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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갈과 보김 (삿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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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갈과 보김 (삿 2:1~5)


I. 총론 요약

지난 시간 우리는 사사기 서론 중에서도 서론 - 총론을 공부했습니다. 사사기 전체 주제를 Let King, Be King! "왕을 왕되게 하라"라고 보았습니다. 이 주제는 오늘 우리시대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될 수 있으며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미국산 소고기 파동이란 것도 결국 소로 하여금 소되게 하여 죽음의 식품, 죽음의 문명을 생명의 식품, 생명의 문명으로 되돌리려는 몸부림입니다. 

사사기는 본론을 가운데 두고 앞짱구 뒷짱구처럼 서론이 둘, 결론이 둘 - 앞 뒤로 짱구처럼 붙어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사사기 2:1-5은 첫 번째 서론 1장 전체의 해설이요 요약입니다. 

사사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400년전 아득한 고대 중동 팔레스틴에서 일어난 가나안 정복사인데 이 사건이 어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단 말입니까? 히브리 사람들은 이 사사기를 옛 이야기나 역사가 아니라 "전기 예언서"라고 부른다는 사실에서 그 힌트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사기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 상황에서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기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역사는 예언이다."

한국교회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착처럼 한반도 한민족 역사속에 정착을 했습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 교회가 가나안에 하나님 왕국을 건설하는데 실패한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도 정착 그 이후 이 땅을 섬기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아픔을 느낍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구원 그 이후 그리스도인의 빛된 모습을 보여주는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장하고 부흥되었는데 오히려 존경받기보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여호와의 영감"을 받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 시대의 사사들이 나타나야 할때입니다. "미션 임파서블" - 그때 불가능해 보이는 한국교회 제2의 부흥과 도약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우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위대한 민족입니다. 

우리는 사사기의 저자를 "신명기 역사가"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과 토라(율법,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계를 받게된다는 단순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고난도 물리치고 승리하지만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떠나면 망하게 됩니다. 임마누엘! 이것이 사사기의 외침입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보다는 성전이 있는 남쪽 유다를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이 사사기를 공부하는 동안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더욱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현재 우리 교단은 7,661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저희 교단은 어떤 교단보다 안정적인 교회들로 구성된 교단입니다. 통계를 살펴보니까 장년 어린이 합쳐서 재적교인 500명 미만의 교회가 91.7%쯤 됩니다. 재적 5,000명 이상 되는 17개의 교회가 있고, 재적 7,000명 이상 모이는 9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어느덧 우리 교회가 저희 교단안에서 10대 교회 안에 들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소박하게 보고를 잡아보더라도 20대 교회 안에 들어서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우리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가 부흥될 것인가? 하는 노력이나 몸부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 우리교회가 한국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연약한 교회들을 섬길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섬기는 이 도시를 어떻게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 되어졌습니다. 비전채플 건축 이후에 그 어느 때 보다도 우리교회는 영향력이 더 커져가게 될 것이고 또한 우리교회의 목회 비전과 원리와 몸부림 여하에 따라서 우리교회가 한국교회, 세계 역사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사사기는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21:25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라는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여호수아서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듯이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의 죽음이 곧 하나님의 일의 중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이제 죽어 이스라엘 백성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만 하는 그들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죽음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임무를 중단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행진은 계속되어야 했듯이 말입니다. 사사기에 나타나는 주인공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인간 영웅에 의해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 지도자가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사사기는 인간 영웅전이 아닙니다. 철저히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가를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무래도 류영모 목사이겠지요. 그러나 오늘 류목사가 죽는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조금도 제한받지 않습니다. 더욱 새롭게 역사는 펼쳐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사사기는 인간 그 누구도 영웅시 하지 않습니다. 아주 강한 사람도 하나님 떠나면 망합니다. 아주 약한 사람도 하나님이 임하면 그 시대 사사가 됩니다. 


