오느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그렇게 약속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겐 고난이 면제되었다고 성경 어디에서 그렇게 말했습니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아니 인류 역사상 모든 사람들은 흉년을 만났습니다. 고통을 겪었습니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느니라"

약속의 땅 가운데서도 이곳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곡식 수확이 풍부하고 농토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시루떡을 쌓아 놓은 것처럼 되어 있어서 "떡집" - 베들레헴이라 불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 떡집에 떡이 사라졌습니다. 약속의 당에 약속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왕이 없었으므로 각 자 제 소견에 옳은대로 살았다!" 이게 흉년입니다. 

흉년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합니까?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 사람들 보다 1300년 전 가나안 땅에 먼저 들어와 살던 원주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에 거짓 선지자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원수 족속이 모압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정한 족속입니다. 사사기에서 왼손잡이 사사 에훗이 모압왕 거구 에글론을 화장실이 있는 다락 난간에서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지요. 쌩똥 싸고 죽은 왕을 기억하시지요. 그 나라가 모압입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족이 지금 그곳 모압으로 갔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산골마을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흉년 보릿고개를 몇 번 넘어 봤습니다. 사람들은 깊은 산에 들어가 칡뿌리를 캐 먹고 들판에 흩어져 쑥과 나물을 캐다 끼니를 때우고 우리네 부모님들은 나무껍질을 벗겨 떡을 해 먹었습니다. 하물며 3000년전 팔레스틴 농경사회, 유목사회에 비가 오지 않아 흉년이 들었다면 그 고통이 오죽했겠습니까? 

오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흉년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을 잃어버려서 가족의 생계가 막막해 지신 분들, 사업에 실패해서 사채 따위로 전전긍긍하시는 분들, 경제적인 흉년을 만난 것이겠지요. 
건강에 자신감을 잃어버려서 '이러다 잘못되는 것 아니야',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의사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할 때에 건강의 흉년이 온 것이지요. 

행복했던 가족관계가 깨어지고 부부관계 혹은 부모자식 형제들의 관계가 깨어졌습니까? 교회 안에서 함께 사랑해야 될 우리 형제 자매들, 목장안에 가족들, 같은 사역팀 안에 관계가 사소한 말다툼이나 의견차이로 점점 골이 깊어져서 이제는 대화가 안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까? 인간관계에 흉년이 온 것이지요.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말씀이 읽기 싫어졌습니까? 분명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해야 되겠는데 기도의 문이 막혀져 버렸습니까? 내 영적인 향상이 사라져버렸습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신앙생활의 흉년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이때 흉년을 긍정적으로 직면하고 해결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한 것 같습니다. 될 때로 되라 포기해 버리곤 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문제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사이 점점 악화되어져만 갑니다. 환경을 바꾸면 해결되겠지 도피해 봅니다. 보기 싫은 사람 나 안보면 그만이지. 도망갑니다. 때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인생의 난제 가운데 하나가 왜 인생은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예수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왜 흉년이 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① 하나님의 징계로 고난이 올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건강에 이상이 오고 영적인 침체의 늪에 빠지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가?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세이지요. 

② 고난 가운데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가? 내가 가진 신앙이 참된 신앙인가? 테스트 하기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③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싸인으로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탕자는 고난을 당했을 때에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아버지께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고난이 가져다 주는 유익입니다. 

④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 방법 중 하나입니다. 
고난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변에 누군가 고난을 겪고 있다면 너무 쉽게 그 사람을 동정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그 사람을 다듬고 있는 중입니다. 그의 인격과 신앙을 만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지는 순간일 수 있는 것이지요. 고난이 유익이라. 


III. 남겨진 여인들(하나님의 헤세드)

흉년을 만나 그 사람은 모압 평원을 찾아갑니다. "거류 했다"는 말은 잠시 머물며 흉년도 피하고 돈도 벌어 금의환양하겠다는 겁니다. 그 사람은 홀로 모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아내와 두 아들을 함께 데리고 떠납니다. 

1절만 읽어보면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 사람의 이름이 안나옵니다. 그래서 궁금해하는 독자들에게 2절에서 한꺼번에 이름들을 다 가르쳐줍니다. 2절에서는 이름이란 히브리어 "쉠"이란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되며 네 가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가장의 이름은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는 "나의 하나님"이란 뜻이고 "멜렉" 왕이라는 뜻입니다. 상당히 지위에 있었던 이름입니다. 전체를 붙혀보면 "나의 하나님은 왕이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왕이 없던 사사시대 이런 이름을 가진 것이 특이합니다.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인데 1:20에 나오미 이름을 가지고 언어유희를 합니다. "나를 나오미 - 즉 기쁨, 희락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 즉 괴로움, 슬픔이라 부르라" 이처럼 나오미는 기쁨이란 뜻입니다. 

반면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입니다. 이름의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히브리어 이것 저것을 끌어다가 말론은 "병약한" 기룐은 "쇠약한"이란 뜻을 가졌다고 나쁜 쪽으로 풀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일찍 병들어 죽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연구는 잘못된 연구입니다. 그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일찍 죽으라고 이런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성경을 연구하다가 잘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게 정답입니다. 억지로 갖다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며느리가 나오는데 이들의 이름의 뜻도 모른다는게 정답입니다. 구태여 오르바(돌아가는 자)는 나쁜 쪽으로, 룻(귀여운 여친, 우정)은 좋은 쪽으로 갖다 부칠 필요가 없습니다. 

