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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야의 탈진과 회복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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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의 탈진과 회복 (왕상 19:1~8)


여러분! 더운 날씨, 계속되는 장마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힘드시지 않으십니까? 오늘 우리들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밝은 소식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집중호우로 1200명의 이재민이 발생되었다는 이야기, 군부대 초소가 허물어져서 젊은 병사가 죽었다는 그런 안타까운 이야기들, 끝도 없이 오르기만 하는 물가에 관한 이야기들, 참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어두울수록, 또 이런 무더운 날씨에 우리가 웃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좀 여유를 가지고, 좀 웃으며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서두에 좀 여러분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드리려고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구세대입니다. 우리는 옛날 속담을 기억하는데, 요즘 신세대들은 새로운 버전의 속담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여러분 한번 들어보십시오. 옛말에는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고 했습니다. 요즘엔 그렇지 않습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사다리 놓고 올라가라.’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습니다. 요즘엔 ‘작은 고추도 맵지만 수입고추는 더 맵다’고 합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요즘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죽지 않으면 산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그러나 요즘엔 ‘윗물이 맑아야 세수하기 좋다.’ 잘 웃지 않는 분들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이겠죠. ‘아는 길도 물어서 가라’ 그러나 요즘엔 ‘아는 길은 곧장 가라.’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우린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즘엔 ‘서당 개 삼년이면 보신탕감으로 적당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늘 웃으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웃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맘에 기쁨이 오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웃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고, 웃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도 늘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습니다. 산이 있으면 골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이런 희비가 늘 교차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온 인물은 언제나 승승장구하던 인물입니다. 그는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어찌 보면 백전백승입니다. 그는 한 번도 영적싸움을 해서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그의 대해서 소개하는 말이 ‘디셉 사람 엘리야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는 ‘디셉’이라는 동네 출신 엘리야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부모가 어떠했던지, 그의 조상이 누구였는지, 그런 것은 일절 소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가장 어두운 역사의 혜성같이 등장했다가 바람같이 사라진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그 당시에 아합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인 이세벨이라는 여인은 정략적으로 결혼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시집올 때에 자기 나라의 우상들을 다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바알 신을 데리고 들어오고, 아세라 신상들을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 전역에 그것을 퍼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내어 쫓고, 그들을 다 잡아 죽이고, 우상의 선지자들을 보급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온 나라에 영적어두움이 짙어져 있던 그런 시대에 혜성같이 나타난 위대한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아합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 땅에 앞으로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명령을 했는데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비가 내렸습니다.

한번은 엘리야가 아합왕을 대면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우상이 진정한 신인지, 내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신인지 우리 대결해 보자”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하나님의 종 엘리야가 단신으로 거기에 섰습니다. 먼저 바알선지자들 850명이 제단을 쌓아놓고 그들이 믿는 바알 앞에 소리 질러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한낮까지 이곳에 불을 내려달라고 소리 지르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응답이 없으니까 자기 몸을 자해하면서까지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보면서 “너희가 믿는 신이 아마 주무시나보다. 좀 가서 깨워 보거라” 이렇게 이야기 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응답이 없으니까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허물어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 거기에 도랑마다 물을 가득히 부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여 여기에 불을 내리소서!” 하고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그 모든 제물과 그 도랑의 물까지 깨끗하게 태워버린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이고, 엘리야의 승리였습니다. 온 백성은 지켜보다가 환성을 지르면서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시다.” 이 엘리야란 말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란 뜻입니다.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갔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된 선지자 850명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끌어다가 갈멜산 밑에 있는 기손 시냇가로 끌어가서 목을 쳐서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제는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과 감격이 있었겠습니까? 놀라운 사실은 이게 하루도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용기백배하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하룻밤을 지내기도 전에 낙담에 빠집니다. 정말에 빠집니다. 불안에 떱니다. 그리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가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오늘 보니 그렇게 배짱이 있고 당당하던 사람이 내일 보니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원인일까요? 

