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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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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9)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평화 없는 세상

각 나라에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인사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 나라의 과거의 모습이나 생각을 엿볼 수 있
습니다. 우리 나라 인사는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진지 자셨습니까?” 였습니다. 그만큼 먹을 것이 풍족하
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안녕하십니까?”입니다. 밤새도록 별일 없이 몸이나 건강이나 사업이나 
두루 평안한지를 묻습니다. 서양의 인사는 ‘굿모닝’이나 ‘구텐 탁’입니다. 마치 창조의 아침을 시작하듯 
좋은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인사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인사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사말입니다. 샬롬은 한글 
성경에서 평화, 화평, 평안, 평강으로 번역됩니다. 다양한 번역만큼 샬롬의 뜻도 다의적입니다. 전쟁 없
는 평화가 샬롬이고, 인간과 인간 사이가 화평한 것도 샬롬이고, 육체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또한 육신의 
샬롬이고,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이 없는 평화의 상태가 곧 정신적 샬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만큼 
어려움을 많이 겪고 안전하지 못한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살렘’은 ‘샬롬’과 같은 단어
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10가지의 아름다움을 이 땅에 심어 놓았는데 그 중 9가지가 예루살렘에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도시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비운의 성이었습니다. 지난 3천 년간에 걸
쳐 20회 이상 주인이 바뀌었고, 성벽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재건되었던 것만도 10번이나 되었습니다. 지
금도 이곳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성지로 항상 긴장감이 돌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화평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그 본 뜻은 마태가 유대의 
풍습에 능통하고.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의 샬롬과 가장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화평은 평화, 평강, 평안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평강, 평안하면 개인적이며 우리 몸의 건
강이나 마음의 안정이 연상됩니다. 평화라고 하면 보다 넓고 사회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정의와 안정
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화평에는 이 모든 뜻들이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 부릅니다. 하나님
의 자녀는 곧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 팔복의 일곱 번째 말씀에서는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화평케 하
는 자가 복이 있는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뒤로부터 해석하면 하나
님의 아들들은 곧 평화의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저는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치가 바로 이 평
화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그러합니다. 7,80년대 가장 중요한 가치가 인권, 민주, 정의였
다면 이제는 평화가 더 소중한 시대입니다. 한국 사회는 자기 권리주장으로 가득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큰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분노와 화로 끓고 있습니다. 전에는 정의를 이
루기 위해서 평화를 희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전쟁을 하는 이유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평화는 그 자체가 절대 목표이고, 평화를 이루는 길도 평화의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화평케 하는 자’라는 원어는 ‘에이레네 +포이오스’라고 하여 ‘평화’와 ‘만들다’라는 두 동사로 구성된 복
합어입니다. 곧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는 단지 평화를 사랑하
거나 인격적으로 평화스러운 품성을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는 자입니다. 스
스로 갈등을 조정하고, 자기의 평화를 통해 이웃을 평화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모범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평
화의 사람, 평화를 만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죄 때문에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원수 관계였습
니다. 그런데 이 원수 관계를 예수님은 십자가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말씀에서는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
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신과 인
간 사이의 원수 된 관계를 화해시킨 평화의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신과 인간을 화해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하나 되게 하셨습
니다. 에베소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
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
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
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
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2:11-16)

분열과 갈등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 신과 인간의 평
화가 깨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였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도 깨어졌습니
다. 서로 잘못을 상대방에게 미루고 급기야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이는 살인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자연과의 화목도 깨어졌습니다. 인간은 땅을 착취하고 정복하는 대상으로 삼았고, 땅은 인간에
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인간을 수고하고 괴롭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처럼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평화가 이루어지는 곳이 곧 하
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갈라지고 모든 갈등하는 사람들을 온전히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
다. 우리도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배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화목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팔복 말씀이 있는 마태복음 5장 23절과 2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물
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
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간에 화목, 곧 평화가 더 중요하다는 말
씀입니다.
마더 바실리아는 그의 기도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더라도 화평을 택하라 그리
하면 네가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이다. 만약 네가 비판하는 자리에 서 있다면 하나님나라를 건축할 수 없
고 오히려 이를 파괴하느니라”

한국 사회에 평화 만들기

오늘날의 한국사회처럼 평화가 소중하고 그리운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갈등이 심하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갈등하면 남북 간의 체제 갈등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내부가 갈등 투성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영호남의 지역 갈등, 노동자와 사용자의 노사갈등, 젊은 세대와 어른 세대의 세대 갈등, 이
제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과 가치관 충돌로 불안하고 불편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강남과 비강남의 갈등, 
수도권과 지방의 갈등도 심각합니다.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고 나면 오히려 화가 납니다. 그 안에는 진실
과 따뜻함이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비방만 살아 있습니다. 쓰레기장 하나만 움직이는데도 지역간에 난
리가 납니다. 조금도 양보가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화가 나 있는 것 같아요.

더 큰 문제는 교회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교회도 한 쪽에 쏠려 있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명백히 신앙적이고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갈등의 축에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양쪽 주장에 다 타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교인들 내부에서도 정치성향에 따라 양분되기 
때문에 교회가 한쪽 편만 지지하거나 손을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그들을 화해시키는 중재자
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평화입니다. 세대 간에, 지역 간에, 이념 간에 골
을 메꾸고 그들을 화해시킬 수 있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화해 시키되 “당신들은 화목하시오” 이렇게 외친다고 해서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
상을 비판하고 판단하기보다 교회 안에서 이런 갈등들을 없애고 서로 평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먼저 평화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 구성원인 한 사
람 한 사람이 평화의 사도가 되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할 때 한국 사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 스스로가 평화의 사도가 되려는 노력들을 포기하거나, 아예 문제의식도 없습니
다. 여러분은 현재 한국사회의 여러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고 있을 것입
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얼마만큼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단순히 자기 이익을 좇아 판단하
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이익이라는 것은 자녀 교육문제라거나 집값이 올라 갈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의 
문제이겠지요. 그래서는 한국사회의 소망이 없습니다.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평화의 사람이 되
려면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이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
습니다.

