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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념할 만한 헌신 (막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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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할 만한 헌신 (막 14:1~9)


저는 가끔 본문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럴 때 마다 늘 왜 주님께서 이 여인의 행위를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기념하라고 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결론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여인이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함으로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자기들의 전용물처럼 즐겨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에 대한 결과는 오직 주님께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소아과 병원 의사 선생님이 파리하게 병든 어린 아이를 진찰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내가 고칠 수 있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답답한 마음으로 "무슨 병에 걸렸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 의사는 대답했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생긴 병입니다." 
다시 어머니는 물었습니다. "나는 이 어린 아이를 열심히 사랑했는데요." 
의사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머니는 사랑했다고 하지만 이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흔적이 없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참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헌신된 모습이 됩니까? 
성경은 본문 속에서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헌신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헌신자입니다. 

사람이 부끄러운 일을 하고 이름을 감추고 무명인으로 사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랑스럽고 귀한 일을 하고도 이름을 감추고 무명인으로 사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본능을 거슬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려고 안간 힘을 다 쏟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일에 대해 과대 선전을 하기도 하고 그럴싸하게 자신을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드리고도 끝까지 이름이 가려진 무명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여인의 헌신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념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헌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조건이 없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은 삭막하고 메마른 것 같아 보이지만 이 여인처럼 자신을 나타내지 않고, 남을 돕는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숨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들은 ‘헌신’이라고 하는 것은 공개가 되면 그 향기가 반감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이 여인의 헌신은 참으로 주님께서 기념될 만한 일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에 재학 중인 한 총명한 학생이 선교단체의 지원을 받아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봉사하겠다고 지원하자 제자인 그를 아끼는 어떤 교수가 이렇게 충고하였습니다.
"자네는 그 곳에 가면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일 년이나 이년 내에 죽게  될지도 모르네. 때문에 그 일은 자네에게는 무모하고도 미친 짓이네" 
결국 그 젊은이는 아프리카의 오지로 뛰어든 지 일 년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그는 스승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선생님, 저는 아프리카 선교 사업이 마치 커다란 다리를 건설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량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땅속에 얼마나 많은 돌이 묻혀야 하는지를 교수님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내게 아프리카의 땅 속에 묻히는 이름 없는 하나의 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아프리카의 땅 위에 복음의 열매가 맺힐 것을 확신하면서."(S. S. World)

성도여러분, 이미 이름이 천하에 드러난 헌신은 빛바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름을 들어내지 않는 헌신은 주님께서 기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구제를 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다 속에 감추어진 빙하와 같이 현재 눈에 드러나고 보이는 것만으로 상황을 판단하면 잘못되거나 속기 쉽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다가 흩어져있던 제자들을 소리쳐서 불러 모으셨는데 그 이유는 그 여인이 드린 두 렙 돈이라는 헌금 액수가 아니라 여인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이 두 렙돈은 오늘날 단 돈  천 원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눈에 모이는 헌신의 질이나 양을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볼 수없는 헌신자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때문에 주님은 그 여인의 헌금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보시고 흥분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 자신의 헌신이 조건이 없는 사랑으로 자원한 헌신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헌신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헌신입니다. 


둘째-힘을 다하여 준비한 희생의 헌신자입니다.(8절)

그나마 이 사회가 그런대로 유지되고 이렇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돈이 있어서가 아니라 생각 있고 뜻있는 사람들의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희생하는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은 이 세상 뿐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는데 꼭 있어야 할 인간의 아름답고 고귀한 마음입니다.   

사람이 모습이 아름다워 보일 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스포츠경기에서도 어떤 경기 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에게는 꼴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은 사람의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택할 때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모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휴식을 취할 때 여전히 세관에 앉아 자신의 책무에 최선을 다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밝은 미래를 보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던지 힘을 다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적당하게 사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 까지도 모두가 적당히 하려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적당히 하는 사람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주님은 미지근한 신앙은 내어 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합니다. 

