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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행 13:21~23. 삼상 1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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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행 13:21~23. 삼상 16:6~13)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당신이 기적 같은 놀라운 선교를 할 수 있었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프로그램도 아니고 전술 전략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시는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그와 함께 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어떤 큰 일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위기에도, 절박함에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 이스라엘이 전쟁에 지고 있어도 법궤를 빼앗겨도 가만히 계셨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망해도 개의치 않고 기다리셨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같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일어나면 그를 붙잡고 큰 부흥의 바람을 일으켜 주십니다. 온 도시를 회개시키고 나라를 바로 세우며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고 위기를 순식간에 극복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다가도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교회는 쇠퇴하고 맙니다. 지역 사회 안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교회가 있어도 그 사회는 다시 죄와 타락이 만연해집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성경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우리를 감동을 주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참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헌신짝처럼 팽계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다윗은 특별히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죽 읽다가 이 본문 말씀에 오면 잠깐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그 말은 다윗을 처음 보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한참 다윗을 겪어 본 다음 다윗을 평가하는 내용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가 내 뜻을 이루게 하리라." 여기에서 '마음에 합한다'는 말은 '마음이 맞는다', '마음에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듯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없어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하여 그와 같은 마음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다윗이 어떠한 사람이길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마저 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영웅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그가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어 나라를 통일하는 큰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그도 치명적인 실수를 한 인물이 아닙니까?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정말 하나님 앞에 불충한 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까?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도 인간 관계에서 느껴서 아시지만, 직장 생활이라든지, 회사에 다니면서 상관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일하는데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것을 보면 굉장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니 너무나 부러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상16: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겉모습을 가지고서는 잘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가 아무리 언변이 좋고, 세상적인 명예를 가지고 있다 할찌라도, 그것은 겉모습뿐이지, 그 속을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당황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하나님은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는 중심을 본다." 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중심이란 우리 인격을 이루는 근본이 아닙니까? 바울은 '속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중심을 보신다는 말은 결국 우리의 속 사람 혹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 있는지를 보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 있는지 없는지를 보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영이 깨어 있어야 하나님을 알고 그 뜻을 분별하며 그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허우대가 멀쩡하다 할지라도 그 영이 잠들어 있으면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된 사울은 키가 남보다 훨씬 크고 잘 생겼지만, 그의 영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스스로 교만하여 결국 하나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영이 살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간직한 소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시고 당신의 뜻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을 들고, 그 다음에는 다윗을 들었습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왔는데, 그 혈통에 관계되는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만 언급합니다. 즉 다윗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이 나를 쓰신다고 할 때 그 얼마나 황홀한 감격을 갖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중심을 보고 당신의 사람들을 쓰십니다. 무엇보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며 그를 통해 한 시대를 가장 아름답게 쓰십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다큐멘타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 주눅이 들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일꾼들의 눈에는 일이 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사울 임금의 권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형님들을 전술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의지했습니다.

2.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겸손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따라 붙습니다. 그것은 진실과 회개의 삶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연구해보면 정말 다윗은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왜요? 다윗은 실수가 너무 많아요. 허물이 너무 많아요. 저는 그저 몇 곳 보았는데, 전문가가 연구를 하고 책에 써놓기를 성경에만도 스무 곳 이상의 씻을 수 없는 실수와 죄상이 기록도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기 문제를 감추거나 질질 끄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돌아보며 즉시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그의 회개에 중요한 점은 절대로 변명이 없습니다.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를 않습니다. 책임을 환경에 돌리지도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간이기 때문에"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밧세바와의 관계를 보세요. 이 간음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 거 아닙니까? 더구나 밧세바가 다윗을 유혹했다고 성경은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죄를 회개할 때에 그는 한번도 밧세바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의 실수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나이다." 내가 책임을 집니다. 그건 내 잘못입니다. 아무 변명도 없고, 책임전가 의식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진실이요.

