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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 (시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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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 (시 16:1~11)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이 시편의 표제는 ‘다윗의 믹담’입니다. 표제는 시를 어떻게 해석하거나, 어떻게 노래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지은 시’(3편), ‘현악에 맞추어서’(4편)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시 표제 중에는 해석이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이 ‘믹담’이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이 믹담을 번역하기를 “황금과 같은 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정말 이 시편 16편이 황금과 같은 시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2절의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의 대표적인 고백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시편 23편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깊은 고백은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이 고백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 밖에는 나의 행복이 없습니다.”하는 고백과 같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고백은 주인과 종의 관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순종하고 따르며 철저한 보호가 있지만 관계가 일방적입니다. 그러나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는 말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단지 당신의 명령이기 때문이거나, 당신이 나에게 어떤 축복을 허락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이 좋아서라는 고백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제1조는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두 번째 구절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따르거나 인간의 당연한 의무니까 따른다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습니까?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나의 행복이기 때문에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봉사하고 기도하는 이유는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나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마르퀴스 드렌티라는 기도의 대가가 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사환 아이에게 “30분이 지나면 나를 불러 달라”고 말하고는 골방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환 아이가 30분이 되어 그를 부르러 갔지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성스럽게 보여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저하다 그만 3시간 반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할 수 없어 마르퀴스 드렌티에게 신호를 했습니다. 그때 그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벌써 30분이 다 되었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30분 기도하라면 몸을 비틀고 야단입니다. 의무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즐거워지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즐거워지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읽는 것이 사랑하는 애인의 편지를 읽고 또 읽는 것처럼 즐거운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을 보십시오. 9절입니다.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11절입니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기쁨이 충만하고 즐거움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시인은 지금 쫓기는 형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이 그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 라면 전혀 두렵지 않다는 고백입니다.

공부도 즐거워야 합니다. 무슨 자격증을 따는 데만 목표를 두며 참 힘듭니다. 물론 그것이 목표이지만 그러나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즐거워야 능률도 오르고 재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 무언가 지적으로 알려고 분석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그 일이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높은 경지는 그 일이 즐거워서 하는 것입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단지 나의 의지가 그쪽으로 향한다는 정도라면 즐긴다는 것은 그 일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 단계입니다. 안다 좋아한다 즐긴다는 그 몰입의 정도가 더 깊어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즐거우면 말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이처럼 놀이의 경지에 들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워서 하는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즐거워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이곳에 달려오는 시간이 너무 길어 아쉬울 정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헌금을 하고, 봉사를 하고, 남들이 다 쉬는 주일에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수고한다고 누가 알아줍니까? 아니면 어떤 보상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두려워서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즐거워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일이 즐겁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도 일을 하실 때는 즐거움으로 일하십니다. 창조의 6일간을 보세요. 하나님은 하루 일을 마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렇게 즐거워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즐겁지 않다면 우리는 그 일을 멈추고 즐거움의 은혜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일이 즐거워야 거기서 보람이 나오고 창의력이 나와서 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 하는 일이 어떻습니까? 하면 “네 즐겁습니다.”하고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은 나는 주님 외에 다른 것에서 기쁨을 찾지 않겠습니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주님이 주시는 축복에 더 관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베푸신 기적, 물질적인 풍요, 건강, 자녀의 축복 등이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존재인지라 이것들이 주어지고 보여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신앙이 평생토록 지속된다면 그것은 주님을 가슴 아프게 만들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나는 아빠만 있으면 돼, 나는 아빠가 좋아” 이렇게 되어야지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빠의 손에 어떤 선물을 들고 있는가만 살핀다면 아버지의 마음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얘가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주는 선물을 사랑하는지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정말 현명한 아이라면 아빠 자체를 좋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즐거워서 더 한 선물도 줄 것입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결혼 할 때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따집니다. 외모도 보고, 가문도 보고, 성격이나 직장도 봅니다. 그러나 일단 결혼 하고 난 다음에는 이런 것들을 잊어야 합니다. 이제는 배우자 자체가 좋아져야 합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가 어떤 능력이 있든지 없든지 그 사람 자체만을 좋아할 때 그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매일 남편의 월급이나 따지고 아니면 아내의 솜씨만 따진다면 그 가정은 불행해지고 맙니다. “당신밖에는 내게 복이 없나이다” 하고 고백하는 부부야말로 영원히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부부라 할 것입니다

