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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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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요 15:1-1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1-2)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1-6)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관계를 잘 드러낸 비유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뛰어난 것이 목자와 양의 비유 그리고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보면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성도는 가지요, 아버지는 농부입니다.
  
이 비유에는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열매의 중요성입니다. 둘째는 열매를 가꾸시는 아버지입니다. 셋째는 줄기와 가지 사이의 연결입니다.


좋은 열매 맺는 나무

첫째 요점은 열매의 중요성입니다. 포도나무의 존재 가치는 열매에 있습니다. 果木은 열매를 따기 위해 심습니다. 과수원 하면서 목재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포도나무는 특히 그렇습니다. 포도나무는 장작으로도 쓸모가 없고, 목재로도 쓸모가 없고, 화초로써도 쓸모가 없습니다. 오직 기대하는 것은 열매뿐입니다. 우리 인생의 존재 가치도 그렇습니다. 설마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열매는 아니겠지요?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포도 열매 같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열매란 무엇이겠습니까? 열매의 1차적인 의미는 삶의 軌跡 삶의 자취입니다. 살아온 過程이 곧 열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 온 과정이 있습니다. 좋게 살았든지 악하게 살았든지 발자취는 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열매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는 바로 좋은 열매입니다. 자신에게 유익하고 타인에게 유익하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 유익한 발자취가 곧 좋은 열매입니다. 

저는 어쩌다 공동묘지에 가면 무덤 앞에 세운 묘비들을 유심히 살펴봅니다. 어떤 묘비에는 간단히 태어난 날과 죽은 날, 혹은 가족 사항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어떤 묘비는 四面에 깨알 같은 글씨로 메주알고주알 이력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열매는 묘비를 거창하게 세운다고 평가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평가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이 내 묘비에 새겨주실 내 삶의 좋은 이력서, 그것이 바로 내 삶의 좋은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만이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참’이란 말을 붙이신 것은 가짜가 아님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나무라고 다 나무는 아닙니다. 좋은 나무가 있고 나쁜 나무가 있어요. 열매가 맺힌다고 다 좋은 나무는 아닙니다. 열매의 품질이 좋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본성적으로 좋은 나무십니다. 가지들이 접목할 좋은 支柱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붙은 가지는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좋은 열매를 기대하십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3:10)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마7:17-19)
  
그러면 좋은 열매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판단하는 삶의 좋은 열매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들입니다. 지위, 학력, 명성, 소유, 훈장, 포상 등등. 신자들의 이력서도 마찬가집니다. 교회 직분, 예배당 건축, 봉사 활동 같은 履歷들이 새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는 차원이 아주 다릅니다. 무형적이고, 불가견적이고, 내재적이고, 신령적이며 영원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여러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 속에서 이런 열매들을 열거합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롬6:22),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빌1:11),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빛의 열매,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 거룩함, 착함, 의로움, 진실함,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선량함, 충성, 온유함, 절제. 이런 열매들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인격 속에 내재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열매들이 채워지면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엡4:13-16) 우리는 성도로서 마땅히 이런 열매 맺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 내 삶의 발자취를 한번 살펴보세요. 어떤 열매들이 있습니까? 내 인생을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유익이 있습니까? 타인들에게는 얼마나 유익된 궤적이 남아 있습니까? 자신의 영혼에게는 얼마나 유익이 있었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묘비를 새겨 주신다면 어떤 내용이 될까요? 세상 경력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평가하신 열매입니까? 비록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인격 속에 채워진 좋은 열매들로 가득합니까?  지나간 자취야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은 좋은 열매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열매를 가꾸시는 아버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가꾸십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가꾸시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 버리십니다.(마3:10,7:19,눅13:9) 둘째로, 열매 맺는가지는 더 많이 맺도록 깨끗케 하십니다. 이 두 가지 작업은 서로 관련이 있습니다. 열매 없는 가지를 잘라 버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은 가지들이 열매를 더 잘 맺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농사법에서 두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첫째로, 열매 없는 가지를 제거하는 가지치기 작업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열매 맺는 가지를 더 많이 맺도록 깨끗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깨끗케 하시느니라’(2) 한 말씀은 곧 “제거한다”(2), 가지치기를 한다는 뜻입니다. 