II.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싫어서

짱구 서론 가운데 첫 번째 서론이 1:1-2:5 인데 1장을 전혀 읽지 않고 2:1-5만 읽었습니다. 1장을 읽어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기가 힘들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사기를 읽기만 해도 정확하게 해석이 되고 적용이 된다면 오늘밤 심각히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내가 성경교수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닌가! 1장 전체의 요약이 바로 2:2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2:2)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원칙적으로는 점령을 끝냈습니다. 지파별로 땅의 분배도 끝이 났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확인하고 남은 잔당들을 진멸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바로 이 일에 실패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1장을 보면 정복 전쟁의 실패 이야기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삿1:19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1:29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매" 30절 "쫓아내지 못하였으나" 31절 "쫓아내지 못하고" 33절 "쫓아내지 못하고.."라고 했습니다. 34절에 보면 오히려 아모리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쫓겨나기까지 했습니다. 가나안 부족들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군사작전지대는 험한 산지 요새에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평가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부족을 쫓아내지 않은 것은 결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쫓아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쫓아내기 싫어했고 심지어는 가나안의 신들과 풍요 그리고 그들의 쾌락을 함께 즐기고 싶어서였다는 것입니다. 

쫓아내지 못한 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순종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처음부터 군사의 수가 많고 무기가 좋고 작전이 절묘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했느냐 하나님께 순종했느냐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이 있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불순종하여 가나안을 쫓아내지 아니하고 즐겼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실패하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하나님도 도와주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삿2:3)

오늘 성도들의 실패 또한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지 그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냐 없냐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니 충성이니 거룩이니 절제니 헌신이니 하는 지질이 궁상을 떨며 살께 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하나를 가져도 더 가지고 한자리가 높아도 더 높아지고 인생을 즐겨도 좀 폼나게 즐기며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속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만큼 정착하고 성장하고 커졌으면 정복자가 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피땀 흘려 키워놓았으니 이제 맘껏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지금 성도들이 죄를 짜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짜르고 깨끗하게 살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욕망을 버릴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이런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저주합니다. 
"그것은 타락이다. 그것은 잘못이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이 주는 죄의 즐거움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이스라엘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III. 보김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과 저주를 듣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4절 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사사기2:4-5)

백성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이곳 이름을 아예 보김이라 불렀습니다. 
"보김"의 난외주를 보면 "우는 자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울었다고 하니까 금방 우리는 회개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김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도, 감사의 눈물도, 용서받은 감격의 눈물도, 새롭게 살아보자는 다짐의 눈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받으셨다는 기록도 용서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울고 난 다음 이스라엘이 달라진 흔적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가 아파 병원엘 갔습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하는 말이 "선생님, 내 귀가 고장이 났나봐요. 내 방귀소리가 안들려요." 그랬더니 의사가 방귀소리 커지는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 지금 뭘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습관적으로 울어버린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가나안의 문화와 쾌락을 버리기 싫어 울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초상집에 가서는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해야 하듯 하나님의 꾸중 앞에 형식적인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체면을 살려드리기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하나님, 이제부터라도 잘해 보겠습니다"하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초상집에서 밤새도록 울더니 옆에 있는 친구에게 묻더랍니다. "이보게, 지금 누가 죽었노?" 하더랍니다. 

