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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의 의미 (눅 22: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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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의미 (눅 22:14~20)


제가 예전에 어떤 집사님께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새신자를 전도해서 한 주 후에 교회 나왔답니다. 그 다음주에 또 교회 나오라고 전화를 했더니 교회 안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 안오려고 하느냐? 그 새 마음이 바뀌어 졌느냐? 물었더니... 그 새신자가 하는 말이 자기 처음 교회 오는 날이 성찬 주일이었대요. 교인들은 사랑이 많다고 얘기 듣고 왔더니 자기들만 그 맛있는 빵을 먹고 그 냄새 나는 포도주를 마시고 우리는 하나도 안주더라는 거예요. 교인들처럼 이기적인 사람들은 처음 봤다는 거에요. 손님을 대접할 줄 알아야지 자긴 그래서 시험에 들어서 안가겠다는 거예요. 그 집사님이 잘 설명을 해주고 잘 설득해서 다시 몇 주후에 교회 나오게 되었다고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 오신 분들은 성찬식을 대할 때 오해할 소지가 많지요. 초대교회때에도 그런 오해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음해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흉을 봤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을 잡아서 살을 뜯어 먹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내 살이다. 하고 서로 나눠 먹드라는 거예요. 또 그들은 사람을 피를 나눠 먹는 그런 식인종 같은 사람들이다. 라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기독교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핍박의 빌미를 잡기 위해서 이야기 했다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성찬식은 매우 중요한 예식입니다. 교회에는 성례전이 있는데 그 성례전은 성찬식과 세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교회에 출석해서 6개월이 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세례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 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는 거예요. 그 세례 교인이 되면 교인으로서의 모든 기본 자격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성찬에도 참여할 수 있고 교회 봉사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4세기 신학자 어거스틴이라는 분은 우리 교회에는 두 가지의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듣는 말씀이다. 그것은 설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귀로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를 꽉 막고 있으면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지요. 듣는 설교,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또 한가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찬입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봄으로써 은혜를 받습니다. 봄으로써 은혜를 받아요. 그래서 그것을 보는 설교다. 여러분 오늘 성찬 주일은 여러분이 듣는 설교도 들으시고 보는 설교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축복 된 주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들음으로써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성찬을 행하고 성찬을 참여함으로써 은혜를 받을 수 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은 매우 중요한 예식입니다. 또 은혜의 통로이고 축복의 통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는 그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거의 설교가 25분에서 30분을 차지합니다. 또 성경을 봉독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또 시편을 함께 교독을 합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거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카톨릭의  예배 중심은 성찬식에 있습니다. 그분들은 모일 때마다 성찬을 나눕니다. 말씀은 없어도 되지만 성찬이 빠지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카톨릭도 지금은 성찬도 행하지만 강론이라고 해서 신부가 목사처럼 설교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개신교에서도 성찬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많은 교회들이 성찬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매주 마다 성찬의 은혜를 나누는 교회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도 몇 년동안 매 달 한 번씩 성찬을 하는데 근래에는 두 달에 한번 씩 성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성찬은 중요한 은혜의 통로이고 축복의 수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찬식은 자주하면 자주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성찬식은 인간들이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찬식을 명하신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성경을 한 번 읽어봅시다. 누가복음 22장 19절 말씀을 읽어보십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자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이 뭐라 하십니까?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렇습니다. 성찬식을 행하면서 나를 기념하라.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기념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회상한다는 것이고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떡과 잔을 나눔으로써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구속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늘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념하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성찬의 깊은 의미를 모른 체 매일 반복적으로 성찬을 받는다고 한들 거기에 은혜는 감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국에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이 한번은 자기 서재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가서 묻습니다. “아니 여보 왜 울고 있어요.” 스펄전은 말합니다. “여보 글쎄 내 마음이 얼마나 침체 되었는지 내가 십자가를 봐도 내 마음에 감동이 없어요.” 그래서 울고 있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주님의 떡과 잔을 나누지만 내 마음 속에 아무런 감격이나 감동이 없다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알게 될 때 우린 더 큰 은혜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성찬의 의미를 바로 깨닫고 바로 그 은혜를 회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찬의 의미란 무엇일까요? 성찬은 축제의 예식입니다. 한번 따라 하십니다. “성찬은 축제의 예식이다.” 그렇습니다. 성찬은 축제의 예식이요, 승리의 예식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 슬픈 얼굴로 참여해야 합니까? 기쁜 얼굴로 참여해야 합니까? 기쁜 얼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다 보니까 경건한 얼굴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다 맞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을 생각하면 내 마음도 아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부활의 승리를 생각하면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은 축제의 예식입니다. 감사와 찬양의 예식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승리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일회적으로 십자가에서 승리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승리하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놓고 그리고 이제 유월절 전날 그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적의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달릴 십자가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유월절 만찬의 기원은 출애굽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의 인도를 받아서 애굽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400년이 지나고 나서 그들은 너무 숫자가 많아지니까 애굽인들이 그들을 학대하고 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견디지 못해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애굽인들에게 내리십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자들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명령하셨습니다. “모세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해서 어린양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양의 피를 각 집마다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순종했어요. 그랬더니 그 밤에 죽음의 사자가 지나가는데 애굽의 장자는 다 죽음을 당했지만 유대인의 장자는 다 구원을 받은 것을 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들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발랐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pass over 넘어간 것입니다. 건너 뛴 것입니다. 그 유월절로부터 출애굽이 시작됩니다. 

