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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수의 강 (요 7: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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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 (요 7:37~44)
 
중국 감숙성 난주에 가면 “황하 모친상”이라는 조각 작품이 있습니다. 황하를 뒤로 하고 어머니가 길게 누워 아이를 품고 있는 모습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황하를 어머니로 그리고 자신들을 그 자식이라고 여겨온 것을 형상화한 것이랍니다. 

실제로 감숙성에 가보면 이 말이 실감이 납니다. 중국 서부 지역에는 황량하고 거친 고비 사막이 거대한 위용을 드러냅니다. 그 고비 사막 한 가운데를 한줄기 강이 짙은 황토 빛으로 흐릅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그 풍광이 특이 합니다. 온통 황토로 뒤덮인 고비사막 한 가운데 황토 빛 강 한 줄기가 길게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강 양쪽 주변에 초록의 푸르름이 두 줄기 선으로 길게 따라 이어집니다. 

강을 따라 나무들이 자라고, 강을 따라 도시와 마을이 형성되고, 강을 따라 생명들이 살아 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황하는 생명의 강이고, 생명의 젖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이 황하를 자기들의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강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문명은 이 강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강은 생명을 풍성케 합니다. 그래서 이 강가에서 문명이 발달하고 도시가 발전했습니다. 강이 흘러 생명이 생겨나고, 강이 흘러 생명이 살아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여기서 “생수”라는 말은 “생명이 있는 물”이라는 뜻으로 그 물을 마시는 자들이 생명을 얻게 되는 그런 물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라는 말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 또는 “마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속 깊은 곳에 생명의 물이 강이 되어 흐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그 메말랐던 심령 속에 생명의 강이 흘러 풍성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저 고비 사막 한 가운데 황하가 흘러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생수의 강은 무엇? 

그러면 생명의 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본문 37은 “명절 끝날 곧 큰 날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명절은 초막절을 말합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조상들의 광야 생활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온 뒤 풍성한 추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종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초막절은 8일간 거행되었습니다. 이 초막절 의식 가운데 물을 제단에 붓은 “물 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제사장들은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다 성전 제단에 부었습니다. 이 때 제사장들이 앞 장을 서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 긴 행렬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이 예식을 일곱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신학자 몰간(G. Campbell Morgan)은 이 초막절 “물 예식”의 의미를 두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광야에서 물을 포함한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스겔, 요엘, 스가랴에 나타난 “사막에 강이 흐르리라”는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령이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중요한 것은 저들이 초막절 마지막 날 여덟째 날에는 이 물 예식을 거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희생 제물을 드리고 절기를 마무리 했습니다. 몰간은 이 또한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는 이제 광야에서처럼 물이 반석에서 솟구치는 기적이 필요 없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약속 곧 자기들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리라는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목마름에 허덕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기적의 생수를 마셨습니다. 그 생수로 육적인 목마름을 해갈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또 다른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영적인 목마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던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던 영적 목마름을 해결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영적인 목마름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인 목마름은 물을 마시면 해결됩니다. 그런데 영적인 목마름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의 강은 바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그 심령 속에 성령이 임재하셔서 영적 목마름이 해결되고, 또한 성령이 충만하여 그 심령이 생명을 누리고 나아가 풍성히 누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막 한 가운데 강이 흘러 그곳에 생명들이 목마름을 해결하고 풍성한 생명이 역사가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메마른 심령 속에 성령이 임하셔서 영적 목마름이 해결되고 또한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흐르면? 

본문을 보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수가 강이 되어 흐르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성 기후라서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집니다. 우기에는 비가 와서 강에 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건기 때는 비가 오지 않아서 강에 물이 말라있습니다. 강에 물이 흘렀던 흔적은 남아있는데 물이 없습니다. 

이렇게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을 “와디”라고 부릅니다. 이 와디에는 물론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와디 주변에 나무나 풀들이 우거질 수 없습니다. 그저 풀도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가시덤불이 고작이고, 나무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는 아카시아과 싯딤 나무 정도입니다. 저들은 목마름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와디에 물이 흐르겠다는 것입니다. 강이 되어 다시는 마르지 않게 계속해서 물이 흐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떠난 인생은 마치 와디와 같습니다. 영적인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와디 같은 심령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심령 속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심령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우리 심령 속에 성령이 오셔서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우선 영적인 목마름이 해갈됩니다. 