부모가 회초리를 들면 매를 안맞겠다고 무조건 울어버리는 자식이 있습니다. 매를 피하고 난 다음엔 전혀 행동을 고치지 않습니다. 입술 깨무는 반성이 없는 자식이 바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눈물은 참 고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없는 눈물은 가증스런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이란 찬송부르다 눈물 한번 흘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봉사 한번했다고 내 영성이 하루 아침에 달라지는게 아닙니다. 잘못했구나 후회했다고 죄가 사라지는게 아닙니다.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을 철저히 거부해야 합니다. 가나안 부족을 종으로 부려먹으며 편안히 살겠다는 의지를 버려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어디에 몇 만이 모여 회개합시다. 소리 한번 치고 끝난다면 그곳이 바로 보김입니다. 사기 치고 부정축재하고 감사헌금 몇 푼으로 양심을 달랬다면 그곳이 보김입니다. 맨날 감동은 받는데 내 삶과 신앙과 성품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곳이 보김입니다. 이 예배가 보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눈물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보김의 눈물은 이런 책임이나 결단이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IV. 길갈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은 할만큼 했는데 하나님은 왜 우리를 책망하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울어도 안되고 제사를 드려도 안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말입니까? 그 해답이 오늘 본문 2:1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왔다는 것은 "길갈"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길갈로 돌아가자는 것은 가나안 땅을 떠나 길갈로 가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길갈의 정신, 길갈의 언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 여호와의 사자(말아흐 야훼)가 누구인가 살펴보십시다. "말아흐 야훼"라는 말은 구약성서에 총 41회 등장하는데 사사기에 15번쯤 나오니까 사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단어라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 "말아흐 야훼"입니다. 
·출애굽기 23:2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출애굽기 3:3 떨기나무 불꽃속에서 모세를 부르신 분이 "말아흐 야훼"입니다.
·가나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전 여호수아를 만나주신 분이 "말아흐 야훼"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말아흐 야훼"는 구약의 성자라고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말아흐 야훼"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왔다고 말합니다. 보김은 우리가 잘 아는 벧엘을 말합니다.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이곳에 지금 언약궤가 있다는 얘기이니까 바로 벧엘입니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보김을 "울음의 장소 벧엘 곧 이스라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의문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책망을 하기 위해 왔다면 하늘에서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왜 길갈에서 왔다고 말합니까? 벧엘에서 2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길갈이지만 이곳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든 실패가 가나안에 들어오기 직전 하나님과 맺었던 길갈 언약을 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책망하기 위해 나타나시는데 "평양에서 서울로 와" 그랬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평양 대부흥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지요. 지금 한국교회의 실패 이유가 있다면 우리믿음의 선진들이 가난했던 시절 핍박받으며 복음을 전했던 그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입만 열면 외쳤던 민족복음화의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삼각산에 올랐던 나라사랑의 구국기도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노래하던 종말신앙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못 먹고 못 입어도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겼던 조상들의 순결한 헌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여, 성령이 친히 찾아와 이 민족을 새롭게 하던 그날 평양 대부흥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말씀하십니다. 


V. 길갈 언약

길갈로 돌아가자! 길갈 언약이 무엇입니까? 이 길갈 언약은 여호수아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할례

이스라엘은 지금 막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건넜을 때 이스라엘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넜다는 소식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때, 가나안 백성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여호수아 5장 1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더라"고 했습니다. 

군사 전략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지금이야말로 가나안 땅의 첫 성인 여리고성을 공격할 적기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거나 아니면 요단 강을 건넌 여세를 몰아 곧바로 진격 명령을 내리는 일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점령전쟁을 격려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명령을 하십니다. 여호수아 5장 2-3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2-3절)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잘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육신적 가치나 질서로 살지 아니하고 언약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를 짜르고 죽이는 아픔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을 밟았습니다. 주위엔 온통 적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나무를 꺽어 활을 만들고 녹슨 칼을 갈고 바위에 돌창을 문질러 전의를 불태워야 할 시점에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를 행하라! 이는 일종의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민으로 살아갈 의식을 행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하필 왜 이 시점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백성들의 사기가 식어지면 어떡합니까?
·적들이라도 쳐들어 오면 어떡합니까?
·수술받은 군사들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왜 하필 지금 할례를 받아야 합니까? 왜 하나님은 성공의 문턱에 서 있는 백성들의 엉뚱한 문제를 꺼집어 내어 재를 뿌리는 겁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요단강을 갈라서 기적의 방법으로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가나안 땅을 밟게 하신 목적을 4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오게 하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이 땅에 살아가는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복되게 근사하게 사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짜를 것 짜르고 일어설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5:9)

