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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은 구원하되 자신은 구하지 않으시다 (마 27: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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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오늘 말씀은 “남은 구원하되 자신은 구하지 않으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면서도 자신은 구하지 않으셨고 또한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정황과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42절에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라고 한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희롱하는 말인데, 체신없는 표현이고 이성 잃은 그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동안 예수님 때문에 마음고생이 너무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말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불신자들의 입을 통하여도 진리를 드러내신다는 좋은 예증입니다. 42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구원자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며 은혜받기 원합니다. 

1.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신 예수님

42절=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 

이 말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들은 갈보리 언덕 위,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진 곳에서 십자가에 달려 신음하고 있는 죄수들, 그 중 특히 가운데 달린 분을 향하여 증오하며 조롱하는 마음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42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본절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예수님의 대적자들도 예수님의 사역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저가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였도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모든 사람, 특히 그의 원수들에 의하여서도 인정받은 사역입니다. 즉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을 스스로 희생하셔서 인류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원수들은 자기도 모르게 복음의 진수(眞髓)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주님의 구원은 지금 온 인류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사역들을 보십시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행적들을 보면 모두가 구원과 관련된 사역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수십, 수백의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과 연약한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에 많은 부분이 치유(治癒) 사역입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셨고, 나병환자들을 고치셨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주님은 혈루증 여인의 오랜 병을 고치셨고, 청각장애 아이와 열병 환자, 그리고 각종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치유하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죽은 자를 살리심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야이로의 딸은 주님의 ‘달리다굼’ 한마디에 시체 되어 누워있던 자리에서 다시 살아 일어났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장례행렬은 예수님 일행의 생명의 행렬과 마주치자 울음을 그치고 기쁨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주님의 한 마디에 아들은 살아 일어났고, 살아난 아들은 불쌍한 어머니에게 최상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명령하자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시신이 살아 일어나 무덤 밖으로 어기적거리며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그곳에 있던 사람들 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놀랍고 또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주님의 능력으로 모두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은 인류를 죄와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는 세상의 각종 탐욕 속에 묻혀 살던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삭개오의 집에서 주님은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도다.”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 위의 한편 강도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옆에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형수로 죽어가는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올렸고, 놀랍게도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몹쓸 인간인 십자가 강도에게도 구원을 선물하신 예수님은 한평생 죄 가운데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용납하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주님은 인류의 구원자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 모두 진심으로 구원자 예수님께 감사하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2. 자기를 구원할 수 없으신 예수님 

42절 =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이면서 정작 자기를 구원하실 수는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조롱하는 말 속에는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무리들은 저항 한번 하지 않고 잡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껏 비웃으며 조롱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한번 보기 원하는 호기심도 있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들은 예수님의 무능력을 비웃었습니다. “그토록 능력 많은 당신, 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가?”

여기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라고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이 무능한 존재로 비취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자원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신 그 큰 능력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원하여 십자가에 달려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본절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으니...” 

주님은 자신 안에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아무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자신이 가지신 능력과 권세로 자기를 해하려고 하는 원수들의 계획을 쉽게 좌절시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대적자들의 손을 얼마든지 무력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충분한 힘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참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내어주셨고, 자원하여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죄물이 되셨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원수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에선 맞는 말입니다. 인류의 구원자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을 반드시 감내(堪耐)하셔야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권능을 발휘해서 원수들을 제압하시고 십자가 고난을 피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을 물리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랬다면,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구하셨다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의 그 많은 예언들이 거짓이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여러 모형과 상징들, 그리고 각종 제사의 기록들이 무의미하게 됐을 것입니다. 온 세상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뻔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 앞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에 의하여 다른 사람이 구원받도록 자원하여 희생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의사에게서 암 진단을 받고는 이날부터 갑자기 난폭해졌습니다. 병실을 찾아오는 식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예사로 욕을 퍼붓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할아버지와 자주 만나는 사이인 동네 어린 꼬마가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왔습니다. 식구들은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한번 들어가서 할아버지 만나 보렴” 하고 병실에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꼬마가 20-30분 동안 만나고 나온 뒤 할아버지가 확실히 변했습니다. 태도가 갑자기 부드러워졌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도 이상해서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너 할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했니?” 
“아무 이야기도 안 했어요.” 
“그러면 도대체 할아버지랑 20-30분 동안이나 뭘 했니?” 
“저요?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더불어 껴안고 꼬마와 함께 울던 그 눈물을 통해 할아버지의 아픔이 치유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가 오해받고 배신당하여 남몰래 우는 눈물을 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범한 죄악의 치욕과 부끄러움을 이해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버려 우리를 살리신 분이십니다.

