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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나라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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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나라 (마 25:31-46)

강원도 홍천이라는 아주 시골에 한 어린 아이가 태어납니다.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엄마에 의해서 버림을 당합니다. 엄마는 그 아이를 키울 수가 없어서 어느 성당 대문 앞에 갖다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이 아이는 고아원에서 성장 합니다. 그의 생애는 가난과 분노로 늘 일관됩니다. 초등학교에 갔지만은 그는 납부금을 낼 수가 없어서 늘 손을 들고 벌을 서곤 합니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너의 부모를 데려 오라고 소리치면서 책망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교실을 뛰쳐나가면서 “나는 부모가 없단 말이예요!” 소리치면서 학교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느냐고 우리 부모는 어디 갔느냐고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하느냐고 그는 소리칩니다.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서울역 앞에서 구걸을 합니다. 동전 통을 하나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얼마를 모으면 서울역 앞에 있는 큰 어른 깡패들이 와서 그 돈을 다 뺏어 갑니다. 

인생은 참으로 그에게 냉정했고 또 참혹했습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는 성장을 합니다. 어느덧 청년이 됩니다. 그는 안 좋은 일에 관여 되어서 교도소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그는 무료한 생활을 보내는 데 어느 날 우연히 던져진 잡지를 하나 보게 되는데 그 잡지에 한 소년 소녀 가장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부모가 없는 한 아이가 있는데 그는 야구를 하고 싶은데 야구 선수가 되는 게 꿈인데 야구 배트를 살 돈이 없다는 거예요. 글러브를 살 돈이 없다는 거예요. 그 안타까운 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동생은 등이 굽어져서 곱추라고 애들이 놀리는데 그 동생은 꼭 가방을 하나 등에 매는 게 꿈이예요. 돈이 없어 사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안타까운 사정을 접하고 자기도 고아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기의 마지막 남은 돈을 털어서 그 아이에게 후원금을 보내줍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편지가 옵니다.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내용입니다. 

아저씨가 보내주신 돈으로 야구 배트도 사고 야구 글러브도 사고 열심히 야구를 하고 있습니다. 제 동생도 매는 가방을 샀더니 이제는 학교를 잘 다닌다고 왜? 이제는 등 굽은 게 보이지 않아서 이제는 자신 있게 너무너무 좋아서 학교를 다닌다고 감사의 편지를 받았어요. 이 청년은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는 그 편지를 붙들고 엉엉 눈물을 흘립니다. 내게 감사를 하는 사람이 다 있다니!! 그는 마음을 새롭게 먹습니다.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에 그는 자장면 배달을 해서 한 달에 70만원을 버는데 그것을 가지고 다섯 명의 결손가정 아이들을 돕습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 고아 아이들을 도와요. 7년 동안 그 일을 합니다. 그것이 미담으로 알려져서 청와대 초청을 받아서 대통령과 점심을 함께 하는 그런 영광도 맛봅니다. 

그는 늘 꿈을 꿉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더 행복하게 해줄까? 그래서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면서도 이번에 누가 고등학교 졸업을 하는데 졸업 선물로 MP3를 사줄까? 아니면 옷 한 벌을 사줄까? 뭐 이런 생각으로 늘 마냥 즐거워합니다. 또 그는 자기가 몸이 아플 때 내가 이렇게 병을 앓다가 죽으면 이 아이들에게 후원이 끊어지지 않나 그래가지고 그는 생명 보험을 듭니다. 그래서 만약에 자기가 죽으면 이 모든 보험금이 아이들에게 수혜자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까지 합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토바이를 타고 자장면을 배달하다가 그만 교통사고가 나서 생명을 잃습니다. 작년 9월에 일이었습니다. 그가 죽고 났을 때 많은 분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해서 눈물을 흘리고 애도합니다. 또 결손 가정을 돕는 일에 많은 분들이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을 영화로 만들었어요. 이 영화가 바로 「철가방 우수씨」입니다. 26년 만큼 유명하게 많은 사람이 오지 않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 영화를 보고 너무너무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 영화는 만들어질 때부터 재능 기부로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일산에 있는 어느 교회 집사님이 윤항렬 집사님이 감독인데 그분이 자기가 그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섰습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최수종씨가 자기가 우수씨 역을 맡겠다고 돈 한 푼 안 받고 재능 기부를 했습니다. 김수미 할머니가 또 역할을 맡습니다. 또 오지현이 재능 기부를 합니다. 그리고 소설가 이외수씨가 글을 씁니다. 또 김태원이라는 사람이 그 음악을 맡습니다. 이래가지고 여러 사람들이 재능 기부를 해서 아름다운 영화가 한 편 등장합니다. 그것이 지금 「철가방 우수씨」입니다. 

