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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오벧에돔의 복 (삼하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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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벧에돔의 복 (삼하 6:1~15)

   동일한 씨가 밭에 뿌려져도 밭의 토질에 따라 열리는 열매의 맛이 다릅니다.
청도 감나무를 이웃 고을 경산에 심으면 감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동일하게 사람의 마음에 떨어져도 
         어떤 교인은 그 말씀을 통해 복을 누리는가 하면
         어떤 교인은 그 말씀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법궤를 중심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어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일을 시도하였습니다.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바알레유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너무 기뻐서 다윗 왕과 백성들이 모두 좋아서 찬양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갑자기 소가 펄쩍 뜁니다. 
법궤를 호송하던 웃사가 넘어지려고 하는 법궤를 손으로 붙잡는 순간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두려워 더 이상 법궤를 운반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고 
      오벧에돔은 법궤를 석 달 동안 자기 집에서 모셨는데 
그때 오벧에돔은 그 소유와 집에 형통한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오벧에돔이 법궤를 집에 모시고 받은 복을 
     함께 누리는 복된 가정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먼저 하나님의 궤 즉 법궤가 우리에게 예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 먼저 하나님의 궤(법궤)가 우리에게 예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2절)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는 사건은 법궤를 중심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법궤가 우리에게 예표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궤는 법궤, 언약궤 또는 증거궤로 불리워집니다. 
법궤는 광야생활 중 싯딤나무에다가 금으로 입힌 조각목으로 된 
       가로 112.5cm, 세로 67.5cm, 높이 67.5cm의 직육면체 상자로서
       성막 제일 깊숙한 곳 지성소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언약궤 위에 연결된 마주보는 두 그룹 사이에 궤 뚜껑을 
      카포레드 라 해서 속죄소(사은소)라 불리워지는 장소로
     종종 하나님의 강림의 장소로 언급됩니다. 
이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을 나타내는 십계명 두 돌 판과 
하늘 양식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만나 및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 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며
     또한 신약교회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법궤를 중심해 일어난 사건을 통해 복과 저주가 갈라지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교회를 섬기는 자세에 따라
       우리 가정의 복과 화의 갈림길이 된다는 것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출25:22절에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가면 
하나님이 법궤 가운데 임재하셔서 
          자동적으로 싸움에서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법궤를 실로 성소에서 전쟁터로 가져오자 
               이스라엘 군대는 힘을 얻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법궤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그들의 생각은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패했고 법궤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사람이 정해놓은 장소에 
         얽매이는 분이 아님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법궤를 빼앗기게 하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법궤를 주술적, 기복적으로 의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징계하신 것이었다. 
이것은 불순종의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인 것입니다.

불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그 법궤로 인하여 불레셋 땅에 재앙이 일어나자 
불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2.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과정을 이야기 해 보세요(1-5절)

삼상7:20절에 보면 이스라엘로 돌아온 법궤가
                  바알레유다 아비나답의 집에 20년 동안 있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에 이르기 까지 사울 왕의 40년 통치기간을 더하면
       약 60-70년 가까이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대상14:3절에 사울의 통치 기간 중에는 이스라엘 백성 중 그 누구도
            언약궤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호와 신앙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한 TV 김치냉장고 광고가 생각이 납니다. 
남편이(중견 탈렌트 백윤식씨) 김치를 먹으면서 궁시렁 거립니다. 
김치가 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하는 말이 “사랑이 식은게지” 
아내가 만든 김치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남편은 아내의 사랑이 식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시절 하나님께서 
      법궤를 외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랑이 식은게지...” 
이때 이스라엘은 무척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에게 찾아오는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정말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된 후 예루살렘에 다윗성을 건축한 후
먼저 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뽑은 무리 3만을 모아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한 것입니다.

1) 1절에 다시 모았다는 말은 이스라엘 총회로 모였다는 말인데
   <호크마 주석>에 이것은 온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회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부흥의 회복은 
          언약궤의 상징인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회복은 항상 교회 중심적인 신앙으로 싹이 틉니다.

2) 하나님의 궤가 70여년 만에 변방 바알레유다에서 
            이스라엘의 중심부인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게 되는 데는
   다윗 왕의 신앙적 열심히 인해 이루어진 것 같지만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은혜의 결과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할 때
   나의 삶에 변방에 있던 교회가 나의 삶에 중심으로 옮겨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할 때
        법궤를 원수의 손에 넘겨준 역사적 사실을 의거해 볼 때
               더욱 확실한 신앙적인 교훈인 것입니다.

