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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가 자유하게 하리라 (요 8: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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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 8장 31~36절
제목 / 진리가 자유하게 하리라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신 자유가 없었다면 에덴의 그 풍성함은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자유가 없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것도 복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모험이 될 수 있습니다. 축복으로 주신 자유이지만 하나님에게 반역하고 불순종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신 것은 자유 없는 인간은 로봇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 불순종하여 결국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구원은 빼앗긴 자유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구원의 그림을 잘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이끌어 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종 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원의 풍성함은 우리가 자유를 점점 더 확보해가는 과정에서 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한 것은 자유를 빼앗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널려 있어 마음껏 먹을 자유가 있고 TV를 켜는 것도 자유지만, 절제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자유지만, 돈의 욕심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브레이크 기능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브레이크 결함이 있다면 사고는 예견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브레이크 기능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 안에 끓어오르는 욕망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똑같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 중심에 늘 활동하고 있는 욕망은 아주 힘이 셉니다. 채워지지 않은 웅덩이로 만족을 모릅니다. 욕망의 불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태우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비극적이고 불행한 삶을 사는 이유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끌려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을 다루지 못하면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욕망은 신처럼 우리 안에서 군림하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를 무릎 꿇게 합니다. 돈을 모아서 소유하고 있지만, 사실은 내가 돈에 소유를 당한 삶을 살아갑니다. 돈을 가질 만큼 가졌기 때문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면 내가 소유한 것이 아니라 소유를 당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요즘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모두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내가 핸드폰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핸드폰이 나를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흔한 중독 현상은 노예적 삶입니다. 나쁜 줄 알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인 줄 알지만, 자신의 의지로 중단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 중독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는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그 외에도 아주 많습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지배를 받고 삽니다. 우리는 체면과 위신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과장과 허세가 많아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게 됩니다. 내용과 실속보다는 외형적인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과시 문화는 피곤한 삶을 살게 만듭니다. 이것은 모두 노예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돈이 사람을 부리고, 돈에 끌려다닙니다. 돈을 묵상하고 돈을 위해 시간을 다 바칩니다. 

종교생활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자유를 얻으려고 종교를 찾지만 진정한 자유를 얻기보다는 속박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종교가 그랬습니다. 율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옭아매어 종교 안으로 들어갈수록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36절에서 주님이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이 좋은 것과 종교적 편집증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전혀 다릅니다. 예수를 잘못 믿으면 더 피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인은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교회를 다닐수록 두려움이 오고, 무엇인가 불편하고, 행동이 속박을 당하고,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예수를 잘 믿으면, 신앙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내면세계와 관계 안에 점점 자유가 확보됩니다. 자유를 누리고 평강과 기쁨이 찾아오고 자연스러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도 귀한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이것은 복음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거짓된 것에 속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손에 쥐기만 하면 자유를 줄 것이라는 마귀의 속삭임에 속고 사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것을 가질수록 속박을 당하고 불행해집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을 때 ‘안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다’이고, 헬라어로는 ‘기노스코’입니다. 

창세기 4장 1절에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라고 했을 때 동침하다는 말이 ‘야다’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깊은 교제를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1.말씀에 대한 깊은 체험을 가진 삶입니다. 

밥에 대해서 이론으로 아는 사람과 실제로 먹어본 사람은 다릅니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큰 갈림길이 생기는 지점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내 영혼 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말씀을 지식으로 아는 것과 말씀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말씀이 내재화되면서 강력히 내 심령과 삶을 바꾸어 놓는 위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었을 때 음식물이 위장으로 들어가 소화가 되고 나중에는 혈관을 통해 영양소가 온몸으로 퍼져 힘이 나는 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먹음으로 힘을 얻는 확실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어떤 중요한 결단을 할 때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 그 말씀이 정확하게 역사하면서 내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면 용기가 생깁니다. 그냥 알고 있는 지식은 내 삶을 바꾸지 않으며, 어떤 때는 오히려 나를 더 비겁하게 만듭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으로 파고들면서 뜨거워지고, 행동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가슴에 불이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론으로 터득한다고, 내 안에 무슨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아주 생생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운동력이 있다는 것은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 안에서 활성화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밥을 먹으면 힘이 나는 것처럼 말씀에 내 영혼이 살아 움직여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 말씀에 확신을 갖게 되고 삶을 드리고 싶고, 내 삶을 묶고 있던 족쇄를 끊을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면서 내 생각과 의지를 움직이고, 내 안에 갇혀 있던 구습의 사슬들이 끊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앎은 체험적 앎이고, 내 삶에 구체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죄성으로 인해 만들어진 오랜 습관은 강력한 사슬과도 같습니다. 오래될수록 점점 더 굵어져 그것이 칭칭 감고 있는데 내 의지로는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힘보다 강력해서 어떤 굵은 밧줄도 끊게 합니다. 