여러분!! 출애굽이 무엇입니까? 억압으로부터 해방입니다. 자유한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서부터의 해방인 것입니다. 바로 그 유월절의 의미가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재현 되는 것입니다. 아니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유월절 명절을 맞이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거예요. 그분의 붉은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깨끗케 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을 지라도 예수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그 보혈로 다 씻김을 받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또한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제 우리는 죽음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정복하고 승리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밟고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어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사망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어요. 그리고 모든 사단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사단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지고 사단에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더러운 악령아 떠나갈 지어다.” 우린 이런 권세가 주어진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오래전에 유월절 예식을 통해서 억압과 고난에서 해방을 받았다면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피 흘림을 통해서 우린 죄와 사망과 사단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것을 기념하는 것이 성찬의 예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그 출애굽의 그 유월절을 기억하면서 장차 내일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미리 생각하며 맛보는 식사가 바로 유월절 식사, 오늘의 성찬식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은 축제의 예식이요. 승리의 예식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승리를 회상하고 기억하면서 우리는 감사하면서 이 예식에 동참할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찬은 사랑의 예식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시지요. “성찬은 사랑의 예식이다. 
그렇습니다. 성찬은 사랑의 식사입니다. 성만찬, 이 사랑의 식사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드릴때마다, 성찬을 나눌 때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아니 우리 대신 피흘리셨어요.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그 분이 나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보통 사랑 없이는 그렇게 행하실수 없는거예요.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한거예요. 러시아에 유명한 단편 가운데 용감한 새라는 그러한 단편이 있습니다. 그 단편에 나오는 소개되는 내용 중에 이러한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정원을 거니는데 개가 주인을 따라옵니다. 아직 바람이 불더니 나무위에서 새끼 새 한 마리가 퍼드득 퍼드득 날지 못하고 떨어졌어요. 개가 그것을 물으려고 쫒아가니까 갑자기 나무위에서 어미 새가 쏜살같이 내려와서는 이 개의 주둥이를 쏘아붙이는거예요. 개와 어미 새가 싸움이 붙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그날 결국 어미 새는 죽어버립니다. 끝내 이개는 더 이상 겁이 나서 이 새끼 새에게는 접근을 하지 못합니다. 어미 새의 희생이 결국 새끼 새를 살릴 수 있었던 거예요. 
     
그 죄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분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그렇게 행하실수 없는거예요. 그러기에 우리는 성찬의 식사를 나누면서 바로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리고 이 사랑을 우리의 이웃과 형제에게 나누어야 되는 거예요. 이 주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다. 그래서 사랑해야 돼요. 
    