오늘 성경으로 돌아가 보시겠습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바로 이것입니다. 이 아합왕은 성경에 보면 본심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인을 잘 못 얻어가지고 부인에게 꼼짝 못합니다. 엄청난 실패를 경험하고 집에 돌아가서 부인 이세벨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그런 것 가지고 무얼 걱정 하냐고, 나에게 맡기라”고 합니다. 아합은 천성이 착한 사람인데 약간, 공처가 기질이 있습니다. 그저 부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힘든 일은 다 부인에게 의지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요즘은 공처가가 되어야지 노후가 편안하다고 합니다. 공처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듯이 아내를 공경하고 떠받드는 남자가 공처가 아닙니까? 공처가보다 더 심한 사람을 요즘은 경처가라고 합니다. 아내를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마 아합이 공처가에 속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를 굉장히 의지했습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만 한 남자친구가 늘 친구들에게 공처가라고 늘 놀림을 받았답니다. 한번은 친구들이 그 집을 방문했는데 이 친구가 앞치마를 매고 설거지하다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봐라 너 공처가 맞지 않느냐? 부인의 앞치마나 매고 있고” 그러자 이 친구가 화를 버럭 내는 것입니다.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냐고, 이것은 부인 앞치마가 아니고 내 앞치마라고” 여러분! 아마 아합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세벨이 여자이지만 배포가 있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경고를 합니다. “내일 이맘때쯤에 너의 생명을 취할 것이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믿는 신들이 내게 벌에 벌을 내릴 것이다. 어제 갈멜산에서 죽은 바알의 선지자들처럼 너도 동일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런 경고장을 보냈습니다. 

이 경고장을 받는 순간 엘리야가 낙심이 되어서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우리 3절 말씀을 보십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이 형편을 보고, 이 위험한 상황을 보고 스스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용기백배한 엘리야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자기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쉽게 말하면 자살 충동을 느끼고 ‘하나님 내 생명 거둬 가세요.’ 하고 낙담과 절망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참 이해가 안 됩니다. 어찌 이럴 수 있을까? 그래서 학자들은 이 엘리야의 모습에 대해서 다각도로 연구를 했습니다. 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공통된 의견은 엘리야가 탈진되었다고 말합니다. 영어론 ‘번 아웃(BURN-OUT)’ 되었다고 말합니다. 탈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학자들이 말하길 “쏟아 놓을 만큼 쏟아놓은 사람들에게 타나나는 증상이다. 더 이상 무언가 쏟아놓을 것이 없어서 나타나는 탈수증상이 탈진이다.” 대개 탈진은 3가지 조건 아래에서 옵니다.

첫째,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할 때 탈진이 옵니다. 너무 피곤한 것, 그래서 여러분 너무 과도하게 피곤하면 안 좋습니다. 엘리야는 이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아마 굉장히 기도하고 준비하고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잠도 못 잤을 거고, 아마 음식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치고 피곤에 빠졌습니다. 피곤할 때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건강할 때 정신도 건강한 것이지, 육신이 자꾸 병들면 마음도 병듭니다.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매사를 부정적으로, 비판적으로 보게 됩니다. 여러분! 너무 육체적으로 힘들면 안 됩니다. 여러분! 여름휴가 갈 기회가 되시면 꼭 가시기 바랍니다. 쉴 수 있는 기회는 놓치지 마십시오. 또 집에서 방콕하지 마십시오. 방콕이 무엇인지 아시죠? 방에 콕 박혀 있는 것 하지 마십시오. 이왕이면 돌아다니십시오. 가족들과 좀 만나고, 쉼도 같고, 여행도 하고 하십시오. 그것이 내일을 위해서 오늘 유익한 것입니다. 쉬지도 않고 일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치료비가 더 듭니다. 그리고 오래 장수할 수 없습니다. 쉴 수 있을 때는 쉬시기 바랍니다. 너무 탈진할 때, 너무 육체적으로 피곤할 때 이런 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정신적인 낙심, 정신적인 공황상태에 이를 때 우리는 탈진하게 됩니다. 이렇게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무찌르고 나니까 이제는 세상이 내 세상 같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상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아마 바알과 이세벨이 엘리야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선생님 우리를 좀 살려주세요. 이제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우리가 잘못 했습니다.” 할 줄 알았는데, 웬걸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이세벨이 분개가 충천해서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내가 이렇게 애썼는데’, 세상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 생명만 취하려고 쫓아오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당황합니다.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해봤자 되는 게 없네, 변화가 없어, 바뀌는 게 없어’ 이렇게 무기력감을 느낍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저앉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 공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나만 홀로 남았구나.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혼자만 몸부림 쳐봤자 되는 것이 뭐가 있나.’ 고독감에 빠져듭니다.