룻기 저자는 이 사람들을 소개하고 중요한 설명을 한 마디 2절에 남깁니다. 
"(이들은)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미가서 5:2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우리의 구세주, 우리의 주님 예수께서 바로 이곳 베들레헴 에브랏에서 바로 이 사람들 룻의 족보를 타고 이 땅에 태어나십니다. 

살아보기 위해서 낯선 땅을 찾아갔던 이 가정에 3절, 5절에서 부고장이 날아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가장 엘리멜렉 그리고 두 아들이 차례대로 죽습니다. 성경은 이 세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몇 살에 죽었는지, 병들어 죽었는지 사고로 죽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해설가들은 기도하지 않고 도망갔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열을 올려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은자들에 대한 너무 잔인한 해석입니다. 물론 흉년이 들었다고 너무 쉽게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 땅으로 간 것은 잘한 일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도망가는 방법은 언제나 잘못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지요. 

그러나 룻기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룻기가 이 사건을 소개하고 남긴 해설은 혼돈없이 분명합니다. 
3절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5절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는 것입니다. "남았다"는 말이 핵심입니다. 

우리 메시야의 조상은 이방 땅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다가 어떤 억울한 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젊은 나이에 죽었고 여인들만 버려졌습니다. 남편이 가족을 살려보겠다고 몸부림하다 죽어갈 때 그 고통을 성경은 침묵합니다. 자식잃은 어미의 통곡, 남편 잃은 두 자부의 절규도 침묵합니다. 유족들의 찢어지는 가슴과 그 막막했던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다만 룻기 저자는 "남았다"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함축하고 지나갑니다. 과부가 두 아이를 키우는 고통스런 이야기도 담아놓지 않았습니다. 장가를 보낼 때 그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역사 두 아들이 죽은 다음 여인들만 남았더라고 설명합니다. 

이방 땅에서 이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독자들의 상상에 대담하게 맡겨버립니다. 왜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놓칠까봐서 그렇습니다. 텅빈 지구 한 모퉁이에 남겨진 이 과부들! 버려진 이 여인들! 사람의 손으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이 과부들은 이제 하나님이 돌보실 차례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역사하실 차례입니다. 이것이 룻기의 주제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돌보심이 나타날 때입니다. 

룻기 저자는 이 가족이 모압으로 가서 벌받아 죽었다고 열을 내지 않습니다. 후대 해설가들이 그렇게 정죄하는 것 뿐입니다. 오히려 룻기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율법이 규정한 모압 여인을 다윗 왕의 할머니로 받아들입니다. 불쌍한 이 여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간섭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왜요? 우리같은 이방인들, 이방 땅에 버려진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IV. 슈브(돌아오라)

불쌍하게 남겨진 세 여인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는 것이 바로 그 다음절 6절 말씀입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세 가지 중요한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듣다"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기쁜 소식을 듣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어떤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 여인이 모압지방에서" 즉 버려진 그 땅에서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단순히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찾아오셨다! 여호와께서 다시 우리 백성을 품에 안으시고 돌보신단다!

이것이 사건을 보는 신앙인의 안목입니다. 우리 눈에 양식만 보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돌보심 - 헷세드가 보여야 합니다. 

둘째 "일어나다"라는 단어입니다. 물론 이 말은 어떤 행동을 시작하는 관용적 표현이지만 이 여인들이 슬픔과 고통의 자리를 툴툴털고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누워서 못 일어나면 그건 죽는 일입니다. 일어나면 삽니다. 기독교는 일어나는 종교입니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를 사자성어로 고쳐보라고 했더니 젊은이들이 "기립발광"이라고 했답니다. 

예수님은 서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실 때도 십자가 위에 서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에 일어나셔서 순교하는 스데반을 응원하십니다. 
일어나면 삽니다.

셋째 "돌아가다" - "슈브"라는 단어입니다. 
6절 이하 1장 전체에서 이 "슈브"라는 단어가 무려 12번이나 나옵니다. 1장 전체에서 너는 모압으로 돌아가겠느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내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손짓을 보시지 바랍니다. 그 옛날 하나님의 첫사랑이 보입니까? 돌아가십시요. 그 옛날 하나님을 섬기던 그 행복했던 순간이 기억나십니까?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돌아오라.

룻기 기자는 6절에서 이 중요한 동사들을 사용하면서 재미있는 동사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일어났다. 돌아오려 했다라는 동사를 단수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분명 주어는 나오미와 두 며느리입니다. 주어는 복수인데 동사는 단수를 사용하는 이 동사놀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성경에서 삼위일체처럼 셋인데 하나인 경우 단수가 따라오곤 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한 몸, 한 마음 같이 "함께 일어났다. 함께 돌아오려 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또 다른 뜻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작 일어나 돌아와야 할 사람은 나오미 한 사람 뿐입니다. 두 며느리는 모압 사람이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지요. 그냥 묻어 가는 거지요. 

돌아온다 "슈브"라는 말이 회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정말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사람은 나오미입니다. 지금 룻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자가 구원의 족보에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헷세드에 의해 무조건 용납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룻기의 주제입니다. 
떠난 자를 한없이 기다려 주시고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헷세드!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이 땅에 남겨진 자들을 돌보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헷세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를 무조건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다윗 왕가를 이룰 수 있도록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는 헷세드!
가족은 너를 버렸으나 하나님은 너를 새로운 가족으로 품어주시는 그 놀라운 헷세드!
한 절 한 절 감격이요 감사뿐입니다.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칩니다. 

헷세드!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차원입니다. 제한이 없는 은혜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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