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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 2:4~8,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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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중세의 문을 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흔히 학자들은 르네상스를 한 마디로 ‘ad fontes’라고 표현합니다. 라틴어로 본질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중세시대는 인간의 본질보다 자연이나 신이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는 사람의 원래 모습보다 요란한 의상이 더 돋보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되면서 그림에서 인간 본래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르네상스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보디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봄’이란 그림을 보면 사람들의 나상을 그렸습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는 인간 본래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반면에 종교개혁을 ‘ad biblia’라고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성경보다 교회의 결정이나 교황의 말이 더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되자 성경의 진리를 되찾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해방과 거대한 변혁의 물결은 1,200년의 중세를 몰락하게 한 것입니다.
  
16세기의 교회는 부패와 타락의 본산지였습니다.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세속군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남발하여 팔았습니다. 이 때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의 마르틴 루터는 극심한 영혼의 위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이 눈에 띠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하여 영혼의 눈이 떠졌습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517년 그는 비텐베르크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초였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중심인물로 어려움을 당하여 피신하고 변장하고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마치 그의 이런 기간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적 각성 기간과 같았고,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을 지난 기간과 비유될 수 있습니다. 루터는 파문되어 교회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파문이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로마에는 ‘세 분수 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바울이 참수 당한 곳으로 알려진 기념교회입니다. 거기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신앙이 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돌을 팔레스타인에서 가져와서 지었다고 합니다. 28계단으로 대리석로 만든 계단입니다. 이 신성한 계단의 돌이 닳는다고 하여 나무로 덮어두었습니다. 그 곳에는 전통적으로 순례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 올라가는 곳입니다. 바울은 이곳에 와서 무릎을 꿇고 올라가다가 성경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마음에 확신으로 다가와 그냥 걸어서 내려왔다는 계단입니다.
  
독일 에르푸르트에 가면 루터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에는 시편 118편 17절이 적혀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루터의 삶과 어울리는 구절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은 살게 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수많은 사람을 죽게 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의 위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당시의 세태를 보면서 “왜 악인이 잘 됩니까?” “왜 의인이 고통을 당합니까?” “의인이 고통을 당하되 왜 악인이 의인을 핍박합니까?”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해답을 얻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해답은 구약의 하박국과 신약의 바울 그리고 중세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개혁자 루터로 이어지는 신앙의 계보를 통해 신앙인의 위대한 해답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칼 바르트는 20새기 신학의 거장입니다. 그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어느 한 학생이 바르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박사님,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큰 진리는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압니다. 성경이 내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해답을 분명히 아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악인이 성하고, 진리가 왜곡되고,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도 하박국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해답으로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첫째, 악인은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합니다.

4절 상반절에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라고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적 자세입니다. 부정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입니다. 교만과 부정직은 다 같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그 자체가 부정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겸손한 것이 인간의 정직입니다.
  
유다 왕 웃시야를 보세요. 역대하 26:16에는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고 합니다. 교만은 곧 악입니다. 사람이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6:2에는 “아하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간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악한 사람은 한결같이 하나님께 정직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며’란 말의 히브리어는 ‘우펠라’입니다. 이 말은 ‘부풀어 오름’을 의미합니다. 무례와 뻔뻔스러움을 나타냅니다. 교만한 자라는 말은 안정되지 못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런 심적 상태가 왜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세를 보세요.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새인 기도의 모습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말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 자랑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 회개가 없습니다. 이것이 교만의 모습입니다.
  
주역(周易)에는 용(龍)을 빗대어 지도자의 성장과 소명을 설명합니다. 첫째는 잠룡(潛龍)입니다. 물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용으로 지도자가 준비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둘째는 현룡(見龍)입니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물 밖으로 나타난 용입니다. 셋째는 비룡(飛龍)입니다. 하늘을 오르는 용으로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시기입니다. 넷째는 항룡(亢龍)입니다. 비룡이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교만하고 자만하고 추락하여 아무도 그를 추앙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용이 눈물을 흘립니다. ‘용의 눈물’입니다. 누구나 너무 높이 올라가 자만하게 되면 이렇게 떨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들은 자랑삼아 높이 날다가 너무 높이 날아오른 나머지 매의 먹이가 되고 만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4에는 사랑을 설명하면서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자랑하지 않는 것, 교만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악은 자랑하며 교만하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랑과 교만은 결코 자신과 남에게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위대한 영웅들의 공통분모는 정직이었습니다. 겸손과 정직은 지도자의 필수 요건입니다. 정직은 리더십의 모퉁잇돌입니다. 야곱은 그의 자식들이 애굽에서 잘못 가져온 돈을 돌려주라고 하였습니다. 욥의 정직은 부단히 시험을 당했고 그 것을 잘 견디었습니다. 정직을 포기하는 것보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낫습니다(잠19:1). 정직하게 사는 것이 예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잠21:3). 정직은 그 하나만 가지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교만 그 자체가 부정직입니다. 겸손하면 정직하게 됩니다. 내가 가진 게 얼마나 됩니까? 내가 아는 게 뭐 있습니까? 내가 높아도 얼마나 높습니까? 겸손은 정직입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를 재미있게 읽는 법이 있습니다. 왕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는 것을 크게 둘로 구분해 보세요. 한 쪽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합니다. 선한 왕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한 쪽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합니다. 악한 왕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정직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부정직은 곧 악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정직함을 원하십니다. 악에 대항하는 방법은 겸손과 정직입니다. 겸손과 정직으로 악한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4절 하반절에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합니다. 악인의 교만과 악인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듯한 것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은 바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면 의인이 됩니다.
  
