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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독교신앙 ABC]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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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행 3:1~10)

        <우리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자> 

        공부를 할 때 기초가 중요합니다. 운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집을 지을 때에 기초공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합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수십 층의 건물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기초가 참 중요합니다. 저는 앞으로 3주 동안 기독교 신앙의 기초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미 모태 신앙이고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 해왔기 때문에 적어도 기초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분들도 잘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바른 기초 위에 서있는가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시길 바랍니다. 

        기독교신앙의 기초를 다지고 확인하는 의미로 앞으로 3주간에 걸쳐서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첫째, 왜 하필이면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둘째, 왜 하고 많은 종교기관들 가운데 꼭 교회에 다녀야 할까요? 셋째,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까요? 여러분은 앞으로 저와 함께 이와 같이 본질적인 질문들을 놓고 함께 씨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일 먼저 왜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과 수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왜 하필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마음속으로 한 번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서 나의 자발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기독교 신자가 된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예수 믿으신 분들도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예수 잘 믿는 친구 따라 한두 번 나오다 보니까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막연한 두려움과 외로움 때문에 교회에 나와서 위로를 받으려고 하다가 예수를 믿은 분들도 있습니다. 

        아마 사람마다 동기와 사연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를 믿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은 것은 참 잘한 일이며 최고의 선택임이 분명한데 도대체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세요! 

        <예수를 가진 사람들과 못 가진 사람> 

        여러분, 예수를 왜 믿어야 할까요? 우리는 그 가장 좋은 대답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예수를 가진 사람들과 아직 못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예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를 못 가진 사람이 예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함께 예수를 믿고 가진 이야기입니다. 

        먼저 예수를 가진 사람들을 잘 살펴보세요. 베드로와 요한의 행동을 주목해야합니다. 두 사람은 제 구 시, 즉 우리 시간으로 하면 오후 세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살았던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은 하루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이른바 정시기도라는 것이지요. 아침 아홉 시, 오후 세 시, 그리고 해질 무렵에 기도했습니다. 

        예수를 가진 사람들은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규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지혜와 능력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가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데 예수 없이 사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남자였지요. 

        2절을 보세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여기 나면서부터 못 걷는 이는 아직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못 걷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간신히 살 수 있다는 사실, 이 보다 더 불행한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이 사람이 의존한다는 사실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움직이는 것을 자기 맘대로 못합니다. 그래서 성전 문 앞에 올 때에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떠메고 왔던 것이지요. 둘째, 구걸을 해야지만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서러운데 구걸을 해야지만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불행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바로 그 날도 그 남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얻기 위해 성전 문 곁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남자는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형편을 예수 없는 사람의 일반적인 형편으로써 놓고 영적인 해석을 해봅시다. 육적인 해석이 아니라 영적인 해석입니다.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상징적인 해석입니다. 이 사나이는 불행합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떳떳하게 일하지 못하고 구걸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의 불행은 다름 아닌 의존성에 있는 것입니다. 의존성에 있다는 말은 자유함이 없다는 말이지요! 자기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는데 구걸을 해야 합니다. 철저히 의존해 있습니다. 예수가 없을 때 우리는 무엇인가에 의존합니다.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돈에 의지하고 명예와 권력에 의지하고 약물에 의지하고 술과 담배에 의지합니다. 여기에 의지해서 행복을 찾지만 영 행복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자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힘센 사슬에 묶여 있어서 자유와 평안이 없습니다! 

        그저께 참 오래 만에 「추격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어린이 실종 사건과 유사한 내용이었습니다. 살인마 유영철 사건을 모델로 한 영화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살지만 이렇게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는 악마가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이 사회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섞여 삽니다.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들,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 오락과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자유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거기에 노예가 되어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폭력도 날로 심해집니다. 자살율도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계층 간의 갈등과 반목도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유능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뽑는다고 해결될까요? 더욱더 가혹한 형법을 만든다고 근절될 수 있을까요? 더 많은 경찰력을 확보한다고 해서 사라질까요? 더 많은 변호사들, 검사들, 판사들을 배출한다고 해서 없어질까요? 더 많은 돈을 쏟아 붓는다고 달라질까요?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들이기 이전에 영적인 문제들입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일으키는 영적인 문제들이기 때문에(엡 2: 2), 반드시 그 영적인 문제들부터 선결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오늘 하루도 먹고살고자 구걸을 하기 위하여 성전 문 곁에 앉아 있습니다. 참 흥미로운 것은 그 문의 이름입니다. 미문(美門), ‘아름다운 문’이지요. 이 남자는 아름다운 문 곁에 날마다 앉아있습니다. 성전 문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데 그 옆에 너무도 불행한 사람이 날마다 앉아 있습니다. 이 보다 더 오늘의 교회와 예수 없는 이들의 형편을 적나라하게 대조해주는 그림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아름답기 짝이 없는 교회 건물 주변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구하는 예수 없는 이들이 즐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3절에 보니까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합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생계를 위해서 도움을 청한 것이지요. 아직 예수 없이 사는 이 남자를 향해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떻게 합니까? 4-6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여기서 중요한 말이 ‘주목했다’는 말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듯이 무심히 쳐다봤다는 말이 아니지요. 영어 성경 NRSV를 보면 “Peter looked intently at him”, 즉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는 말이지요. 오늘 우리도 그렇지요. 지하도나 길가에서 구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스쳐지나갑니다. 힐끗 쳐다보기만 한 채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직 예수 없는 앉은뱅이의 영혼의 소리를 듣고서는 주목해서 봅니다. 구걸하는 소리를 듣되 건성으로 듣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남자를 향한 사랑과 자비심이 충만해서 듣습니다. 예수 없는 그의 불행한 형편을 주목해서 봅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이 많은 부자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예수 없는 영혼은 형편없이 빈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기와 명예와 권세를 누리는 이들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화려한 외양과는 달리 그 내면은 형편없이 누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떠나서 예수 없는 모든 이들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봐야 합니다! 

