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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마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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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

이 말씀은 예로부터 황금률(Golden rule)이라 부릅니다. 황금률은 황금판 위에 새겨 놓을 가치가 있을 정도로 심오하고도 귀중한 교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는 소중한 여러 말씀들이 있지만 이 구절이 주는 교훈은 꽃중의 꽃에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단적으로 이 구절의 ‘그러므로’라는 단어가 그 사실을 증거합니다. 주님께서는 5장 17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며 그 이하에서 그 뜻을 여러 가지 예로서 밝히셨습니다. 5장에서는 옛 율법과 대비하여, 6장에서는 외식하는 자들과 대비하여 그리하셨습니다. 이 7장 12절은 지금까지 주님의 산상수훈 교훈들을 아울러서 결론적으로 정리하신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교훈들이 많은데 그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하고 물을 때 그것은 바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도 예수님과 유사한 말을 하였습니다. 유대 랍비 중에 힐렐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힐렐을 찾아가 내가 한 발을 들고 서 있을 동안 율법을 다 설명해 보시오하고 요청했을 때 힐렐은 “네게 달갑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전체 율법이요 그 나머지는 해석일 뿐이다.” 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긍정의 형태로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였지만 힐렐은 부정의 형태로 대답한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공자님이 “내가 하기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기소불욕 물시어인)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명령은 ‘무엇을 하라’는 긍정문의 형태이며 적극적인 윤리인데 반해, 유대교나 다른 윤리들은 ‘무엇을 하지 말라’는 부정문의 형태이며 소극적인 윤리라는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표현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이 소중한만큼 다른 사람의 감정도 존중해주며, 자기의 욕구가 소중한만큼 다른 사람의 욕구도 인정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마태복음 7장 1-4절처럼 사람들은 비판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도 비판받기 싫어할 것이기에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를 원하고 자기 행위가 아무리 잘못된 것일지라도 용서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그리할 터이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과 같습니다. 황금률은 이웃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쓴 것입니다. 

황금률에서 우리는 세 가지 과정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 첫째는 싫어하거나 원하는 자기 감정이요, 둘째는 그 감정을 다른 사람의 감정과 일치시키는 공감의 능력이요, 셋째는 하거나 하지 말거나 하는 행동화의 단계입니다.


자기감정과 욕구에 충실하라

먼저 우리는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자기 욕구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자기 감정입니다. “내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는 자기의 욕구입니다. 자기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신의 욕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웃사랑을 명령하실 때 분명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기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이기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앓고 있는 암덩이보다 자기 손가락에 난 조그만 사마귀가 더 신경 쓰이는 게 사람입니다. 세상은 내 눈을 통해서 본 세상입니다. 세상은 뚜렷한데 보는 사람에 따라 흐리게도 보이고 빨갛게도 보입니다. 내가 죽으면 세상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솔직한 윤리학자는 친절이나 사랑이라는 것도 실제적으로는 이기심의 발로라고 합니다. 친절과 사랑을 베품으로써 자기 주변에 적대적인 위험요소를 줄인다는 것입니다.

라가츠라는 독일의 한 종교사회주의자는 이를 “거룩한 자기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를 긍정하면서도 이 자기 사랑의 힘을 이웃 사랑과 우주를 향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는 집과 같고 반석과 같습니다. 집이 안정되어야 우리는 밖에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어야 그 위에 큰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에서 만족함이 있어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자기 느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본 사람들, 평생토록 자기 욕구는 억제 당하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욕구가 있어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것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감정에는 기쁘다, 화난다, 슬프다, 즐겁다, 부끄럽다, 밉다 등 다양한데 이런 사람은 싫다 좋다 밖에 없습니다. 자기 느낌이 억제 당해 정확한 감정을 모르며 그 감정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데서 생성된 감정입니다.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타인을 향해서 나갈 수도 없고, 설사 타인을 향해서 나간다 할지라도 비정상적인 사랑이 될 것입니다.

제가 결혼해서 가정을 갖게 된 이후와 이전의 비교해 보니 확실히 이점에서 달라졌습니다. 결혼하여 사랑을 받고 보니 안정감과 여유가 생깁니다. 자기 사랑이 어느 정도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 이전에는 존재차제가 불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내 집착이요, 내 것을 강요하여 상대방을 부자유하게 만드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사랑에 먼저 충실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이 너무 커다란 공간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이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서 물질이나 일이나 사랑이나 어떤 목표나 명예를 향해 달려 나갑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받아야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부어진 충만한 사랑을 받고서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눈이 뜨이기 시작합니다.