어떤 분은 하루아침에 술 담배 맛이 싹 없어지기도 합니다. 중독에 빠진 것을 내 힘으로 끊을 수 없는 것은 어두운 것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어서 우리의 영과 육을 바꿀 수 있고 우리를 묶고 있는 족쇄로부터 풀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알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유입니다. 죄의 힘보다 더 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령과 영혼에 영향력을 미쳐서 모든 묶여있는 것에서 자유하기를 축원합니다. 


2.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차적인 반응은 불편함과 거부감입니다. 처음에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다 보면, 말씀대로 살면 망할 것 같습니다. 말씀과 현실이 다른 것 같고, 나를 속박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꽤 오래 한 분들인데도 말씀을 적당하게 적용을 해야지 액면 그대로 하다가는 망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지키고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의 편리대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은 변화무쌍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변함이 없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학문제를 풀 때 잘 풀리지 않으면 공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공식을 마음대로 바꾸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진리를 무시하면 처음에는 괜찮아 보이지만 반드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교통법규를 무시한다고 당장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쌓이면 어느 날 사고가 납니다. 법규가 불편하게 여겨질 때가 있지만 그래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처음에는 불편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자유와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지금 나의 상황과 맞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은 한순간의 착시 현상입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국 평안의 길이고 자유의 길입니다. 

자유란, 내가 당장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우선을 두는 삶을 말합니다. 나는 하기 싫지만,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에 내 삶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반대정신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반대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살면 손해를 입는 것은 바로 자신입니다. 미움의 감정이 일어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거짓된 메시지들은 “네가 원하는 것이면 머뭇거리지 말고 하라”고 속삭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오늘날 만연해 있는 위험한 사고방식은 ‘내가 생각하고 결정하고 내 인생을 내가 산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자아 중심적 삶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으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제사에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의 결론은 “너 좋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라”가 아닙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이것이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에서 붙들어야 할 원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자유롭지만 스스로 종이 되는 것은, 연약한 자를 생각하고 안 먹을 자유를 선택할 때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내 취향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좋고 싫고를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내가 좋고 싫다는 감정이 자신의 행동의 기준이 되면 안 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결국은 내 안에 자유가 찾아오고 평안이 주어집니다. 

우리의 삶의 기준은 오직 진리여야 합니다. 절대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불편하게 여겨지고 일시적으로는 힘들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3.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한 분에게만 매이는 삶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한 분에게만 포로가 되면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36절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것은 바울 사도가 실제로 경험한 삶입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 시대에 종은 아주 멸시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존재 가치는 그리스도로 인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그의 서신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를 외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죄인 중에서 괴수,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자 등으로 표현한 것, 자신의 과거의 수치가 드러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던 것은 사람들의 어떤 평가나 비난, 칭찬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이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왜 자유롭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이 많을까요? 

우리 안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예민하고, 인정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쌓아 돋보이려고 합니다. 명함에 문구가 길어지고, 자신의 이력들을 화려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누군가 자신을 비난하거나 인정해 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자유를 잃은 노예적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에 속한 자로서 그 안에서 자유를 얻고, 나의 나 됨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온전히 매이면 우리의 영에 자유가 찾아오고, 비교와 우열에 내 삶이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를 쓰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당함과 만족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날마다 육체의 소욕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죄와 싸우려고 하면 지게 됩니다. 죄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 죄를 이기려고 해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초점을 그리스도 안에 두면, 이깁니다. 죄를 지을까 봐 불안한 삶을 산다면 이미 반쯤 죄에 넘어간 삶입니다. 술을 먹는 사람이 술집을 지나가면서 “이기게 하소서”하면 안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삶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주일에 예배드리러 나온 것도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어디에 붙어있느냐의 싸움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가지가 할 일은 딱 하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 앞에 나아가기를 힘쓰고, 신앙생활에 애를 쓰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에 붙어있으려는 작업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고, 그리스도에게서 흘러나오는 영적 에너지를 받으면, 어느 순간 나를 붙잡고 있던 어두운 죄의 세력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나면 완전한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를 속박하고, 세상에서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나면 후회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충 한발만 담그고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지 않으면 늘 세상을 기웃거리게 됩니다. 

요즘 세상은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기가 막힌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결함이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뿌리 깊은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이 나를 사로잡으려고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아차 하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세상에 팔려나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바울은 일평생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쳤고,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복음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인데도 자신 안에 죄성, 더럽고 거짓된 본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날마다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철저하게 죄와 싸우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요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노예적 삶을 살아가는 비참한 사람들의 모습을 매일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수없이 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속박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것에 자유를 잃어버리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출처를 알 수 없는 거짓된 진리에 더 이상 속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과 욕망을 그대로 두면 위험천만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내 마음에 끌리는 대로 살 것이 아니라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내 감정이나 본능은 하기를 원하지만 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하는 훈련, 육체와 반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하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면 반드시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 선택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게 속한 삶을 사십시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이끌리며 그리스도 안에 빠지십시오. 그 안에서 만족을 구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더 많이 생각하고 묵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진리 안에서만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자유 안에서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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