3. 그리고 성령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13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이 날부터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8:10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야료'란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시51:11절에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4. 그리고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15년의 고통스런 세월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얼마든지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굴에 있을 때나 들에 있을때나. 그래도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심지어 장인 되는 사울이 다웃을 향하여 창을 두 번이나 내 던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끝까지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으로 섬겼습니다. 그의 신앙이요 그의 겸손입니다.

특별히 시므이 사건은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압살롬이라는 다윗의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왕위를 내놓고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 왕을 가로막고 돌을 던지며 저주했습니다. 아비새라고 하는 장군이 참다 못해 옆에서 칼을 빼고 저놈을, 이 죽은 개 같은 놈을 내가 가서 목을 베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말 한마디면 끝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말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입니다.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버려두라.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마구 해대고 싶은 그 순간 마져 자신의 감정과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고 자신의 시선을 더욱 주님께 고정시켜 놓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픔이 있는 것 같지만,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반드시 선하게 인도하실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어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로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좀 진지해 져야하지 않겠습니까?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과 같이 허무하게 살다가 가는 인생, 이 인생을 움켜쥐고 있다가 끝내서는 안됩니다. 주어진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놓으신 것들을 사용하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도록 내 몸, 내 시간, 내 달란트, 내 재물, 내 모든 인생의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드리고 그분 앞에 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그런 고민을 합니다. 내 인생이 이 땅에 머무는 동안 끝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쓰임을 받고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우리 모두가 주 앞에 가는 그 날까지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멋지게 주님의 통로로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인들을 보면 분명히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우리 교회도 청년부가 있고, 65세 이상이 되는 아브라함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브라함회에 속한 분들 가운데 본인들은 청년회로 보내고 싶은 분들이 계십니다. 생각하는 것과 사는 자세가 청년들과 같습니다. 반면에 청년부 가운데 노인정에 보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완전히 팍 늙은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늙은이예요. 말투도 느리고 아무튼 저 같은 사람은 열불 터져서 볼 수 없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자세와 시각의 문제입니다. 자기 인생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 내 인생을 어떤 자세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각과 자세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항상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의 시각은 항상 긍정적인 시각으로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시각을 가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자세와 긍정적인 자세, 부정적인 시각과 긍정적인 시각,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특별히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캐더린 마샬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사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다." 무엇이든지 안 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있습니다. 어떤 제안을 하면, 기도해도 생각하지 못할 10가지 이유를 대면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언제 저런 생각을 했을까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때로 답답해서 그럼 대안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대안이 없습니다. 대안은 없지만, 하여튼 무조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각의 문제입니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는 나중 문제이고, 그 시각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삶을 한번 잘 판단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모든 것이 쓰여지고 있습니까? 드리는 마음가짐이 있으면, 그리고 실제로 드리면 그 사람은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다면 헌신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나우웬의 말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쓰지 않으면, 헌신하지 아니면 그것은 다 헛된 일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40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쌓아놓은 보화와 재물,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지을 성전을 위하여 하나도 남겨놓지 아니하고 다 바치고 갔습니다. 자기 것을 남겨 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헌신의 사각지대가 있진 않습니까? 시간은 내어 교회를 위해, 전도를 위해 일하긴 하는데, 막상 헌금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빛이 싹 사라지는 헌신의 사각지대가 없습니까? 헌금은 하는데, 시간만큼은 절대로 내 놓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해 쓰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는 헌신의 사각지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각지대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자를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펼치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순간에 처하더라도 그 순간에도 여전히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그분의 음성이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그분을 찬양하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나로 하여금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한, 진실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진실할 수 없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감정에 맡기지 말고, 진실함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아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에게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그리스도의 기적을 나타내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고, 선생님만 만나며 사람들이 변하는데 그 놀라운 능력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프랜시스가 대답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느 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 구석에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가장 미련한 한 사람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슴하시기를 '그래 저 사람이다. 저를 통해서 나의 강함과 나의 지혜로움과 나의 능력을 나타내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이유의 전부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을 찾으실 때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눈에 발견되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존귀하게 쓰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행복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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