세 번째 탈진의 이르는 조건은 영적 고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넘치고, 이러면 탈진이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 기도가 중단될 때, 아니 하나님을 우리가 찾지 않을 때, 영적 소진현상이 올 때 우리는 탈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탈진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많이 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탈진이 찾아올 때가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 같은 목사님도 이런 탈진을 경험했습니다. 

링컨 대통령도 탈진을 경험하고 우울증까지 경험했습니다. 탈진이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발전해 가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참 무섭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우울증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우울증에 걸리면 혼자이고 싶어집니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직장도 가기 싫습니다. 만사가 귀찮습니다. 아니 주일 교회 가는 것도 귀찮습니다. ‘오늘 좀 안 갔으면 좋겠다.’ 안 가려 하다가 ‘성가대인데 안 갈수도 없지, 전화오고 난리치지, 가서 얼굴이나 보고 와야지.’ 그래서 억지로 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우울증 증세가 삶을 무기력하게, 의욕을 다 소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을 보십시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 고독감입니다. 특별히 남자들도 한 15% 정도가 우울증을 경험한답니다. 여자 분들은 적어도 30% 정도가 우울증을 경험합니다. 특별히 40대 후반에 가서. 그리고 폐경기를 경험할 때 여인들은 우울증을 잠시나마, 가볍게라도 우울증을 다 경험합니다. 이 때 조심하셔야 합니다. 쉽게 보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고백 속에서도 ‘오직 나만 남았다’ 이 구절의 고백 속에서 그가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중년이 되면 자기 혼자라는 고립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나는 정말 너무 외로운데, 남편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있으나마나한 남편입니다. 좀 위로받으려 했더니 아침 먹으면서 국이 짜니 싱거우니 불평만 하다 나가버립니다. 없는 것이 낫겠습니다. 자식이라고 위로받으려고 불평 좀 했더니, 엄마처럼 행복한 사람이 어딨냐며, 행복한 줄 알라고 합니다. 세상에 자식도 내 맘을 모릅니다. 아무도 내 맘을 모릅니다. 버려진 것 같은 고독감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또 '내 열조보다 내가 결코 낫지 아니하나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모세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었는데 나는 너무 무능한 것 같아. 세상을 하나 바꾸지도 못하고', 나 자신이 너무 열등감에 빠집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엘리야의 마음속에 이런 낙심도 왔을 것입니다. 또 그는 말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만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내 생명이 이제 거둬가세요." 무엇입니까? 희망을 상실한 사람에게서 오는 체념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늘 희망을 주는 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영입니다. 희망을 상실 할 때 이 사람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여러분! 희망만은 마지막까지 곡 붙드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시험 드는 분들 보면 대게 낙심의 증상부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열심히 합니다. 땀 흘리면서 내 돈 들이면서 했는데,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칭찬은 고사하고 돌아오는 것은 조롱이요, 비난이요, 비판입니다. 그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내가 다시 일하나 봐라. 내가 죽어도 봉사 안한다.’ 그 때부터 마음이 꽉 닫힙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닫힙니다. 배신감에 대한 마음 때문에 사람들과 만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낙심과 우울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육신적으로 피곤할 때 쉬십시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너희가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하고 마가복음 6장에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이런 우울증을 겪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그가 종교개혁운동을 하다가 너무 피곤하고 힘드니까 낙심되어서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하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아니 여보! 