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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질문 속에 담긴 의미 (창 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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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 속에 담긴 의미 (창 40:1-8)  

사람들은 누구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가치를 높여줄 좋은 출신, 높은 신분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가치는 출신이나 신분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진 마음에 따라 결정됩니다. 

본문에는 출신과 신분에 있어서 극복하기 불가능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한쪽은 요셉이었습니다. 다른 쪽은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었습니다. 

두 관원의 직위는 비록 최고위직은 아니었지만, 왕의 신임만은 최고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궁중에서 독살이 유행하던 고대 시대의 통치자들은 가장 신임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먹고 마시는 일을 맡겼습니다. 

두 고관은 왕의 음식을 통하여 왕의 건강뿐 아니라, 안위까지도 책임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왕에게 죄를 범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평생 만날 일이 없던 두 고관과 요셉이 같은 감옥에서 지내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두 관원은 비록 죄수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귀한 몸이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바깥과 줄이 닿아 있었고, 석방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인도 아니고, 출신도 노예였으며, 그에게 붙어있는 죄목은 강간 미수였습니다. 이것이 누명임을 우리는 알지만, 당시 감옥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고, 요셉을 강간미수범으로 대했을 것입니다. 출신으로 보나, 신분으로 보나, 죄의 내용으로 보나 그 누구에게도 관용을 얻기 힘든 죄수였습니다. 찾아오는 이도, 사식을 넣어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잊혀진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모든 면에서 두 관원에 비길 바가 못 되는 천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요셉이 두 고관에게 한 질문을 하는 순간, 사람의 가치는 신분과 출신으로 가늠되는 게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요셉은 무엇이라고 질문했습니까? 7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이것이 요셉의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통하여 요셉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두 관원은 자신들이 깊은 감옥에 떨어질 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감옥에 들어온 첫 날 밤부터 깊은 잠을 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왕의 신임을 회복할 수 있을까? 풀려나갈 가능성은 있는가? 다시 복직될 가능성은 있는가?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쉴 새 없는 생각이 그들을 압박했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이 몹시 불행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에게서는 여유가 엿보였고, 감옥이 자신의 집인 것처럼 지냈습니다. 간수장은 이런 그를 주목했고, 얼마 후 감옥의 모든 죄수를 그에게 다 맡겼습니다. 요셉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히기 전 보디발 장군의 집의 노예로 살 때, 노예의 일을 기쁨으로 했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노예라는 신분과 감옥이란 환경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또 요셉이 이 질문을 하는 순간 그는 <남을 품을 수 있는 큰 가슴을 가진 사람>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라는 질문은 두 고관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그들을 염려해서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요셉은 남이 당하는 어려움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이러한 관심은 상대방의 이용가치 때문에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이 이용가치가 없으면 홀대합니다. 

1960년대에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동원 선생>의 회고록에 보면 우리나라 근대사에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초 어느 날 <리처드 닉슨>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가 공항에 도착할 때 우리 정부에서는 아무도 영접하러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닉슨은 한물 간 인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닉슨은 1960년에 미국 현직 부통령이란 유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져서 낙선했습니다. 2년 후인 1962년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했습니다.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한 우리 정부는 그를 홀대하였습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인 브라운 대사는 이동원 장관을 통해 닉슨을 위해 청와대 만찬을 열어줄 것을 여러 번 요청했지만 청와대는 거절했습니다. 이 장관도 그가 미국의 부통령이었다는 경력만으로도 귀하게 대접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지만, 청와대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잠시의 대통령 면담만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닉슨이 초라하게 한국을 떠나기 전날 밤에 브라운 대사는 미 대사관에서 만찬을 열고, 한국의 장관 모두를 초청했지만, 이동원 장관 한 사람만 참석했을 뿐입니다. 닉슨은 매우 섭섭한 마음으로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상대의 이용가치를 보고 대한 결과는 매서웠습니다. 정치 생명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닉슨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1968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1969년 1월에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취임 6개월 후 괌에서 발표한 <닉슨독트린>의 핵심 내용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박정희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었습니다. 청와대는 닉슨과의 정상회담을 수없이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후에 박정희 대통령은 백악관도 아닌 새크라멘토로 가서 한 호텔에서 겨우 닉슨을 만났는데, 닉슨은 호텔 입구에도 나오지 않고, 방안에 앉아서 박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그 날 저녁 만찬에는 국무장관 외의 다른 각료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치명적인 것은 애걸하듯 이루어진 회담은 아무 열매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박 대통령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1971년 3월 27일 미 제7사단은 24년간의 한국 주둔을 끝내고 철수했습니다. 상대를 이용가치란 측면에서 대할 때 오는 불편한 결과였습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자주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달랐습니다. 만약 요셉이 두 고관을 이용가치란 측면에서 보았다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두 고관의 이용가치를 보고 접근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순수한 사랑으로 염려했습니다. 후에 술 맡은 관원이 석방될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본문 7절의 질문을 할 때는 그가 석방될 것을 예상치 못했던 때입니다. 순수한 동기에서 우러난 사랑이었습니다. 