그 영화에 보면 그 우수씨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을 때 그의 방을 살던 방을 찾아 갔는데 그는 고시원에 1.5평짜리 되는 방에 삽니다. 창문도 없는 캄캄한 방에... 그런데 그의 책상 위에는 성경책이 펴져 있고 성경책에는 시편 23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는 하나님을 내 목자로 삼고 살았던 아주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던 그런 인물입니다. 그는 정말 우리에게 아무리 가난해도 남을 도울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그는 나눔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경험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일이죠. 

저는 여러분들도 그 영화를 꼭 봤으면 좋겠어요. 저도 바빠도 그 영화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시간을 쪼개서 봤는데 그 영화가 많이 상영은 안 해요. 가까운 타임 스퀘어 CGV에 하루 두 번 상영해요. 오후 4시하고 밤 11시인데 오후 4시에 구역식구들이 같이 가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남신도 여신도회가 같이 가서 보시면 정말 은혜를 받을 수 있어요. 그 영화를 꼭 권해드리고 싶어요. 가족들과 함께 보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정말 나눔이 왜 행복인가를 우리에게 그 영화는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말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나눔의 축복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본문의 제목을 붙인다면 ‘최후의 심판’, 혹은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에 첫 번째 교훈은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주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거예요. 재림하시는데 심판장으로 오신다! 그래서 온 인류를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시죠. 

자 우리 오늘 31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첫 번째 오신 예수님은 말구유에 오셨어요.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런데 두 번째 오실 재림의 주님은 영광중에 오시고 천사와 함께 오시고 그리고 위엄 가운데 오셔요. 그분은 높은 보좌 위에 앉아계세요. 그 보좌는 심판의 보좌예요. 여러분 법원에 가면 재판장이 앉는 의자는 높고 권위 있게 되어 있어요. 우리 주님은 온 인류의 심판장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 온 민족은 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나눈다고 오늘 성경은 증언합니다. 

자 오늘 우리 성경 32절과 3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과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 편에 두리라.” 모든 민족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양과 염소로.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눕니다. 양은 의인을 상징하고 염소는 악인을 상징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소개되지요. 그래서 좁은 문이 있는 가하면 넓은 문이 있습니다. 좁은 길이 있는 가하면 넓은 길이 있습니다. 알곡이 있으면 가라지가 있습니다. 보통 때는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밭에 자라지만 가라지를 뽑지 않습니다. 왜? 가라지 뽑다가 알곡도 뽑힐까봐! 마지막 추수 때가 되면 주인이 오셔서 그 모든 것을 수확합니다. 알곡은 잘 거둬서 천국 창고에 쌓고 가라지는 거둬서 불에 태워버립니다. 지옥불이지요. 

마찬가지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낮에는 방목해서 같이 풀어놓습니다. 같이 어울립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양 우리와 염소 우리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따로 따로 그들을 가두게 됩니다. 양이 추위를 더 탄다고 하지요? 그래서 양의 우리는 더 따뜻하게 보온 된 것으로 준비해줍니다. 여러분 양은 순종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은 색깔이 힙니다. 양은 의인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염소는 색깔이 검습니다. 그리고 염소는 자기의 주인도 잘 치받죠. 그래서 염소는 여기서 보면 악인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악인과 의인으로 양과 염소로 구분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인은 오른쪽에 양은 오른쪽이라는 것입니다. 왜 오른편일까? 오른편은 능력과 힘과 구원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른 손을 우리가 right hand라고 합니다. 왼손을 left hand라고 합니다. 이 right라는 말에는 ‘의롭다. 옳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른쪽이 옳은 것이고 의로운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을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하고 쭉 읽다보면 마지막에 뭐라고 합니까?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 손,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들 것이다. 그래서 오른 편은 바로 의인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만약 우리가 먼 훗날 심판 날에 양과 염소로 갈리어진다면 여러분 상상만 해보세요.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다 양의 자리에 의인의 자리에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옆의 분에게 물어 보세요. “양이십니까? 염소이십니까?” 여러분은 다 양일 것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무엇입니까? 오른 편에 선자들은 축복과 칭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양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축복과 칭찬을 받습니다. 자 우리 오늘 34절의 말씀을 다시 읽죠.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아멘 그렇습니다. 오른 편에 있는 자들! 양의 자리에 선자들을 향해서 복 받을 자들이여 그랬습니다. 너희는 지금도 복을 받았고 미래에도 복을 받을 자들이다. 너희는 장차 창세로부터 예비 된 그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위해 준비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천국에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여러분들은 바로 천국에 들어갈 복 받을 분들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린 그런 자부심이 있어요. 우린 복 받은 사람들이예요. 복 받은 사람들이고 복 받을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칭찬과 인정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은 설명합니다. 너희가 왜 복 받을 자들이냐?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영접해 주었다. 그것이 너희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자 우리 오늘 35절, 36절을 또 읽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아니 우리가 언제 주님을 돌보았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께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그런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 때 주님께서 뭐라고 답변하십니까? 