왜 상복을 입었어? 누가 죽었어?” 그랬더니 루터의 부인이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이 죽었어요.” “아니 세상에 하나님이 죽다니 그런 불경한 말이 어디 있어.” 부인이 말합니다. “당신이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죽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당신이 낙심에 빠질 수가 있어요.” 그때서야 루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기도하고 찬양을 부르면서 종교개혁의 과업을 완수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낙담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의욕이 상실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곳을 우리가 믿음 안에서 지혜롭게 잘 극복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이제 우울과 낙심을 피하는 몇 가지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홀로 있지 말라. 여러분! 혼자 있는 것, 기도하기 위해서, 묵상하기 위해 혼자 있는 것은 좋지만, 그냥 우두커니 혼자 있지 마십시오. 멍해집니다. 그럴 때 내 안에 나쁜 음성이 들려옵니다. ‘세상 살아서 뭐 하냐? 그냥 빨리 가지, 더워 죽겠는데, 세상의 소망도 없는데 뭐 하러 사냐?’ 자꾸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여러분! 혼자 있지 마십시오. 또 이렇게 자꾸 이렇게 우울해 지는 분들 자꾸 혼자 두지 마십시오. 혼자 있는 것은 안 좋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라고 마틴 루터는 말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움을 구하십시오. “집사님 우리 집에 놀러 좀 오세요.” “구역장님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장로님 저하고 대화 좀 해요. 커피 한 잔 해요.” 이러면서 마음에 있는 것을 쏟아놓으셔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쏟아놓아야지 마음에 시원함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나면 질병의 70%는 그냥 낫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병이라는 것이 마음에 엉킨 것이 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화할 사람을 만나셔야 합니다. 운동을 하시던지 누군가와 교제할 사람을 만나셔야 합니다. 구역예배에 가시던지, 여신도에 가시던지, 남신도에 가시던지. 혼자 계시지 마십시오. 혼자 계신 어른들 계시지요? 자주 자녀분들하고 전화 하십시오. 자녀들은 전화 잘 안 합니다. “왜 전화 안 하냐?” “어머니 쉬시는데 방해 될까봐 전화 안 했다고” 답답하면 대신 여러분이 전화 하십시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럽니다. 저녁 10시쯤 갑자기 생각이 되어서 전화하려니까 ‘아이고 우리 며느리 잘 시간인데 깨우면 안 되지’하고 미안해서 전화 못 합니다. 새벽 6시에 전화하고 싶은 마음이 딱 드는데 전화하려니 ‘아이고 우리 아들 자는데 피곤한데 전화하면 실례지.’ 낮 12시에 전화하려니까 ‘지금은 한창 일할 시간인데 전화하면 방해되지’ 이래서 전화를 자꾸 그만두게 됩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병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전화하셔서 대화하십시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 마틴 루터는 말합니다. 노래하고 음악을 즐기십시오. 노래하세요. 음악을 즐기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세요. 그래야 우울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과 그 깊이를 의존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읽음으로써 재충전을 받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때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감격이 넘치고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그럼 그까짓 낙심과 우울 당장에 이길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탈진을 조심하십시오. 충분히 쉬십시오. 여러분! 피곤할 때는 예배드리러 와서도 꾸벅꾸벅, 아무리 귀한 말씀을 증거 해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눈꺼풀이 감겨서 안 됩니다. 여러분! 잠을 충분히 주무시고, 예배당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훌륭하지만 기도할 때 앉으면 잠만 자꾸 옵니다. 그러면 기도보다 먼저 주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기도하는 것보다 충분히 주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건강해야지 기도도 할 수 있고, 예배도 바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잘 쉬셔야 합니다.