3) 한 사람 다윗 왕의 순종을 크게 보시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화평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신약교회는 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케 된 구속의 은총이 주어진 곳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만
모두가 움직이게 하기까지는 
       신앙적 열심의 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다윗같이 우리에게 이중의 직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존경 받는 임금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윗은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의 종에 불과 했다는 사실입니다.  
왕의 영광을 누리게 하시면서 종의 섬김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이중직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의 정체성에서부터 우리의 사명에 이르기 까지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중복되어지는 역할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시며 완전한 인간 이십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 지셨지만 모든 이름위에 높아 지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이중적 중복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어 
그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춤추며 기뻐하는 일이 
            바로 우리의 일 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3.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6-8절)

다윗이 바알레유다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운반할 때에
       새 수레를 만들어 소들로 끌게 하였는데 

6절에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는데
7절에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그곳에서 치시니
      웃사가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8절에 그래서 사람들이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불렀더라고 합니다.
법궤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베레스 웃사>의 불상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왜 베레스 웃사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민:4:15절에
[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
법궤를 운반할 때는 
채를 양편 고리에 꿰어 어깨에 메고 운반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새 수레를 만들어 법궤를 운반하는 것이 더 정성되게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가 된 것입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웃사를 치셨습니다. 
다윗이 너무 놀랐고 더 이상 법궤를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건을 길이 새기기 위해 바로 그 자리 
   웃사가 죽은 그 땅을 다윗이 <베레스 웃사>라 이름 붙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두려워서 법궤 운반을 중단하고 
         일시 오벧에돔의 집에 모셔두기로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윗의 태도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로서는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     
그동안 70년 방치 됐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웃사를 치셨습니다. 
 사람의 편리대로 그렇게 법궤를 옮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은 법궤 운반을 중단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을 가지고 재정비하기로 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법궤를 모셔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자기는 물론이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말도록 
그 자리를 <베레스 웃사>라 이름하여 그 교훈을 길이 새기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실수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실수를 덮으면 안 됩니다. 
     그 실수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베레스 웃사>라 이름하여 자신의 신앙을 재정비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을 재정비해야 합니다.

여기서 또 베레스 웃사 사건을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왜 하나님이 웃사를 치셨는가?
   웃사의 행동에는 다음과 같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아버지 때로부터 모셨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처럼 여겼던 웃사, 
마치 자기가 하나님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웃사를
하나님은 그를 치사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엎드려 쓰러지게 하셨습니다. 
신앙을 자기 야망의 도구로 삼는 이들은 불행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출세의 방편으로 삼는 사람들도 불행 합니다. 
우리 모든 죄와 허물의 빚을 다 갚아 주시고 
     오직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하여 주신 그 은혜를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면서 섬기는 
그런 귀한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기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베레스 웃사가 주는 교훈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베레스 웃사 - 「웃사의 위반」이란 뜻입니다.
베레스란 말을 역사가 <요세푸스>는
저편 땅 즉 성경에 요단 강 저편 땅의 표현에 해당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경계선을 위반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베레스 웃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스스로 더 높아지려는 마음이 `베레스 웃사`입니다.
말씀보다 자신의 경륜을 더 중요시하는 자신이 `베레스 웃사`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자신이 `베레스 웃사`입니다.
자기 야망을 위해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려는 자신이 `베레스 웃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자방망이로 이용하려는 자신이 `베레스 웃사`입니다.
진리의 대가가 불이익일까 두려워 
      진리를 외면하려는 자신이 `베레스 웃사`입니다.
어떤 직책에 있던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려는 자신이
                               `베레스 웃사`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베레스 웃사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서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다고 
          소문이 나 다윗의 귀에 들린 것입니다.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거의 70년간 대물림하며 있었는데도
       웃사의 죽음으로 아비나답의 집과 온 나라에 화근이 되었고 
오벧에돔은 여호와의 궤를 겨우 석 달을 모셨는데
    그의 온 집에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4.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이 복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며 
              어떠한 복을 받았습니까?(9-11절 참조/대상26:4-8절)

가드 사람 오벧에돔이란 말은 불레셋 땅 가드가 아니라
수21:24절에 보면 
‘가드’는 단 지파의 지경에 있던 레위인에게 준 ‘가드림몬’을 가리킵니다.
또한 오벧에돔은 대상26:1,4절에
고라의 후손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문지기였습니다. 
오벧에돔은 법궤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이 당한 엄청난 재난과 
           벳세메스 사람들이 어떤 재난을 당하였으며 
특히 법궤를 운반하던 웃사가 소들이 뛸 때에 
     법궤를 붙들므로 재앙이 임하여 죽은 사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법궤를 옮기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다윗 왕조차도 
       웃사의 죽는 사건을 보고 법궤 모시기를 포기한 때에, 
       오벧에돔은 법궤를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이렇게 법궤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도 
            기꺼이 맞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법궤의 참 모습인 하나님을 보았고 
       법궤가 방치하거나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가까이 할 대상인 줄 알았기에 법궤를 모신 것입니다.

오벧에돔이 법궤를 집에 모시고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대상26장에 성전 문지기를 맡은 자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오벧에돔과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상26장에서 오벧에돔이 받은 복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8절에 “오벧에돔에게서 난 자가 육십이 명이며” 말씀을 통해 
          오벧에돔이 자손번성의 복을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 자손들 중에서 큰 인물이 나왔습니다. 