자 오늘 우리 40절 말씀 같이 읽죠.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 자에게!! 작은 자란 누구일까요? 소외된 자, 가난한 자, 고독한 자, 병든 자 그렇죠! 연약한 자! 소자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자에게 너희가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과 같다. 

자 그런가 하면 오늘 왼편쪽에서는 염소의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저주와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자 41절 말씀을 같이 읽지요.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아멘. 

왼 편에 선자들에게는 나를 떠나서 주님의 곁에 도저히 더 있을 수 없어요. 마귀와 그 귀신들이 들어가는 그 영원한 불에 그들은 들어갈 것이다. 지옥에 던져 질 것이다. 그래 주님은 그들이 지옥에 던져져야 할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시지 않았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내가 헐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에 나를 돌보지 아니하였고 옥에 갇혔을 때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주님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습니까? 

45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아멘!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 이 말씀에 결론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푼 자들 그들은 의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 곧 그 작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하지요. 

여러분 바울의 이야기를 또 한 번 드립니다만은 그가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 핍박하러 가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뿐이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곧 자신을 핍박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마찬가지예요. 지극히 작은 자들, 가난한 자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행한 일이라고 주님은 정의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헐벗고, 소외되고, 굶주린 작은 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이라고 까지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작은 자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는 아니예요. 주님은 우리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명령하셨고 바로 그들의 모습 속에서 주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틴이라고 하는 어떤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10살 때 예수를 믿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그런 인물입니다. 어느 말을 타고 아주 추운겨울에 어딘가 가고 있는데 길가에서 옷을 벌거벗김을 당하고 추위에 떨고 있는 한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냥 두면 죽을 것 같아요. 그는 말에서 내려서 자기의 옷을 벗었는데 이 외투를 다 벗어줄 수는 없고 칼을 꺼내서 자기의 외투를 반으로 자릅니다. 그리고 외투의 절반을 그 추위에 떠는 사람을 덮어줍니다. 그리고 자기는 말을 타고 떠납니다. 밤에 잠을 자는데 꿈을 꿨어요. 꿈을 꿨는데 예수님이 천사들과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묘하게도 자기가 반 자른 그 군인 외투를 걸치고 계시는 거예요. 

천사가 묻습니다. “예수님 이 외투가 뭡니까?” 그랬더니 “이거 마틴이 내게 선물 한거야.” 그러면서 예수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세요. “마틴이 이거 나한테 선물했다니까.” 하면서 예수님이 막 기뻐하시는 모습을 이 마틴이 꿈에서 봤어요. 아 예수님이 이렇게 가난한자의 모습으로 오시는구나. 그때부터 마틴은 가난하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열심히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중세에 성자로 이름을 날리고 그리고 많은 수원을 지어서 하나님 앞에 봉헌한 인물로 이름이 남겨져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벌거벗은 자들의 모습으로 마틴을 찾아오셨다 하는 것입니다. 

뭐 그런 이야기는 교회역사에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뭐 근래에 가까운 예로 컴패션이라는 기독교 구호단체가 있는데 그 컴패션 홍보대사로 일하던 차인표 씨가 경험한 일입니다. 그런 간증을 하더라구요. 그는 컴패션의 홍보대사로 위촉을 받고 그는 아프리카 어느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너무 가기 싫은걸 억지로 가게 되었어요. 비행기를 몇 번 갈아타고 또 그는 아주 그 시골에 그 에어컨도 없는 차를 타고 터덜거리는 길을 몇 시간을 달려갔어요. 그는 짜증이 났습니다. 내가 여기 왜 와야 되나 말이야. 

