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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과 밧세바 (삼하 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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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언제든지 항상 승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영적 무장과 영적 능력의 배양이 필요하다. 둘째는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넋을 놓고 있으면 생각지 않은 때에 예상치 않은 공격을 받아서 어이 없이 패배하게 된다.

다윗의 생애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있는데 곧 골리앗과 밧세바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다윗의 영적 상태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그의 삶에 큰 변화와 영향이 있었다.

골리앗과의 싸움은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었고 밧세바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은 내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었다. 외부의 적의 공격보다 내면의 정욕의 유혹이 더 무섭다. 외부의 적의 공격은 쉽게 알 수 있고 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면 되지만 내면의 정욕의 유혹은 알아채기가 쉽지 않고 또 이기기도 쉽지 않다. 

골리앗은 거인장수였고 밧세바는 아름답고 연약한 여인이었다. 또 골리앗은 다윗이 어린 소년 때에 만났고 밧세바는 원숙한 성인 때에 만났다. 그런데도 다윗은 골리앗에게는 이겼지만 밧세바를 통한 유혹에는 우습게 넘어가고 말았다.

골리앗 때에 그는 무명의 소년이었지만 밧세바 때는 왕이요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골리앗은 전장에서 맞닥뜨렸지만 밧세바는 왕궁에서 보았다. 

골리앗 때는 나라의 위기의 때였고 밧세바 때는 모든 것이 평안할 때였다. 골리앗 때는 그가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직접 나갔다가 싸워 이겼지만 밧세바 때는 부하들이 싸우러 나갔을 때에 혼자 왕궁에 남아 있다가 유혹에 넘어갔다. 성도는 열심히 일할 때는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지만, 일하지 않으면 유혹받기 쉽다.

골리앗 때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했지만 밧세바 때는 하나님을 철저히 잊어버렸다. 골리앗 때는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지만 밧세바 때는 기도의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골리앗 때는 완전히 승리했지만 밧세바 때는 철저히 패배했다. 영적 싸움은 기도로 힘을 얻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이다.

다윗은 부하들이 전쟁하러 나가 있는 동안에 궁궐에 남아 있다가 목욕하는 한 여인을 보고 그를 불러들여 죄를 짓는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충신 우리야를 전장에서 불러들이지만 실패한다. 그러자 그는 요압장군에게 우리야를위험한 상황에 내보내게 해서 죽게 한다. 그리고 밧세바를 아내로 삼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위대한 성군 다윗이, 경건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살아온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더럽고 끔찍한 죄를 지을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쉽게 다윗을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 없다. 그도 우리처럼 연약한 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도 다윗처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도 얼마든지 다윗처럼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범죄하고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말씀을 교훈 삼아서 우리는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믿음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이 사건을 우리에게 기록해서 알려주시는 것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거나 잊어버릴 때에 범죄하게 된다. 죄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죄는 내가 하나님 대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려는 것이다. 뱀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던 것처럼 사탄은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내가 하나님이 되어 마음대로 행하라고 한다.

‘다윗이 보내니’(삼하 11:1, 3, 4, 6, 27). 그는 자신이 왕이므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마음대로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또 마음대로 사람을 자기에게 보내게 하기도 한다. 그는 한 순간도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왕이 되시고 주권자가 되시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무시할 때 우리는 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빼놓고 내가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에 범죄하게 된다. 모든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죄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심하면 하나님까지도 내 맘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다윗의 이 더럽고 끔찍한 범죄는 그가 자신이 한 나라의 왕이라는 생각만 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다윗에게 보내어’(11:5, 18). 밧세바의 임신통보와 요압의 우리야가 죽었다는 보고 즉 요압이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흉계와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은 왕인 그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신’ 것이다.(12:1)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그에게 보내셔서 그의 죄를 책망하신다.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로서 행세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는 그는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그의 삶의 주인이심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즉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과 역사의 주권자이심을 그에게 확인시키신 것이었다.

죄란 우리가 하나님의 통제와 인도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모든 것을 내맘대로 하려고 할 때에 범죄하게 된다. 죄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을 내맘대로 움직이려는 것이다. 결국 죄란 언제나 똑같은 것이다. 사탄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하나님 행세를 하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누구든 언제나 죄를 짓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며 주관자이심을 날마다 고백하고 인정해야 한다. 나의 왕이신 하나님을 언제나 높이며 경배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찬송소리를 듣고 지옥이 떨리며 사탄이 물러가고 실패한다.

복음은 나 자신에게 대한 것이다.
이 다윗의 실패와 범죄는 하나님이 보내신 한 사람에 의해서 반전된다. 선지자 나단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다윗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나단의 설교는 다윗에게 설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단이 설교하듯이 말하지 않고 이야기하듯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나단이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은 이야기를 하자 다윗은 분노하면서 당장 그 부자를 벌주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그런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당연히 벌을 받아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6절) 그러자 나단은 갑자기 그에게 이렇게 외쳤다. “그 부자가 바로 당신입니다.”(7절) 당신이 바로 죽어야 할 사람입니다. 

다윗이 이 때에 나단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는 그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대한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 관한 말씀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바로 그에게 주시는 말씀이었다. 그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런 다윗 같은 마음의 자세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 한다. 설교를 들을 때에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신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고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처럼 도대체 그럴 수 있느냐고 분노하고 정죄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복음은 어떤 사회적 현상이나 상황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문화나 제도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의 문제, 사람의 현실, 사람의 고통, 사람의 실제적인 죄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바로 나의 문제, 나의 현실, 나의 죄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선포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곧 나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능력이 되고 은혜가 되고 복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보게 되고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직접 그를 지목하고 그의 죄를 지적하자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다.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13절) 다윗의 위대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그렇게 더럽고 끔찍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사용하시고 복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감추려 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책망을 그대로 다 받아들였다. 그리고 눈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했다. 시편 32편과 51편은 이때의 그의 눈물의 회개기도이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즉시 용서해 주셨다.(13절)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에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는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고 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에 돌이키지 않았다.

복음의 역설
사람들이 왜 사울처럼 자기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꾸만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려고 할까?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다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죄를 숨기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의 죄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한 마디가 구원과 은총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한 것이다. 나의 죄가 철저하게 낱낱이 드러나고 지적받고 책망받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때이다. 나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내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려고 나를 부르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다. 하나님을 떠났던 삶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다윗의 죄는 결코 작은 죄가 아니었다. 가정을 파괴하고 윤리를 거스리고 사람을 죽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런 그의 큰 죄를 덮고도 남았다. 아무리 사람의 죄가 크고 많아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어떤 죄라도 하나님께 나아오면 다 용서하시고 가려주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지은 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지은 죄에 골몰하고 거기에 매여서는 안된다. 내 죄를 깨달았으면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   

왜 내가 내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리가 은혜의 자리인가? 예수님께서 내가 있을 자리에 대신 서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죄를 지은 바로 그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 대신 잡히셨다. 내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내 대신 서주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것은 바로 내가 서 있을 자리에 대신 서신 것이다.

거기서 나 대신 정죄를 받으시고 책망을 받으시고 비난을 받으셨다. 그리고 내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내 십자가를 지시고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나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은혜와 구원을 입는다.

형벌과 징계
13, 14절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다윗이 나단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자 하나님은 즉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네가 죽지 않으리라.” 그러나 다윗이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이는 죽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는데 왜 아이가 죽는가? 용서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우리는 형벌과 징계 또는 연단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는다. 이것이 죄의 형벌이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고 죽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죄의 결과와 열매는 내가 받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습관적으로 회개하고 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고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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