6절에 “그의 아들 스마야도 두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다스리는 자요 큰 용사라”는 말은                    
지도자가 배출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자손들 모두 능력이 있는 유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8절에 “이는 다 오벧에돔의 자손이라 그들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은          
다 능력이 있어 그 직무를 잘하는 자니” 
여기서 ‘능력이 있다’는 말은 
       ‘재력이 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오벧에돔은 하나님께로부터 자손의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집안이 두루 형통하고 번성하는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벧에돔이 어떻게 이처럼 귀한 복을 받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법궤를 70년을 모시고도 화근이 되었는데
     오벧에돔은 석 달을 모시고도 온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오늘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자세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말씀입니다.
풀핏 주석에 보면
오벧에돔이 복받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레스 웃사의 사건으로 다윗 왕도 두려워했던 법궤를 
오벧에돔이 집안에 모시고 보니 그도 역시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그리고 푸른 비단천으로 싸여 있는 언약궤를 볼 때마다
       자녀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과 바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경외심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자 <위즈비>의 ‘잘못된 예배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란  책에서
 우리의 예배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경외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경외심이란 하나님의 경이로움에 눈이 뜨여진 자의 
              심령에 일어나는 신비로움이라고 합니다.
웃사는 법궤를 너무 가까이 하다 보니 겁 없이 대한 것이고
오벧에돔은 베레스 웃사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경외심을 가지고 법궤를 모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외심을 가지고 교회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 집에 오벧에돔의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인터넷에서 펴온 글입니다. 
글쓴이는 교회 권사님으로서 시집을 와보니 
         주위에서 예수 믿고 축복받은 가정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더랍니다.
시어머니가 혼자 예수 믿고 아들 둘을 장로로 만들어 놓고
          시집온 며느리들도 둘 다 교회 권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레스 웃사의 설교를 듣고 권사님이 꽝 하고 부딪혔습니다.
다른 교인들은 축복받은 가정이라고 하는데
사실 속을 들여다 보면 장조카가 얼마나 애를 먹이고
     시집간 딸이 이혼을 하고 친정에 와 있고
자기들이 하는 사업은 빚더미에 올라와 있고 
         몸은 항상 무거워 교회 봉사도 옳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레스 웃사 설교를 듣는 가운데
그래 우리 집안이 지금까지는 아비나답의 집이었다.
그러나 오늘 부터는 오벧에돔의 집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이후
겁 없이 신앙생활 하던 습관을 벗어던지고
       정신을 차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니 
       완전히 집안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다는 간증입니다.
예수 오래 믿은 성도들 꼭 이 말씀 마음에 새기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오벧에돔이 자기 집에 법궤를 모심으로 복을 받음으로
       그 영향력이 자손들뿐만이 아니라
       온 나라에 미침을 알 수 있습니다.


5. 오벧에돔이 복을 받음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12-15절)

오벧에돔이 복을 받음으로 먼저 집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 저주의 가문이 축복의 가문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대상26:1절 이하에서 고라의 자손이라 하였습니다.
고라는 모세를 배반하고 원망하여 대적하고 선동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땅이 갈라져 산채로 매장당한 심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벧에돔의 조상 고라는 생활이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오벧에돔의 조상은 아름답지 못하여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인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복을 받지 못하였을지라도 우리는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아 살았을지라도 우리는 복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조상들이 잘못되게 살아 복을 받지 못하였을지라도 
         우리들이 신앙으로 바르게 살면 복을 받게 됩니다. 
못난 조상 되지 마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학부모 아버지가 선생님을 찾아보았습니다. 
선생님께 여쭈어 봅니다. 선생님 우리 애가 성적이 어떻습니까? 
국어 점수는 , 수학점수는 , 화학점수는 어떻습니까? 
역사점수는 어떻습니까? 
그때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는 학창시절에 어떤 과목이 제일 점수가 않좋았습니까? 
역사였습니다. 네 어쩐지! 역사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는 역사가 바귑니다.
신앙의 경각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교회를 섬길 수 있는 복의 근원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복된 삶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오벧에돔이 이전에는 가난했으나, 그 석달 동안 갑자기 부자가 되어, 
    동네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다고 는 말하며
          ‘신앙심은 번영의 가장 좋은 친구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이 그의 집과 모든 소유에 복을 받았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들리자
다윗이 다시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데
궤를 멘 자들로 하여금 여섯 걸음을 가서 제사를 드리게 하고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며 
            궤를 메어왔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벧에돔이 받은 복은 
       그 집과 가문 그리고 동네 나아가 온 나라에 미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오벧에돔의 신앙으로 축복이 흘러넘쳐 이웃으로 온 나라로
                흐르게 하는 복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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