우리 몸에 수분이 모자라게 되면 목마름을 느끼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심령들 속에 영적인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 목마름은 대표적으로 다음 몇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첫째,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떠나 홀로 인생길을 걷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마치 엄마 손을 잡고 놀이동산에 갔다가 엄마를 잃어버려 미아가 된 아이가 두려워 우는 것처럼 하나님 없이 인생길을 걷는 심령 속에 깊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나면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둘째, 죄책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무엇인가 알 지 못하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나 때문에 일이 잘못됐다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셋째, 외로움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누군가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 못해서 늘 외롭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이 외로움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내와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외로움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그 외로움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런 영적 목마름은 마치 메마른 대지 위에 단비가 내려 해갈되듯이 성령이 우리 심령 속에 충만히 임하시면 해결됩니다. 우리 심령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면 해결됩니다. 


다음 풍성한 삶을 살 게 됩니다. 

우리 심령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게 되면 놀라운 열매들이 맺히게 됩니다. 


저는 중국 선교여행을 하면서 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숙성 십천이라는 마을에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이 마을은 고비 사막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산에 나무 한 그루가 없었습니다. 온통 황토 천지였습니다. 늘 뿌연 황사가 날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마을은 전체가 과수원입니다. 여의도만한 면적 전체가 배나무 밭이었습니다. 마침 배꽃 축제가 열렸는데 나무마다 하얀 배꽃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풍광이 무척이나 낯설었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 배꽃 축제가 열린 것입니다. 주변에는 나무 한 그루 없는 산골에 과수원에만 배꽃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옆을 지나 흐르는 황하에서 물을 끌어 들여 만들어진 과수원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도 강이 흐르니까 풍성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광야 같은 우리 심령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게 됩니다. 

영적 목마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남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앞 가림도 못하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며 뭇생명을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 지게 됩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게 됩니다. 


생수의 강은 어떻게? 

그러면 생수의 강은 어떻게 하면 우리 심령 속에서 흐르게 될까요? 

본문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수의 강의 발원지가 예수라는 것입니다. 예수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른다는 것입니다. 

최근 AFP 통신은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은 아마존 강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동안 나일강이냐 아마존강이냐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리마  지리학회가 정밀하게 조사해 보니까 아마존이 7062 키로로 나일강보다 391키로가 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면밀하게 조사해 보니까 아마존 강의 발원지는 페루 아레키파 주 케후이샤 산 기슭의 해발 5150미터에 위치한 아파셰타 계곡의 한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긴 강도 발원지가 있습니다. 그 발원지로부터 강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심령 속에 흐르는 생수의 강은 그 발원지가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로부터 흐르는 강만이 생수의 강입니다. 오직 예수로부터만 성령이 임하시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예수와 배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영이라고도 부릅니다. 세상 그 어떤 종교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철학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인물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은 예수로부터만 임합니다. 오직 생수의 강은 예수로부터만 발원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를 믿어야만 우리 심령에 생수의 강이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강이 흐르려면 발원지와 연결되어있어야 합니다. 연결이 끊어지면 강은 흐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예수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수돗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우선 취수원에서 정수장으로 물을 끌어옵니다. 그리고 정수장에서 정수가 된 뒤에 그 물이 각 가정으로 전달이 됩니다. 그 과정에 파이프가 있습니다. 파이프가 취수원에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파이프가 정수장에 연결되어있습니다. 그 파이프를 통해서 물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그 순간 영적인 파이프가 예수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 심령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셔서 역사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생수의 강이라는 말입니다. 강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는 다릅니다. 청계천에 흐르는 물처럼 냇물 수준도 아닙니다. 수량이 풍부하고 천년 세월이 넘어도 그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고 또 흐르는 저 한강처럼 흘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도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영접할 뿐 아니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필요할 때만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그런 분이어서는 안됩니다. 늘 동행하면서 모든 것을 의논하고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그런 분이여야 합니다. 

그럴 때 생수의 강은 정말 풍성한 강으로 흐르게 됩니다.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시작되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건설이 시작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임한 사건을 심령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른 것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심령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수의 강이 흐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예수를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한 강이 되어 힘차게 흐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 목마름이 다 해결됩니다. 풍성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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