더구나 놀라운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두 고관보다 훨씬 어렵고 비참한 형편에 있어 남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보다 형편이 좋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영혼이 한없이 넓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노예출신 죄수의 가슴이 두 고관의 가슴보다도 넓고, 바다보다 넓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본래부터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창세기 37장은 요셉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여러 형제가 함께 자라면서 서로 부딪힌 경험들이 계시지요? 돌아가신 제 어머니께서는 저희가 서울에 가거나, 서울에서 오시면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시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많이 주시는 것은 수긍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서와 상관없이 어느 누가 더 받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졌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종종 제 아들을 따로 불러 조금씩 더 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제 딸들이 가서 할머니께 항의를 했습니다. <할머니는 손자만 좋아하고, 손녀는 좋아하지 않나? 이건 성차별이다!> 그러면서 따졌습니다. 

요셉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이 정말 치열했을 것입니다. 그는 열 두 형제들 중 열한 번째로 출생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이 늙어서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은 이렇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라고 했습니다. 그는 노년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노년에 낳은 것으로만 따진다면 요셉보다 더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의 동생 베냐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을 제쳐 두고 요셉을 더 사랑하여 그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가 아버지 입 안의 혀처럼 행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창세기 37장 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요셉은 형님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꾸중 듣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쾌감을 느꼈습니다. 형님들이 꾸중을 들을수록 자신은 아버지의 신임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다보니 그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 다음 절을 보면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고 했습니다. 그는 결코 명예롭지 못한 채색옷을 혼자만 입고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고, 불편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혼자만 입고 다녔고, 이로 인해 다른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남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했던 요셉, 고자질이나 하고,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이 오늘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염려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존재의 변화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후에 그가 총리가 되어, 아버지 야곱을 22년 만에 만나게 되었을 때도 그는 형님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일을 고해바치지 않았습니다. 과거 같았으면 형님들의 행동을 일러바쳤을 테지만, 요셉은 아버지에게 형님들의 모든 죄과를 감추고, 모든 것을 용서했고, 형님들의 가족을 보살폈습니다. 과거의 요셉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맛보는 참 기쁨 중의 하나는 사람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요셉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되는 데는 관심이 없고, 환경이 변화되길 기다리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변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환경만 탓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축제에 참가한 한 남자가 점쟁이의 텐트 안에 들어가 돈을 지불하고 손금을 보아 달라고 했습니다. <많은 것이 보이는군요!>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어떤 것이 보입니까?> <당신은 마흔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가난하고 불행할 것입니다.> 이 대답에 의기소침해진 그 남자는 잠시 후에 물었습니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점쟁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 생활에 익숙해질 것이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신이 변화될 생각은 하지 않고, 우연히, 팔자가 좋아서, 어떻게 하다 보니 재수가 좋아서 출세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그저 그렇게 살다가 끝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위대한 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옛 사람의 모습을 벗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아멘. 새 사람이 되어 새 마음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인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변화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 애쓰던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교만하던 사람이 겸손해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이게 복음의 능력입니다. 환경만 탓하던 사람이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삶을 지켜나갑니다. 이런 이들의 하루하루는 정말 귀합니다. 

나쁜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불행은 나쁜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나쁜 자아 때문에 옵니다. 요셉은 점점 좋은 환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성숙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편안하게 살던 아버지 집에서 보디발 장군의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후에는 노예에서 죄수로 더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을 통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환경이 좋은 사람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오히려 좋은 사람으로 바뀜으로써 나쁜 환경도 좋은 환경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 발표한 장편소설인 《레 미제라블》이 다시 영화로 만들어져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강렬한 영상과 노래가 압권입니다. 이 작품은 변화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여줍니다. 

주인공 장발장은 변하여 새 사람이 됩니다. 그는 본래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네 번의 탈옥 시도로 형이 늘어 무려 19년을 감옥에 살게 됩니다. 그의 가슴은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은촛대를 훔친 그를 감싸주는 마리엘 주교의 사랑에 감화되어 그는 마들렌드 시장으로 신분도 변하고, 사람도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창녀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악하지만, 그러나 사랑으로 살아볼만한 세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베르 경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하고, 범죄자는 처벌을 받아야 하며, 자신은 그들을 잡아들일 사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끝까지 장발장을 추적합니다. 그러다가 숭고하게 변화된 장발장의 모습 앞에서 당황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를 수용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곤 결국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자베르 경감이야말로 <레 미제라블, 비참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요셉이 총리가 되는 것과 같은 반전, 엄청난 축복이 있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새 사람이 된 후에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좋은 사람으로 바뀐 후에 나중에 총리라는 자리가 주어졌다는 그 순서가 중요합니다. 여전히 고자질이나 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채로 총리의 자리를 얻는다면 자신으로서나 나라로서나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새 사람이 되게 하신 후에 필요한 선물들을 주십니다. <먼저 너부터 변화되어라! 그 후에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이게 하나님의 순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밑 빠진 독에 축복의 물을 붓는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독을 고치신 후에 축복을 채우십니다. 축복으로 채워지길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리가 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포기하고, 그 대신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잘 아시는 글을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혁명가였고,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기도는 이것이 전부였다. 
주여! 내게 세상을 개혁할 힘을 주소서. 

중년에 이르러 한 사람의 영혼도 고쳐 놓지 못한 채, 내 반생이 흘렀음을 깨닫자 내 기도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여! 나와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은총을 주소서. 그저 가족과 친지들만이라도 만족 하겠나이다. 

이제 노인이 되어 죽을 날도 오늘 내일 하게 되고 보니, 이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 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의 유일한 기도는 이것이다. 주여! 나 자신을 고칠 은총을 주소서.> 

금번 부흥사경회는 우리가 변화될 기회입니다. 내일 저녁부터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오셔서 모두 큰 은혜를 받으시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래서 2013년이 우리에게 안겨준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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