포도나무는 부지런히 가지치기를 해 줘야 열매를 잘 맺습니다. 저도 포도나무를 심어 본 적이 있습니다. 봄에 묘목을 사면서 덤으로 포도나무를 얻었습니다. 포도나무 뿌리에 흙이 다 떨어져나가서 제대로 살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냥 심었더니 여름에 엄청나게 줄기가 뻗고 무성해졌습니다. 열매도 상당히 열렸는데 가꿀 줄을 몰라서 결국 몇 알갱이 먹어보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강화도 포도밭에 가서 물어봤습니다. 포도나무 어떻게 가꿉니까? 그랬더니 3~4 마디마다 줄기를 잘라주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했더니 그래야 열매가 실하게 열린다고 합니다. 모든 과목이 다 마찬가집니다. 가지마다 다 놔두지 않습니다. 상당 부분은 잘라냅니다. 그래야만 크고 맛있는 과일이 열립니다. 가지치기를 계속 해야 좋은 열매가 보존됩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집니다. 가라지, 나쁜 가지를 솎아내면 나무가 더 튼튼하고 실해집니다. 하나님은 아이성 전투에서 전리품 도적질을 한 아간을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거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 속에서 배신자 가룟 유다가 제거된 자리에 새로운 가지를 붙이시고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제거된 예루살렘 교회는 더 굳건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영혼도 마찬가집니다. 인간은 영적인 나무입니다. 영혼의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영혼을 깨끗케 해야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영혼의 가치지키가 뭡니까? 영혼의 죄를 잘라내는 작업, 나쁜 행실을 잘라내는 작업, 즉 회개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3:7-9) 

베드로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영혼 청소는 외적인 수단으로 할 수 없습니다. 도덕 훈련으로도 안 되고, 자선 사업으로도 안 됩니다. 금욕이나 극기로 되지 않고, 학문적 탐구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주님의 말씀 따라 회개하면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3-4) 

여기서 ‘말’이란 단어는 단수로써 주님의 교훈 전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될 뿐 아니라, 항상 주님의 말씀 따라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좋은 가지는 더 보존되고, 나쁜 가지는 더 제거됩니다. 신앙에도 빈익빈 부익부의 원리가 있습니다.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2) 

열매 없는 가지는 잘라버리지만 좋은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이 맺게 합니다. 좋은 행실을 하면 좋은 행실이 늘어납니다. 나쁜 행실을 하면 나쁜 행실이 늘어납니다. 결국 나쁜 행실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축소시키고, 도태시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에 보면 1달란트 가졌던 사람은 오히려 빼앗기고, 다섯 달란트 가졌던 사람은 오히려 많은 대가를 받고 오히려 다섯 달란트 까지 덤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있던 것마저 빼앗깁니다.  
  
부익부 빈익빈은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현상입니다. 평등주의자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불평등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 역시 하나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막지 않고 허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셔서가 아닙니다.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것이 인간의 탐욕과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왜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더 주시고,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 것은 다 빼앗아버리셨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주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5:26-30) 

하나님은 생산적인 분입니다. 있는 것을 묻어두는 분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부자의 마인드와 한 달란트 받은 빈자의 마인드가 다릅니다. 부자는 돈이 생기면 그 돈을 밑천으로 더 벌 궁리를 합니다. 빈자는 돈이 생기면 이게 웬 떡이냐 하면서 써버립니다. 부자는 돈을 맡긴 주인에게 유익되게 하려고 애씁니다. 빈자는 주인의 입장보다는 자기 처지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무익한 종”입니다. 

영적 원리도 마찬가집니다. 무한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무한한 것을 더 받아 누립니다. 유한한 자신을 믿고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은 점점 삶이 위축되고 축소됩니다. 신앙은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축복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확대됩니다.  
  
오늘 내 삶을 어떻습니까? 점점 좋은 일이 많아집니까? 아니면 점점 축소됩니까? 내 인생이 점점 피어납니까? 아니면 점점 시들어갑니까? 오늘 내 삶의 자취를 한번 살펴보세요. 가지치기 당하는 처지입니까? 점점 보존되는 가지입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원망 불평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보존하실 가치가 있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열매들이 내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가꾸시는 좋은 가지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본문의 세 번째 요점은 줄기와 가지의 연결입니다. 주님과 성도 사이의 연결성입니다. 나무 가지가 줄기와 단절됐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에서 팔이나 다리가 잘려 나오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일 어떤 개인이 이 사회에서 떨어져 나오면 죽은 인생이 됩니다. 현대인의 병중에 가장 심각한 병은 사회에서 이탈되는 병입니다. 사회 부적응, 대인 공포증, 우울증, 나 홀로 인생. 이런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가면 “묻지 마” 살인자가 되고, 사회 파괴자, 사회 공격자가 됩니다. 아무리 개인주의 사회가 된다 해도 결국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사회 이탈 현상을 “아파트 거주자의 착각”이란 생각을 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거 형태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아파트입니다. 저 역시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편리합니다. 문만 닫고 들어가면 누구의 간섭도 없는 나만의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파트 사람들은 좀처럼 서로 교제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없어도 정말 잘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굉장한 착각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파트만큼 외부의 신세를 지고 사는 집도 없을 겁니다. 정전만 돼 보세요. 20층이라도 걸어서 오르내려야 됩니다. 냉장고 가전품 다 죽은 물건이 됩니다. 수도가 끊어져 보세요. 화장실은 오물통이요, 죽도 밥도 만들 수 없습니다. 난방이 나가 보세요. 겨울에도 동태로 살아야 됩니다. 그뿐입니까? 전화 도시 가스. 어느 하나라도 외부와 단절되면 못 사는 게 아파트입니다. 세상을 홀로 사는 양 자만하지 마세요. 남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억지 쓰지 마세요. 항상 생명줄을 외부에 대고 있으면서 독야청청 한다는 생각 자체가 미련한 생각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붙어 있지 않으면 영적 사망자가 됩니다. 영혼이 아무 것도 공급 받지 못하고 말라죽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5) 