1798년에 ‘제너’는 천연두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젖소에서 천연두의 면역성을 가진 ‘우두’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사람에게 주사하면 천연두 면역성이 생긴다는 것을 학회에 보고했습니다. 
학회에서 마지막 실험 단계에 들어갔을 때 당시에 제일 유명했던 영국의 학계의 권위있는 의사들을 위시해서 많은 동료 의사들은 질투와 시기에서 그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시골뜨기 의사가 의학도 모르고 하나님과 의학을 모독한다고 했습니다. 동물과 사람을 구별할 줄도 모르느냐고, 동물에게 실험한 것이 사람에게 적용이 될 수가 있겠느냐고 조롱을 하면서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당시는 인체 실험이 매우 어려운 때이고, 권위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만일 그 학회에서 그것이 부결이 되면 그가 이룩한 연구의 성과는 다시 빛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머금고 "몇 달 전에 어느 사람에게 주사를 해서 듣지 않았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한 사람의 임상 실험을 가지고 되느냐며 또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자 ‘제너’는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분,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저는 23명을 실험했고, 낳은 지 열 하루밖에 되지 않은 제 아들에게도 실험을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장내는 숙연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시험은 최선을 다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결사적인 실험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인류에게서 천연두를 없애 버리기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희생이 없이 위대한 일을 해낼 수는 없습니다. 
요12:24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이 여인처럼 힘을 다해 헌신을 하는 성도의 모습은 바로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물과 피를 모두 흘려 대신 죽으셨음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믿음의 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복된 삶이됨을 믿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주님이 우선순위에 있는 헌신자입니다. 

성도의 신앙수준은 주님의 위치를 어느 곳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첫 순위를 오직 예수께 두고 있습니다.   

주일 날 교회에 가는 어린이에게 엄마가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주면서 하나는 교회에 가서 헌금하고 하나는 주일날이니까 오늘은 사먹지 말고 내일 학교 갔다 와서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신이 나서 동전을 양손에 쥐고 교회에 가다가 발이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손이 펴지면서 돈이 데구르르 굴러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잃은 동전 중에 하나는 찾았는데 하나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시궁창 하수구가 하나 있는데 아무리 봐도 그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돈을 주워 든 아이가 고민합니다. 
'이게 하나님 걸까?  내 걸까?' 
그러다가 그 아이는 큰 결심을 한 듯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이건 내 거예요. 
하나님은 저기에 있는 것 찾아 가지세요." 

한 여인이 주님께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300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가 담긴 귀한 옥합을 미련 없이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계신 곳이 온통 향기로 가득히 채워졌습니다. 
베다니 마을의 이름 없는 이 여인은 사람들이 말한 대로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자신에게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일단은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고 알아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무명의 여인은 예수님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헌신한 곳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리는 것을 보는 순간에 사람들은 갑자기 박수치고 기뻐하고 환호하기 보다는 기분이 상해서 분을 내고 꾸짖고 책망하는 일들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믿음이 떨어지면 곤 바로 불신자 같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심지어는 남이 하는 헌신까지도 못 마땅해서 온갖 안 좋은 감정을 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헌신이라도 교회에서 다른 교우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고 핍박과 꾸짖음에 대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이렇게 남을 향한 선한 기쁨이 없고 사나우며, 용서함이 없어 언제나 남을 비평하고 정죄하며 남이 하는 참된 헌신에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내세워 문제를 제기한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러한 것들로 인해 시험에 들거나 실족하지 않고 자신의 헌신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러한 희생이 없는 사랑은 이기적인 욕심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희생이 없는 헌신 역시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희생과 헌신을 갖고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이것이 진정한 섬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희생과 헌신 없는 신앙생활로는 하나님과 대화 할 수 없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언제든지 주님의 일이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분들은 누가 무엇이라 해도 언제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들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을 우선순위에 놓아둡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헌신자는 누가 핍박을 하거나 책망을 해도 절대 헌신을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1946년, 지슬로 카돌로스키라는 사람이 독일의 한 농가에 물건을 약탈하러 들어갔다가 강도로 돌변해 일가족 열 명을 향하여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인 하멜만씨만 살아 남고, 가족 아홉 명이 그대로 사살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인 카돌로스키는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고, 드디어 석방 날이 왔습니다. 그러나 그를 맞이할 가족이나 후견인이 없어 석방을 보류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하멜만씨는 자기가 그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그를 석방시켰으며,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엄청난 일에 놀라며 감탄했고 신문 기자들은 "당신 가족을 다 죽인 원수 같은 그를 어떻게 식구로 영접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은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내가 그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오히려 되물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멜만씨는 언제나 주님이 우선순위에 있었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습니다.(교통사고 난사람을 구조하다 생긴 사건) 
그러나 주님이 우선순위에 없는 헌신은 반드시 변질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없어도 꽤 잘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변질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끝까지 자신을 지킬 수 없는 것이 작심 사흘의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보든 사람들의 눈총도 뒤로 한 체 그 여인을 주둔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의 헌신은 언제나 주님을 우선순위에 둔 참 믿음과 사랑에서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언제든지 주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삶으로 거듭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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