성찬의 식사는 사랑의 식사입니다. 사랑의 예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와 불편한 것과 미흡한 것도 성찬식을 행하기 전에 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다 주님 앞에 내려놓고 깨끗함 받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1장 18절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다시 말하면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가지고는 이 성찬에 참여 할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주셨어요. 너희가 제단에 재물을 가지고 나오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재물을 제단에 놓고 돌아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돌아와서 재물을 드려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형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용서, 형제에 대한 영접, 용납, 배려 이것이 바로 성찬의 깊은 의미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이 사랑의 식사에 참여할 터인데 여러분 마음속에 형제들과 껄끄러운 관계가 있고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관계가 있고 미워하는 마음 있으면 이 시간 다 마음속에 지워버리시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성찬은 소망의 예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에서 먹을 식사를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거예요. 참 기대가 되죠? 이미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새 생명이 주어졌고.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터인데 그곳에서 먹을 그 식사를 미리 맛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오늘의 성찬의 의미입니다. 이 소망의 성찬이예요. 성찬의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적인 의미라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을 기억하는 거예요. 현재 의미라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십자가에(17“39) 보면은  글로바와 다른 제자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니까 낙심해서 엠마오라는 곳으로 가다가 그들과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분이 구약의 말씀들을 죽 설명해 줄때 그들은 마음의 뜨거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어서 식탁위에 앉아서 그분이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그 손길 속에서 예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날 그 순간 주님은 사라지셨습니다. 바로 그 식탁 가운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거예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성찬에도 주님께서 성령으로 임재해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성찬의 현재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의 미래적인 의미란 뭐냐. 천국에서 먹을 식사를 미리 지금 경험하는 거예요. 이사야 25장 6절에 보니까 만국의 여호와께서 이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지은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천국의 잔치 천국이여 내가 준비되어 있는데 그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 바로 오늘의 성찬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찬을 행할 때 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절망이 사라지고 소망이 싹터 오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천국의 소망을 빼앗을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공동체 예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심방은 목사가 어느 가정에 개인적으로 갈수 있어요. 뭐 전도사님과 부목사님하고 구역식구하고 몇 명이 가서 개인적으로 예배드리고 심방할 수 있어요. 근데 성찬은 개인적으로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특별히 뭐 예수 믿지 않던 분이 이렇게 죽기 전에 예수를 믿고 싶다 그런 고백을 해서 병으로 죽어 가는데 그때 가서 그 예수님을 영접시키고 세례를 행하고 그리고 성찬을 나눌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고 성찬식이라는 건 이 공 예배에서 특별히 온 교회가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한 몸이신 주님의 떡과 피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공동체 예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든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영적가족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가족이예요. 전 그런 의미에서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우리는 한 솥밥을 같이 먹는 가족이라고요.” 물론 식당에서 한 솥밥을 해서 먹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주님의 떡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떡을 떼어서 나누어 주셨듯이 우린 주님의 몸인 떡을 함께 나누어 먹게 그래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6절 이하에 보니까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한몸된 우리들이 한 떡을 통해서 함께 교재를 나누는 거예요. 성찬은 영적인 교제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일반적인 육신의 식사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식사요. 영적인 교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떡을 함께 나눠먹는 것이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예식인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온 성도들은 서로를 나눠서는 안 됩니다.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옆에 분들과 함께 인사하세요. “우리는 한 형제요. 한 자매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1부 예배 참석하는 사람 다르고 2부, 3부, 4부 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예배의 횟수는 다르지만 우리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영적 가족인 것입니다. 때로는 교단이 다르고 교회가 달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족이 무엇입니까? 서로 허물도 덮어 줄 수 있는 것이 가족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좋은 것입니다. 제가 할렐루야 성가대는 기도하면서 잘 실수하지 않는데 2부 성가대는 호산나 성가대인데 종종 실수합니다. 어떤 때 기도하다가 오늘도 그랬습니다. 기도하다가 솔로몬 성가대라고 기도하니까 기도하다가 막 웃어요. 제가 전에 있던 교회의 성가대가 솔로몬 성가대가 있었어요. 제가 워낙 솔로몬을 워낙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자꾸 솔로몬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러나 그렇게 실수를 해도 그것이 허물이 안 되는 것이 우리가 영적 가족이기 때문이에요. 
   
가족은 문제가 안되요. 다 덮어줄 수 있는거예요. 우리가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랄 때 주로 보리밥을 많이 먹습니다. 그러다가 밥 먹을 때 우리가 방귀를 뀔 때가 있나요? 없나요? 7남매 였기 때문에 우리 큰 형님이 방귀를 뀌면 동생들이 불평을 해요. 때로는 아버님이 뀌실 때도 있어요. ‘아버님은 방귀쟁이시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숟가락을 놓고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또 먹어요. 우린 그렇게 다 방구도 먹고 밥도 먹고 컸어요. 방은 좁은데 식구는 많고.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른 사람과 식사하다가 방귀를 뀌면 상당히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상당한 실례겠지요. 그러나 가족은 그것이 허물이 안됩니다. 다 이해가 됩니다. 저도 실수 할 수 있고, 여러분도 실수 할 수 있어요. 그 실수 까지도 예쁘게 봐 줄 수 있는 것이 가족 의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요. 한 공동체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 보병의 훈련 교범을 보면 긴급 교전 상황이 발생하면 일단은 자신을 은신하기 위해서 참호를 파라고 했습니다. 혼자 들어갈 참호도 중요하지만 2인용이면 더 좋다, 아니 3인용이면 더 좋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혼자 1인용 참호에 들어가면 몇 가지를 혼자 다 해야 해요. 누가 오는가 안 오는가 경계도 서야 하고 잠도 자야하고 밥도 먹어야 하고 이것을 무슨 수로 하겠습니까? 여러분. 잠자면서 어떻게 경계를 섭니까? 그러나 3인용 참호를 생각해보세요. 셋이 들어가서 숨으면 한 사람은 당번이 돼서 경계를 섭니다. 한 사람은 식사를 하고 장비를 수리합니다. 한 사람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이런 세 사람이 들어간 참호가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고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굳이 이승만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공동체입니다. 이 사랑의 의식을 가지고 소망의 의식을 가지고 함께 나누어 주고 협력하며 허물을 덮어주고 그리고 천국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오늘도 다 한 마음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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