엘리야는 오늘 이런 낙담한 탈진한 상황에서 어떻게 회복해 갑니까? 바닥을 치는 이 고통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이끌어 가십니까?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우리 5절~6절 말씀을 한번 읽어보십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가만히 보면 일단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이 엘리야의 고통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정말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이렇게 내가 지금 고통당하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하나님은 엘리야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셨기에 천사를 보내어 그를 어루만지시고 그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그를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를 것 같지만 다 알고 계십니다. 나의 고통과 절망을 아시고, 나의 외로움을 아시고 나의 질병을 아십니다.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사랑하는 나의 딸아! 내가 너의 절망을 안다.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내가 너의 고독을 안다!” 주님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엘리야의 가는 길을 아셨듯이 여러분의 인생길도 이미 알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보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오직 비록 고통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이용하셔서 내 인격을 성숙시키시고 내 믿음을 연단시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엘리야를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어려움 당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천사를 통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를 어루만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어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 엘리야가 힘들어 할 때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할 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그를 위로하십니다. 베드로가 갈릴리바다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래서 너무 피곤한 모습으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나서 “베드로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그물을 내렸더니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혀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할 때, 실패했을 때 주님은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는데 한밤중에 풍랑을 만나서 큰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것을 아시고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누구십니까?”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말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성도님이 경험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생을 살고 나서 자기 살아온 삶을 회상하는데 하나님이 환상을 하나 보여주십니다. 바닷가에 있는데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나와 주님이 함께 걸어가신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이건 내 발자국, 이건 주님의 발자국.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쭉 보다보니까 가시밭길을 걸어가는데 발자국이 한 사람 발자국 밖에 없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게 내 발자국이면 주님의 발자국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는 주님께 따졌습니다. “내가 건강하고 평안할 때 주님은 내 손 잡고 랄랄라 걸어가셨는데, 내가 가시밭길을 건너고 내가 힘들고 쓰러질 때 주님 어디 계셨나요?”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얘야! 그건 모르는 소리야. 건강할 땐 내가 너와 함께 손잡고 걸었지만, 네가 너무 지쳐서, 힘들어서 쓰려져 걷지 못할 때, 내가 너를 내 등에 업고 내가 친히 걸어갔단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면서 감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이 힘들어 할 때, 여러분이 약할 때,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위로해 주십니다. 오늘 성경 본문 7절을 읽어보십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천사가 또 다시 와서 그를 어루만지십니다. 힘들어 할 때, 마사지를 해 주십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리고 엘리야가 지쳐서 굶주려 있는데 숯불에 구운 떡과 시원한 물 한 병을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일어나서 이것 먹고 힘을 차려라! 네가 이제 먼 길을 가야 할 텐데 가다가 쓰러지면 안 되지 않느냐! 그를 위로해 주십니다. 격려해 주십니다. 엘리야는 그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다시 용기를 내어 일어나서 호렙산에 올라서 그 사명을 받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그의 인생을 사명으로 마무리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떡과 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있는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고 담대히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파데레프스키라는 아주 유명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는 폴란드인으로 피아노의 거장입니다. 그는 작곡가이기도 하고, 폴란드의 국무총리까지 지낸 정치인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이 파데레프스키에게 친구가 부탁을 했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세계적인 피아노의 거장이 아닌가? 내 딸이 이제 피아노를 배워가지고 연주대회에 나가는데 자네가 와서 좀 봐주게!” 

그런데 마침 그 날 파데레프스키는 선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당일이 되었는데 선약을 했던 사람이 약속을 취소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연주회장으로 부랴부랴 달려갔습니다. 친구의 딸이 연주를 하고 있는데 첫 번째 곡을 하고 있는데 너무나 훌륭하게 연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첫 곡이 끝나고 두 번째 곡을 하기 전에 잠시 쉬는데 이 딸이 뒤를 둘러보다가, 거기서 파데레프스키의 얼굴을 보게 된 것입니다.

세계적인 거장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 친구의 딸이 얼어버렸습니다.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제대로 연주를 못 했습니다.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다 망쳐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손을 놓아버리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 때 파데레프스키가 조용히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딸을 안아주면서 그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이렇게 조용히 말합니다. “얘야! 틀려도 괜찮아! 다시 한 번 시작해 보렴, 내가 봐줄게! 그랬더니 이 딸이 용기를 얹고 다시 두 번째 곡을 연주하는데 얼마나 훌륭하게 연주를 했는지 온 관중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실패와 좌절 속에 낙심한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틀려도 좋아! 이제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해보지 않겠니?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내가 너를 도와줄게!” 우리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주님의 위로의 음성, 주님의 부드러운 격려의 소리를 들으시고 절망과 좌절의 자리에서 일어서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용기를 얻고 일어나셔서 하나님의 그 큰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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