길갈이란 "굴러갔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수치, 애굽의 가치, 욕망을 굴려버린 곳입니다.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할례를 행했을 때 "애굽의 수치가 떠났다"고 하셨을까요? 무할례자의 수치가 벗겨졌다 혹은 광야의 수치가 물러갔다고 하시지 않고 애굽의 수치라고 하셨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번 할례를 행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애굽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고 보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몸만 애굽을 떠났을 뿐, 마음속에는 늘 애굽의 노예 정신이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노예 근성을 버리기 전까지는 여전히 노예일 뿐입니다. 구원 그 이후의 과제는 세상 가치관을 짜르는 싸움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노예가 되어 살던 그 부끄러움을 짜르고 굴려버린 곳이 길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유혹을 정복할 힘을 기를 때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거절할 능력이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비전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물러가야 하나님 나라 영광이 찾아옵니다. 

2. 유월절

길갈은 할례를 행한 후 유월절을 회복한 장소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처음 교회 나온 어떤 분은 6월 달에 무슨 행사가 있나보다 했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받은 해방잔치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의 축제를 벌였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싸움을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싸워 이긴 싸움에 그들은 그냥 동참하러 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축제이지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승리와 축복을 확인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이전에 유월절을 지키라"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주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가나안의 전쟁은 여호수아의 전쟁이 아닙니다. 사사들의 전쟁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입니다. 애굽의 바로와 하나님께서 싸우셨듯이 그리고 그 싸움의 절정이 유월절이었듯이 이제 바로와 싸우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가나안과 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무엇입니까? 애굽으로부터 우리는 이겼다는 선포식입니다.
유월절 잔치는 무엇입니까? 가나안 왕들로부터 이미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세상이 결코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길갈은 유월절이 있는 곳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뭘 먹고 어떻게 살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3. 군대장관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므로 거룩함을 회복하고 유월절 잔치를 통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자 말아흐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킨후 아마도 여리고 성을 돌아보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는 했지만 여리고 같은 난공불락의 성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때 그는 칼을 들고 서 있는 한 장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13절)

나는 "말아흐 야훼" - 여호와의 사자 - 곧 구약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는 칼을 들고 자기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자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어느 편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적 편이냐 그때 그는 놀라운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14절)

보김의 "말아흐 야훼"는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저주하고 버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길갈의 "말아흐 야훼"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면 보김에서 길갈로 가자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이 길갈의 언약, 길갈의 정신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이 지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주인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 결 론 >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곳은 보김입니까? 아니면 길갈입니까? 세상을 놓지 못해 쩔쩔매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짜르고 사십니까? 
·맨날 울고 있는 너의 눈물이 정말 가치있는 눈물이냐? 맨날 가슴 아파하는 그 진통이 의미있는 고통이냐? 하는 것입니다. 
·돈 잃어 울고, 몸 아파 울고, 가슴이 쓰려 울어 보았지만 정말 하나님을 더 섬기지 못해 울어보았습니까? 하나님 섬기고 사랑하는 내 모습이 초라해서 가슴을 쳐 보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눈물은 보김의 눈물일 뿐입니다. 
·내 표피를 부싯돌로 짜르는 고통 때문에 울어야지 세상 사람들 누리는 것 누리지 못해 억울해서 울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 보김의 눈물은 부끄러운 눈물입니다. 
·언제까지 내 상처 타령이나 하며 지질이 궁상을 떨며 살렵니까? 지금 보김을 떠나 길갈로 갑시다.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때 일수록 카리스마 지도자 - 사사가 필요합니다. 
·기름부음 받은 교회가 필요합니다. 이런교회, 이런 지도자를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와 우리에게 사사의 기름을 부어 주시면
- 한국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 이 도시를 살려내겠습니다. 
- 다음세대를 우리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회를 물려주겠습니다. 
·미션 임파서블 -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새역사, 새부흥이 일어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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