‘믿음’은 히브리어로 ‘에무나토’입니다. 이 말은 공평, 견고, 확실, 영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뢰성에 기초하여 증명되는 개인의 품성이나 행위의 공평함을 뜻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공평하게 살고, 견고하게 살고, 확실하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과 루터에 의하여 이 말씀이 해석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인간의 어떤 행위도 구원을 받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신학적인 대립을 가졌던 펠라기우스 학파는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인 율법에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을 만큼 행위가 온전한 자가 있습니까?
  
욥기 22:3에는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고 합니다. 인간 가운데는 행위가 온전한 자가 없습니다. 또 사람들이 보기에는 행위가 온전한들 그 온전히 인간의 기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7번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사랑을 많이 베풀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네 사랑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에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치며 고쳐달라고 하던 맹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한센 환자 가운데 고침 받은 후에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고 나은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많이 베풀어도, 위대한 행동을 해도 구원은 그것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라는 침몰하는 배에서 필사적으로 뛰어내리는 행동이라고 합니다. 포도나무의 비유를 보세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가지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이 말이 64회나 나타납니다. 이 말은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방주 밖은 죽음이지만 방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삽니다. 믿음은 세상의 죽음으로부터 지켜주는 방주입니다.
  
요한복음 6:47에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합니다. 믿으면 영원히 삽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고, 믿음은 살게 하는 것입니다. ‘믿다’라는 용어는 성경에 272번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의미합니다. 믿음은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모태신앙이란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모태신앙을 자랑합니다. 물론 모태에서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전수한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재적 신앙입니다. 어머니의 신앙이 아니라 나의 신앙입니다. 과거의 신앙 아니라 현재의 신앙입니다.
  
사도신경의 “내가 믿습니다”(Credo)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입니다. 믿음(belief)은 내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신앙(faith)은 외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신앙은 현재적이어야 하고, 우리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현재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은 믿음이 지금, 현재라는 영역에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과거나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적 실상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믿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위를 받쳐줘야 합니다. 신앙과 행위의 일치가 진정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고 합니다. 행함과 믿음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도, 행함이 없는 믿음도 다 헛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블롱델은 “어떤 사람이 믿는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으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라”고 하였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의 행위를 가진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과 행위가 일치된 자입니다.
  
남북 전쟁이 막바지일 때 남군의 리(Lee)장군이 아포마톡스에서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전 남부 사령관 헨리 와이즈의 아들은 신생 미합중국에 충성을 맹세하였다고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헨리 와이즈는 아들의 말을 듣고 “우리 가문에 오점을 남겼다”고 하였습니다. 남부 연합군의 지휘관이기도 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리 장군이 그렇게 하라고 조언하였어요”. 이 말을 들은 와이즈는 1분도 안되어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그렇다면 상황이 다르구나. 리 장군이라면 어떤 조언이라도 옳지”. 

리 장군에 대한 신임을 의미합니다. 와이즈 장군은 리 장군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나의 어떤 말이라도 사람들이 긍정하고, 나를 옳다고 인정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과 나의 믿음이 인정받는 삶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삶을 살아야 의인다운 삶입니다.


결론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의 믿음을 저버리는 최악의 변질은 그 믿음이 단순히 문화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머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의인답게 살려면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진리가 폄훼되고 믿음이 훼손되는 시대에 우리가 삽니다. 누가복음 18:8에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게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믿음이 보입니까? 믿는 자가 보입니까? 의인이 살아 있습니까?
  
의인이 살기 힘든 시대입니다. 믿음을 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진리가 폄훼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삶의 지혜가 되고, 악을 능가할 수 있는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운 때에 믿음으로 넉넉히 승리할 줄 믿습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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