평화의 사람은 자기 것을 먼저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을 죽여야 하고, 자기 것 손해 볼 각오
를 해야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한국사회도 먼저 희생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희생하되 먼저 가진 사람
이 희생해야 하고, 기득권층이 희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프랑스어 로 “귀족의 의무”라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많이 
가진 만큼, 높은 자리에 있는 만큼 희생과 의무를 더 많이 솔선해서 해야 된다, 도덕적 의식과 공공의식
이 뛰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존경받는 부자요, 상류층이 됩니다. 옛날 로마시대에는 전쟁이 일
어나면 귀족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었고, 실제 희생도 상류층과 그 자녀들이 많이 하였습니다. 실제로 제
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 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기도 하였습니
다. 이번에는 왕실 서열 3위인 해리 왕자가 위험한 아프간에서 근무하는 모습이 방영되어 큰 방향을 일
으키기도 했습니다. 6·25 한국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습니다. 최근에 미국 100대 부자들이 상속세 인하 반대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습니다. 정당
하지 못한 부의 대물림은 사회를 갈등으로 몰아가고 자녀들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충실한 상류층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는 지금 강남에 살고 있
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강남은 부러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존경의 대상은 아닙니다. 노블레스 오
블리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에서 “Clean 강남”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
한 것은 “존경받는 강남” 운동이라 생각합니다. 부자나 상류층은 물질이나 지위가 높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의 도덕성과 공공의식, 희생, 곧 인격이 함께 할 때 존경받는 부자가 됩니다. 이런 존경
받는 부자가 많이 나와야 한국사회가 평화로와집니다.

주역에 보면 가장 길하고 이상적인 괘가 하늘을 나타내는 건이 밑에 있고 땅을 나타내는 곤이 위에 있는 
괘입니다. 이 괘를 지천태 라고 하는데 그 풀이는 “상하가 화합하며 태평한 길”이라고 합니다. 왜 태평합
니까? 분명 형상으로 보면 하늘이 아래 있고 땅이 위에 있는 거꾸로 된 형상입니다. 이는 하늘의 기는 위
로 자꾸 오르려는 성질이 있고, 반면에 땅은 자꾸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
로 조화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 있으면 이 둘은 점점 더 멀어질 뿐
입니다. 만나지 못합니다.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이 어울려야 사계절이 생기는
데 이는 한쪽으로 치우친 형상입니다.

지천태 괘는 사회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모습입니다. 높고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비우고 낮아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은 높여주고 대우하고 길
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울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성이요 나눔이요, 자기희생입니
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한국사회가 자꾸 시끄러워지고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평화는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희생하고 자기를 부인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 곧 노블레스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됨
의 고귀함은 오블리주, 의무, 곧 자녀다운 삶을 살 때 이루어집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서는 평화를 이루
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 곧 고귀한 사람이라 존경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국사회나 한국교회에서는 이렇게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평화는 외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부터 자기 생각을 비우고, 자기를 희생하는 그곳에서 평화는 이루어
집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부터 이런 평화의 운동이 일어난다면 한국사회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
람들이 우리 교회를 향하여 과연 하나님의 자녀들이구나 하고 칭찬을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평화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평화는 어떻게 만드나?

평화는 평화를 통해서만 만듭니다. 가장 어리석은 말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는 말인 것 같습니
다. 전쟁은 그 목적이 무엇이 되었든지 악입니다. 희생의 대가가 너무 큽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며 우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이렇게 탄식하셨
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
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19:41-42)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화를 얻기 위해 로마에 무력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유도 자신들의 방식과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
했던 메시야는 군마를 타고 입성하며 모든 원수를 한 칼에 물리지는 정치적 메시야 였습니다. 그러나 주
님의 길은 작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겸손의 길이었으며 십자가에서 죽는 자기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가복음 19장 43절과 44절 말씀입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
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AD 70년
경에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대가 로마를 대항해 독립투쟁을 하다 실패하여 수십만이 죽고 말
았습니다. 이후 일어난 독립투쟁에서도 무려 50만 명이 학살을 당하고 맙니다. 참 세상 일이 이렇습니
다. 평화를 위한 투쟁이 결국은 가장 반평화의 길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을 좇아서 자기 희생과 십자가의 길을 갔던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결
국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로마의 황제 줄리앙이 죽음을 맞으며 최후로 고백했던 말은 “갈릴리인
들이여 그대가 정복하였도다.”입니다. 평화의 길은 결코 패배의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아십니까?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이 최고의 선인 
이유는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물
은 항상 낮은 곳으로 갑니다. 산이 있으면 멀리 돌아갑니다. 바위가 있으면 피해갑니다. 웅덩이가 있으
면 다 채워지기를 기다렸다 갑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다에 이릅니다. 세상에 바다처럼 크고 위용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물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
다.

우리가 걸어야할 평화의 길이 마치 물과 같다 생각합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자기를 희생하며 나아갈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평화를 이루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주님께서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
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 고 말씀하십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평화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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