공감의 능력

황금율의 정신은 역지사지의 정신이라 할 것입니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면 다른 사람도 좋아하겠구나, 내가 싫어하면 다른 사람도 싫어하겠구나 하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내가 비판받는 것이 싫으면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기에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미움을 받고 폭력은 당하면 아프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미워하지 않는 것이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프면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 하여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공감이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고통이나 즐거움, 슬픔들을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공감 능력이 떨어집니다. 자기 기분만 중요하고, 자기 먹을 것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아이들의 문제는 이런 공감의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학교 성적과 경쟁에 내몰리면서 배려나 공감을 배우기보다는 상대방은 정복하고 질시하는 경쟁자로 보게 됩니다. 인터넷이나 컴퓨터 게임, 폭력 영상은 아이들의 정서를 무정하게 만듭니다. 영상속의 인물은 고통을 모릅니다. 고통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저는 학교 다니기 전 어렸을 때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저녁 무렵에 두꺼비 한 마리가 길 위에 기어올랐습니다. 저는 그때 돌맹이를 들어 잔인하게 그 두꺼비를 여러 번 내리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 두꺼비는 심한 상처를 받은 채 숲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제 마음 속에는 그 영상이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그 두꺼비의 고통과 제 자신의 잔인함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저는 살아 있는 자연과 생물들의 고통에 대해서 눈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공감인데 요즘 아이들은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상 속에서 죽이는 사람들과 생물들은 전혀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 자꾸 노출되다보면 우리는 무정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어렸을 때 사랑을 많이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감정이 풍부해지고 공감의 능력이 생깁니다. 메마르고 차가운 사람들은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을 통해서 감정이이입이나 공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하면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함께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게 되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일을 행하고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만 알고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습니다. 공감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알뿐만 아니라 그 필요도 알아내는 능력입니다. 단순히 내가 대접받기 원하는 것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대접받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능력입니다. 

어떤 책에 쓰인 “소와 사자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소와 사자가 있었습니다. 둘은 매우 사랑했습니다. 둘은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서로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 맛있는 풀을 매일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사자는 싫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 맛있는 고기를 매일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침내 소와 사자는 다툽기 시작했고 결국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헤어지며 서로에게 하는 말, “난 최선을 다했어! 넌 날 위해서 뭘 해주었니?”

문제가 무엇입니까? 소와 사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베풀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친절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감정과 자기 생각만 앞세웠지지 다른 사람의 감정과 욕구에 대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라는 말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 숨겨 있는 다른 사람이 잘되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의 욕구나 느낌을 알기 위해서이지 내 경험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황금률은 오히려 남이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행동화의 단계

이제는 자신이 느끼고 원하고 공감했던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면 됩니다. 이 원리들은 무엇보다도 기업가들이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비록 계산적일지라도 세상에서 이 황금률을 실천하여 성공한 기업들이 많습니다. 스타벅스의 매장 직원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잘 대접받기 때문에 고객들을 대할 때 그대로 반영됩니다.” 회사가 직원들을 잘 대접해주니 직원들도 자신들이 대접받은 만큼 고객들을 위해서 대접한다는 뜻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보험 선두업체 USSA의 두 가지 황금률은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첫째, 당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모든 사람을 대접하라. 둘째, USSA는 직원들이 고객에게 대접해 주기를 기대하는 대로 직원들을 대접한다. 휴렛 패커드의 CEO 존 영은 “남들이 네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만큼 너도 남들에게 베풀라” 이것이 HP가 추구하는 기업정신의 전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기업의 이익이라는 것은 고객에게 만족을 주었을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대접한 만큼 그에 대한 대가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황금률의 말씀을 이렇게 계산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대접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친절을 베풀면 저 사람도 나에게 친절을 베풀 것이라는 기대에서입니다. 운동 법칙 중에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쓴 만큼 동시에 반대 방향에서도 동일한 힘이 가해집니다. 로켓 발사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지면에 힘을 가한 만큼 반작용이 생겨 하늘로 로켓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관계에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작동합니다. 우리가 베푼만큼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인정을 받지 못하고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그만큼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질이 되었든 사랑이 되었든 그 친절은 반드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절이 돌아오지 않을 때 인간은 화가 나가 되어 있습니다. 내가 점심을 여러 번 사주었는데 그 반대로 전혀 반응이 없을 때 그 사람이 괘씸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여기서 더나가기를 원합니다. 

황금률의 목적은 무슨 돌아오는 대가를 생각하여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그 초점이 ‘남을 대접하라’는 데 있지 ‘내가 대접 받고 싶어 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든지 전혀 반응이 없던지 상관없이 나는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를 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이 자기 행복이 된 사람들입니다. 친절에 대한 대가에서가 아니라 친절한 행위 자체로 만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대접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 대접은 어떻게 받습니까? 시내 산에서처럼 두렵고 떨리는 불로 임할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사이 곧바로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많은 사랑을 쏟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황금률대로 하나님 대접 받기 원하는 대로 인간을 하나님처럼 대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인 된 인간을 높여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유한한 인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천국을 약속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에게 돌아간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이제 그 온 마음을 바쳐 그분을 참된 하나님으로 대접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이런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이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피조물들에게 해주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홀로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좋은 영광을 온 만물들이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 황금률의 정신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은 그의 제자 된 우리가 주님처럼 황금률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은 자기 욕구에 충실하며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을 요구합니다. 이런 세계는 만인이 자기 욕구를 위해서 싸우는 전쟁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힘 센 강자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그 밥이 되거나 들러리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해서는 함께 공존할 수 없다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자기 욕구를 비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삶을 살 때 우리 사회에는 평화가 깃들고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주님의 이런 부름에 응답하여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면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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