그런데 그가 도착했을 때 어느 시골에 아주 허름한 교회 앞에 차가 세워졌습니다. 마을사람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아이가 교회 마당 앞에 나와서 제일먼저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아이의 모습, 그 삐쩍 마른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차인표씨는 그 아이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그리고 마치 예수님이 손을 벌리고 자기에게 “인표야 오느라 고생 많았지? 걱정하지마. 내가 너를 도와줄거야.”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차인표씨가 거기서 눈물을 흘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그는 적극적으로 그 일에 협력하게 되고 차인표씨는 아주 유명한 크리스찬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또 많은 아이들을 입양해 자기 아이처럼 이렇게 잘 키우고 있잖아요. 바로 그가 어린아이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레교회를 섬기는 김진홍 목사가 아주 예전에 청계천에서 방교회를 세웠을 때 일입니다. 청계천 뚝방마을에 너무 너무 가난한 분들만 모여 있는 곳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교회가 될 일이 없죠. 맨 술주정꾼이고 뭐 되는 게 없어요. 견디지 못해서 결국은 이 마을을 떠나야 되겠다 생각하고 마지막 마을을 한번 돌아보게 됐는데 어느 허름한 집 안에서 신음소리가 납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이들 셋이 주루룩 누워 있는데 애들이 다 굶어서 죽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배고프다고 소리치는 거예요. 너희 며칠이나 굶었냐? 3일 동안 굶었다는 거예요. 엄마는 어디 갔냐? 엄마는 보따리 장사 하러 나갔다가 경찰 단속에 걸려가지고 지금 유치장에 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3일 동안 엄마가 안 오니까 꼼짝 없이 굶어 죽는 거예요. 이 추운 날. 둘째아이가 배고파요 하면서 우는데 그 아이의 눈망울 속에서 그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예수님이 여기 계신데 내가 어딜 가느냐 하고 보따리를 풀고 그 교회를 계속 섬겼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눈물짓는 자의 모습 속에서 가난한 자의 모습 속에서 굶주린 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비유는 이 비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진정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의 이웃과 우리가 우리의 이웃 작은 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주님과 바른 관계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행과 구제를 아주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잠언 19장 10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돈을 꾸어 드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언젠가 반드시 우리에게 갚아 주신다는 거예요. 

야고보서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다.” 진정한 경건이란 무엇이냐?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그들을 돕는 것, 그것이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보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이웃에게 나누어 주면 하나님은 오히려 흔들어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구제는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온 다고 하나님의 보상이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 제자가 있었는데 이 여 제자는 아주 구제를 많이 하는 여인이었어요. 그런데 그가 한 번은 병들어서 죽었습니다. 가난한 과부들이 와서 울부짖습니다. 이 다비다가 우리에게 속옷도 만들어 주고 겉옷도 만들어 주었다고 그 옷을 붙들고 막 웁니다. 베드로가 와서 그 얘기를 듣더니 사람들을 나가게 하고 그 다비다를 위해서 기도했더니 죽었던 다비다가 다시 살아난 기사가 사도행전 9장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제를 많이 한 이 여인을 특별히 더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에게 어느 날 천사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네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구제를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고 계세요. 베드로를 초청해서 말씀을 들으라. 그래서 베드로를 초청해서 말씀을 들을 때 그 가정에 큰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구제를 기억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시고 구제를 기억하신다는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또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어디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했는데 오늘 마태복음 25장에 보니까 구제를 많이 해야 구원을 받느냐? 구제 안하고 그냥 외면하면 지옥 가느냐?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은 갈등을 일으키는 구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 맞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노라 하면서 행함이 없다 하면 그것은 죽은 믿음,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짜 믿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로마서 3장 12절에 보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고 했어요. 분명히 그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런 선행과 구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정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안에 누가 계시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요.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이웃을 돕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고 바로 우리의 상급이라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윌라드 퓰러라는 분이 계신데 이 분은 아주 큰 사업가였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어요. 가족에게는 관심이 없고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어느 날 집에 들어와 보니까 가족들이 편지를 써 놓고 다 나가버렸어요. 돈 만 아는 당신하고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윌라드 퓰러는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일으킨 운동이 해비타트 운동이에요.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운동이예요. 그래서 그는 무려 3만 채의 집을 지어서 집 없는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어요. 그는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것이예요. 

여러분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서 또 가진 것을 나누는데서 행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철가방 우수씨의 영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영화의 제일 마지막 장면에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수씨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저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들도 옆에 분들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당신은 진짜 행복하십니까?” 속으로는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는 분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 진짜 행복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었다고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은 사람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행복이 와요. 이웃과 나눔으로써 어려운 사람과 나눌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와요. 우수씨는 마지막 그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저는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이 행복한 삶이 부럽지 않습니까? 

성탄은 바로 사랑의 계절입니다. 우리 이웃들에게 귀한 마음의 선물, 또 사랑의 선물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 성탄은 더 행복한 계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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