내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보혈을 쏟아 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과 수치를 인내하시면서 인류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으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주님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목말라야 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셨던 주님이 이제 자원하여 목마름의 고통 속으로 자신을 던지셨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이요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위로요 십자가는 소망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비록 원수들의 조롱의 말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옳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결코 십자가 에서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하기 위해 자원하여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 주님께 우리의 모든 감사와 사랑과 헌신과 충성을 드립시다.
 

3. 구원의 보다 깊은 의미  

42절=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 말씀 속에 복음의 진수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자기를 버려야 했습니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는 매우 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얻은 우리의 구원의 가치 또한 비할 바 없이 큽니다. 즉 주님의 십자가는 그가 겪으신 고난의 깊은 의미와 우리가 받은 구원의 가치가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라면 누구나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자원하여 십자가 고난을 받게 했을까요? 

사랑입니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가 우리의 구원 사역 위에 부어진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게 한 원동력입니다. 사랑 때문에 주님은 세상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주님은 갈보리 그 핏빛 죽음의 형장으로 묵묵히 올라가셨습니다. 과연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의 모든 이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의 미스테리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매우 비싼 댓가를 치룬 것입니다. 우리를 높이시기 위하여 예수님 스스로 낮아지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주님 스스로 정죄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를 먹이시기 위하여 주님 자신의 몸을 내어주셔야 했습니다. 주님의 몸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었습니다.  

그가 저주 받지 않고는 우리를 저주로부터 건져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나무에 달리지 않고는 우리의 죄를 짊어질 수 없었습니다. 그가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지 않고는 우리의 수치를 굴러가게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은 참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얻은 값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은 묵상하면 할수록 우리의 가슴속에서 감사를 끓어오르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비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주님을 사랑치 않을 수 없습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하나님의 사람 바울은 누구보다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또한 십자가 사랑을 최상급으로 표현했습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19세기 영국이 5대양을 누빌 때 많은 배들이 침몰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짐을 너무 많이 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Samuel Plimsoll씨가 이것을 철저히 조사 연구하여 영국 의회에서 한 개의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은 Load Line (적재한계선)이라는 법입니다. 짐을 실은 배가 물위로 올라오는 선을 긋고 그 이상은 짐을 못 싣게 하는 법입니다(이것을 Plimsoll Line이라고도 부릅니다).

그것은 생명선과 같습니다. 그 이상 실으면 배가 침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몸 바친 그리스도인도 Lord Line, 곧 주님을 섬기는 선을 그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시간과 물질과 힘을 다 쓰고 남은 것으로 십자가를 질 수는 없으며, 그럴수록 십자가는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내 짐은 가볍다”는 예수님의 말은 Lord Line을 깊숙이 내려 그어, 버릴 것을 버리는 희생이 전제된 십자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왜정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5년 동안 감옥에서 고초당하시다가 결국 순교하신 분입니다. 목사님이 순교하기 직전에 쓰신 고난의 명상록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내가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영광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대답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으리이까?"  

성도여! 이것은 죽음의 형장에서 부른 사랑의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슨 힘이 있어서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한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님께 붙잡혀 살았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강한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이었고, 천하를 바꾼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보리 십자가 주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에 대한 적의에 가득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입에서 뱉어진 말 속에 엄청난 진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신은 희생되셔야 했습니다. 사형수로 언도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분명 저주받은 자의 모습이지만, 그분이 바로 인류의 구원자이시고, 바로 나의 구주이십니다. 

우리의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이 구원의 주님께 뜨거운 감사와 최상의 찬양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을 여러분의 오이코스들에게 소개하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전적인 헌신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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