        “우리를 보라!”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듣고 그 못 걷는 사람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봅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무엇인가를 얻을까 해서이지요. 먹을 것이나 돈을 구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 베드로가 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이 말씀이야말로 오늘 제 설교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은과 금보다 훨씬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남자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돈만 얻는 것으로 그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냥 하루 먹고 하루 사는데 그칩니다. 양식의 문제만 해결될 뿐 그의 영혼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 이튿날 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미문 곁으로 나와야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삶을 버릴 수 없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불행한 삶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은과 금으로는 그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혹시 은과 금으로 몇 주일, 몇 달 동안 미문 곁에 가지 않고 잠깐 편안히 지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돈 떨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은과 금은 앉은뱅이를 진실로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은과 금, 즉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은과 금은 우리로 하여금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편안은 주지만 평안은 주지 못합니다. 안락은 주지만 복락은 주지 못합니다. 은과 금이 앉은뱅이를 잠시 동안 부자가 되게 만들고 편하게 할 수는 있어도 기뻐 뛰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미문 곁으로 돌아가서 또 다시 구걸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은과 금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으로 천국을 살 수 없습니다.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자유를 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를 가진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이 없습니다. 부자가 아닙니다. 명예와 권력도 없습니다. 유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돈이나 권력으로 비교도 할 수 없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이 없다고 해서 불행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있기에 행복한 것이지요! 은과 금은 잠시 동안 앉은뱅이를 편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또 다시 그는 비참한 나락에 빠집니다. 자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걷고 기뻐 뛰며 찬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지 은과 금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 없는 사람을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집니다. 8절 말씀을 보세요. 그랬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서 걷습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그가 자유함을 얻은 것이지요! 그는 이제 걸을 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또 다시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 일할 수 있습니다. 

        그가 찾아올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구걸하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할 성소(聖所)입니다! 만일 그가 은과 금을 얻었더라면 성전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구걸의 장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얻은 뒤 성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성소가 된 것입니다. 성전은 비로소 그에게 세워진 본래의 목적을 찾게 된 것이지요! 더욱이 이제 그가 찾는 성전 미문은 이름 그대로 진짜 아름다운 문이 되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그의 육신과 영혼을 다 고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인치유의 이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은과 금을 얻었을 경우 혹시 용하다는 의사를 만나 돈으로 병을 고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영혼은 고치지 못합니다.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육신과 영혼을 다 고칠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예수를 믿는다> 

        다시 핵심으로 돌아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은과 금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은과 금이 아닙니다. 세상에 길 잃고 헤매는 영혼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요? 은과 금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오늘 인류가 당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결정적인 해답이며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공허한 마음이 채워집니다. 우리 영혼의 어두운 부분이 밝아집니다. 이 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고후 5: 17). 

        또 묻습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할까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진짜로 예수를 가진 이들은 세상에 은과 금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이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존귀하기 때문이지요. 은과 금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천국과는 비교가 안 될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는 천국을 살 수 없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는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은과 금이 있어서 그것을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주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과 금보다 훨씬 더 존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얻었을 때 그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걸을 수 있었습니다.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구걸하기 찾아왔던 성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기 위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항상 어두운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던 불행을 청산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지요! 

        여러분, 왜 예수를 믿으셨나요? 옳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이지요. 은과 금이 가져다 줄 수 없는, 훨씬 더 귀한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으세요! 요 1: 12절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나라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세상의 은과 금이 부럽지 않습니다. 그까짓 은금으로 살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소유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다시 한 번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다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차지합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행복을 얻습니다. 예수 없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예수를 가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 그들이 누리던 기쁨과 감격과 행복에 동참하게 된 것처럼 여러분 모두도 그렇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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