자동차 왕 포드는 네 바퀴로 굴러가는 자동차를 처음 만들기까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포드를 지켜주었던 것은 그의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믿어 주었고 “당신의 꿈은 꼭 이루어질 것예요”하며 격려하였습니다. 이런 아내의 내조 덕분에 자동차 왕의 자리에까지 오른 포드에게 기자들이 훗날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포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 아내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상관 없소.”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향하여 “나는 무엇이 되어도 좋습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해도 좋습니다. 다만 임마누엘 주님께서만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주님만을 사랑하는 성도를 주님은 또한 사랑하십니다. 3절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3) 이 말은 ‘너는 내 자랑이야’ ‘너는 내 행복이야’는 하나님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존귀합니다. 존귀함의 근거는 내 안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잘 나서가 아닙니다. 우주의 왕이시고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즐거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소식입니다. 우리는 마치 어린 아기와 같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무능합니다. 우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아기는 존귀합니다. 그 아버지의 눈에는 그 누구보다도 더 존귀합니다. 아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버지의 입에는 저절로 기쁨이 솟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며 잠잠히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이 그려집니까? 그러므로 스스로를 비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시는데 자기를 비하합니까? 우리는 충분히 존경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아낌없는 사랑을 부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존경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주님께서 그 영혼뿐만 아니라 그 육체까지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을 그렇게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9,10)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후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며 전한 말씀입니다(행2:27).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육체를 음부에 버려두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장차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잠들자마자 천국으로 낚아채듯 취해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조금이라도 상하는 것을 누가 지켜보고 싶겠습니까? 

줄로 재어준 아름다운 구역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또한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5절과 6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이 5절과 6절을 표준새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 주님,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입니다. 주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나의 운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땅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실상 시인이 물려받은 땅은 메마른 땅이요, 돌멩이 투성이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는 일은 위험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며 비난을 받기 쉬운 일일는지 모릅니다. 그가 해쳐나가야 할 운명은 거칠고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그런 고단한 삶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요, 그 분이 허락하신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분이 줄로 일일이 재어서 나에게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아름다운 구역이라고 고백을 하지만 사실 이스라엘 땅은 그렇게 아름다운 땅이 아닙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지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지도에서 녹색으로 칠해진 곳은 평야지대이고 고동색이 짙은 곳은 산악지대입니다. 우리나라도 70%가 낮은 산지인지라 연한 고동색 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은 정말 볼품없는 곳입니다. 이곳은 해발 800m가 넘는 산악지형입니다. 물도 많지 않고 조금만 벗어나면 유대 광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열 가지 귀중한 것들을 이 땅에 숨겨 놓았는데 그 중 9가지를 예루살렘에 숨겨 놓았다고 자랑합니다. 이스라엘 땅 또한 산을 표시하는 고동색이거나 사막을 의미하는 연한 노랑색이 많습니다. 해안 가에 긴 띠처럼 녹색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곳도 강력한 블레셋이 진치고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자기가 받은 구역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2절입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나의 주는 ‘아도나이’입니다. 우리는 그의 종일 뿐입니다. 종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기름진 밭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더 많은 일을 하라고 그곳에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돌짝밭을 맡았습니까? 주님이 어려운 땅이지만 우리로 개간해 보라고 그곳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받은 복이 내 복인냥 자랑하거나 실망하거나 합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이 일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맡겨진 일이나 운명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신앙을 기업 신앙 곧 ‘나할라’ 신앙이라고 합니다. 6절의 ‘기업’이 곧 ‘나할라’입니다. 나할라는 유업이라는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며 분배받은 땅을 말합니다. 이들은 이 땅을 지키고 이 땅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아합 시대에 나봇이란 사람은 나할라 신앙이 얼마나 철저히 지켜졌는지 잘 보여 줍니다. 아합 왕의 궁 옆에 나봇의 포도원이 있습니다. 