주님은 ‘나’와 ‘너희’의 분명한 존재 차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나 ‘너희’는 결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니 나에게 붙어 있으라.”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물건들과는 존재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하나님과 연결돼 있어야만 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 해도 먹고 사는 데는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정말 인간답게 영적인 삶을 살려면 하나님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산다고 다 인생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자는 그리스도와 영적 교류가 있습니다. 인체는 방대한 신경망과 혈관을 통해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됩니다. 영양분이 공급됩니다. 산소가 공급됩니다. 우리가 거하는 아파트는 외부로부터 전기, 수도, 난방, 가스, 전화 등으로 연결되어 생존이 가능합니다. 우리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공급 받습니다.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지식과 도덕적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모든 신령한 능력들이 주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됩니다.
  
각 사람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합니다. 난방 잘 들어오는 집 옆에 산다고 저절로 따스하지는 않습니다. 수도 잘 나오는 집 옆에 산다고 물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전기가 풍부한 집이 옆에 있다고 저절로 전기가 오지 않습니다. 옆집에 전화가 있다고 내 집까지 들리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집집마다 본선에 따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됩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 영혼도 각 사람마다 다 주님에게 연결되어 있어야 됩니다. 남편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아내까지 생명이 공급되지는 않습니다. 아내가 주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았다고 남편까지 천국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주님께 연결되기를 힘써야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과의 연결이 생명입니다. 구약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민족을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렘2:21,겔15:1,19:10,호10:1,시80:8-16) 

신약에서 바울은 구원 받은 성도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생명은 주님과의 연결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서 주님을 머리로 하여 연결된 몸이라고 했습니다.(롬12장, 고전12장, 엡1:22-23) 주님에게 연결되지 않았다면 천만인이 모여도 생명 없는 인간 집단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교회만이 산 교회요, 능력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사단을 이기는 교회요, 세상을 이기며 사망을 이기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빌4:13)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앞서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11)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우리를 주님 안에 거하게 만듭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4)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5)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6)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7)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반복되지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도 되고 거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드시 주님 안에 거해야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거하여야 한다.” (You must abide in me and I must abide in you.)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안에 거하도록 의무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우리 안에 거하실 책임을 스스로 지셨습니다. 즉, ‘네가 내 안에 거하면 나도 네 안에 거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 안에 거해야 됩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믿음 안에서 날마다 교제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는 방법은 바로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0)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계명을 지키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전의 앞뒤처럼 밀접합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킵니다. 계명을 중심에서 지키는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가 없고,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는데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도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주님과 연결하는 힘이라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과의 교제의 수단입니다. 주님과 사랑을 나누는 방법입니다. 믿음으로 붙어 있고, 계명의 말씀을 지킴으로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열매의 다양한 결과들

우리가 삶의 좋은 열매를 맺으면 다양한 유익이 뒤따라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는 영광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8) 

둘째로, 우리가 모든 사람 앞에서 주님의 제자로 인정됩니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8) 

셋째로, 막힘없는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넷째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11) 

여기서 말하는 기쁨이란 표피적 감각의 기쁨이 아닙니다. 내면에 있는 창조적인 기쁨입니다. 이 단어는 본장에 이르기까지 오직 3:29에 한번 언급했는데, 다락방 훈화에는 7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16:20,21,22,24, 17:13, 본문에 2회) 진정한 기쁨은 외적인 이적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교통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날마다 주님과 생명의 교류를 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삶의 풍성한 열매들을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눈에 드러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평가해 주시는 선한 열매를 많이 맺으시고 그 축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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