아합왕은 그 포도원이 탐나 나봇에게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겠으니 그 땅을 팔라고 합니다. 그때 나봇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21:3) 아합은 나할라 신앙이 어떤 것이지를 알기에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페니키아 출신의 왕비였던 이세벨은 왕의 이럼 모습을 비웃으며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땅을 빼앗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때문에 아합 가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피를 개가 핥는 저주를 받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땅이나 운명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기쁨의 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피하여 자꾸 다른 데로만 가려는 사람입니다.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데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까지 우리는 주어진 여건과 형편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한 번 그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줄 자를 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일이 땅을 재고 선을 긋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땅이 주어졌습니다. 교회를 이곳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제 호주머니에는 항상 줄자가 있었습니다. 높이를 재고 길이를 재었습니다. 제가 비록 미숙하지만 유아실 방을 이 크기로 내고 본당은 어느 정도 규모로 하고 제 머리 속에서 하나하나 계산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모두 제 계산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무의미한 공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내려 보내실 때 우리 인생의 길이와 깊이와 넓이를 다 재어서 보냈습니다. 우리는 공간이 좁아 어쩔 수 없이 이 정도로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정확한 계산 속에서 우리를 이 땅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는 이 정도 시간까지는 고생해야 돼. 그 시간은 네가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고 스스로 연단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야. 이제 정신없이 일하게 될 날이 되면 그때는 이 날이 오히려 즐거울 거야.’ 요셉도 모든 형제들의 으뜸이 되고 총리에 오르는 절 받는 꿈을 받았지만 그 일을 이루기까지 오랜 세월 인내해야 했습니다. 형제들에게 버림 받았지만 그것은 더 큰 땅 애굽으로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인정을 받아 새로운 인생을 펼쳐보려는 순간 그 아내의 모함 때문에 억울한 옥살이를 합니다. 옥살이 중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풀어줌으로써 놓여날 기회를 얻었지만 그들이 그 은혜를 망각함으로 좌절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고 적절한 때가 되도록 기다리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때가 되매 요셉은 유능한 총리로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모든 때와 방법이 하나님의 엄밀한 줄자에 의해서 계산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이 말씀은 또한 저에게 년초에 저에게 주셨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성전터를 구하고 있을 때 신기하게도 이 말씀이 저에게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곳으로 인도하실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곳이 아름다운 곳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 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왔다갔다 하고 사람들이 구경 오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드디어 사람 사는 곳에 왔다는 느낌이 듭니다. 십자가를 세우고 간판을 세우고 여러 시설을 하면서 주위 분들과 다투기도 하면서 마음이 상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로소 세상에 내려온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가 잘된다는 것입니다.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기도의 즐거움이 있고 기도의 사모함이 생깁니다. 함께 기도해도 서로 어울림이 있습니다. 공간 구조 상 그런 것인가 생각했는데 어떤 분이 우리 공동체가 그동안 기도가 쌓여서 그렇다고 깨우쳐주셨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 인생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곳 또한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주셨던 그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을 감당하는 곳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루살렘은 황량한 곳이지만 그곳을 하나님 주신 기업으로 알고 사랑하자 예루살렘은 이제 세계의 영적인 수도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척박한 땅이었지만 아름다운 기업으로 알고 땀을 쏟자 이제는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막을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었습니다. 성지순례 하시는 분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이집트가 이제는 버려진 땅처럼 되었고 이스라엘은 풍요로운 땅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는 허름한 집도 많고 음식도 잣 맞지 않지만 이스라엘에는 고급주택도 많고 먹을 것도 많습니다. 아름다운 기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곳을 아름다운 기업으로 받을 때 그곳이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우편에 계시니

여러분 어떤 일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 입니다. 우리 곁에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8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여호와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다고 합니다. 그 결과 어떻습니까?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반대로 내가 요동하고 있으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옆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 때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니까 거센 풍랑에 고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하시니 광풍이 멎고 소원의 항구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바다 위를 걷다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거친 파도를 바라보니 그만 빠져 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요동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부지런히 말씀을 보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이유가 또 어디 있습니까? 서로 격려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우리는 요동치 않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없고, 세상과 내 능력만 보일 때 우리는 흔들리고 맙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많은 열매가 주어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시인은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로 달려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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