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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말씀의 능력 (히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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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의 능력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크고 놀라운 단어는 아마도 ‘말씀’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본문에서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말씀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시기 때문에 말씀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이 말씀은 성육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이십니다. 이 말씀은 ‘살아 있는’(living)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12절).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들은 오직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만을 설교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만을 전하는 것이 말씀 설교입니다. 이 말씀 설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생명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말과 생각을 첨가하는 설교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인공적인 가공품설교는 얼핏 보기에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것 같으나, 결국에는 교회를 더럽히고 성도들의 신앙의 생명력을 소멸시키는 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 말씀은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자체가 살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말씀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의 근원이며,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지탱합니다. 궁극적으로 말씀은 그것을 붙드는 이들을 영원히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이 선포될 때 성도들 가운데 기도의 능력과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가득한 말씀 설교를 들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끊임없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이 담긴 설교를 듣고 기도할 때 놀라운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광복 목사의 최근 설교학 강좌에서 주제를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서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능력을 알아보고, 예배에서의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 말씀에는 활력(=생기)이 담겨 있음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

‘활력’(운동력)은 헬라어로 ‘에네르게스’입니다. 이는 ‘활동, 작용’, ‘힘, 에너지, 효능, 생기’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현대 영어에서 ‘에너지(energy)'도 이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던 이와같은 철학적이며 물리학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 말씀은 활동적이고 힘이 있으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만큼 효력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처럼 효과적이며 강력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자신의 뜻을 표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는 활력, 즉 생기(生氣)가 들어 있습니다. 이 생기를 전달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 선포의 핵심입니다. 에스겔 37장을 보십시오. 

겔 37:4-5=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앞의 에스겔 본문은 히브리서 4장 12절의 생생한 주석입니다. 그중 ‘말씀을 들을 지어다’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연결해 보면 “설교 말씀을 들으면 생기가 사람 안에 들어가게 된다”가 됩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생기가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고 약한 자가 강해지고 강한 자가 피곤치 않고 독수리 날개치듯 거룩한 능력으로 더욱 위대한 비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생기가 들어 있는 설교 말씀이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 때부터 하나님 말씀에는 생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어 생명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생기가 불어넣어지면 생명이 되고, 그 생기가 다하면 생명은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창 25: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기운이 다하면 죽은 시체가 되고 곧장 썩어지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 안에 담겨 있는 생기를 전달하고 공급하는 것입니다. 생명 있는 생기 설교는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성도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하고, 그 결과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게 합니다. 

설교의 핵심은 생기입니다. 설교자나 회중은 설교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생기를 마시고자 해야 하고, 마음껏 그 생기에 취하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온 모든 분들에게 성령님은 말씀의 생기를 공급하셔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2.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갬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본문은 하나님 말씀이 갖고 있는 엄청난 능력을 매우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말씀 속에 있는 생기는 듣는 사람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즉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전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하나님 말씀 설교에 있습니다. 

여기 ‘좌우에 날선 검’이란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절단하기 위해 사용했던 검으로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본서 저자의 강조점은 하나님 말씀이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잘 베어지는 예리한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의 칼은 사람의 살을 벨 수는 있어도 마음과 심령은 베지 못합니다. 즉 육적 생명을 없앨 수는 있어도 영적 생명은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칼은 육적 생명은 물론 영적 생명까지 생사를 가름하게 하는 가공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 들려지는 하나님 말씀, 즉 설교에는 이처럼 엄청난 능력이 잠재해 있습니다.  

혼을 찔러 쪼개는 것은 정신을 지배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과 관련되는데, 이는 주로 일반은총적 삶에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능력으로 역사하는 설교는 듣는 이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딤후 3:17).  

영을 찔러 쪼개는 것은 영을 지배함과 관련되는데, 이는 특별은총적 삶에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담은 말씀 설교는 사람의 영에까지 도달하고, 영까지 관통하며 더 나아가 영을 지탱하고 붙들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담겨 있는 생기가 넘치는 설교는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룹니다. 역으로 생기 설교가 되지 못하면 결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인 본문의 의도에 충실한 설교는 그 속에 넘치는 생기로 인해 죽은 영혼을 살리고 병든 영혼을 고칩니다. 이것은 예수님 재림 때에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계 11: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의 생기’는 말씀의 생기입니다. 말씀의 생기로 만물이 창조되었듯이 죄로 죽은 모든 인간도 말씀의 생기로 다시 구원을 얻고 부활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살후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재림 때 주님의 심판도 ‘그 입의 기운으로’ 즉 말씀 생기로 이루어집니다. 말씀 생기가 악의 세력을 소멸시키고 폐하여 버립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이 깊은 의미를 성경을 펼 때마다, 강단에 설 때마다 새기고 또 새겨야 합니다.  

왜 이 시대의 목회 현장에는 초대교회 시대와 같은 뜨거운 기도와 생생한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설교에 하나님의 생기가 원하는 수준만큼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 설교의 생기는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관절을 찔러 쪼갠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지탱하는 뼈, 그 뼈를 연결하는 관절까지도 온전히 꿰뚫고 또 지탱하며 보전해주고, 따라서 건강을 지켜줍니다.  

겔 37:7=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생기가 역사하는 설교 말씀이 선포되면 스트레스로부터 놓여나며 기쁨이 넘쳐 우리의 뼈까지도 견고하게 됩니다. 뼈들이 연결되는 관절까지도 새롭게 되며 온전히 지지되어 건강해집니다.

생기 설교는 골수까지 찔러쪼갠다고 했습니다. ‘골수’란 뼈 사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부드러운 조직입니다. 이는 사람 뼈에서 적혈구와 백혈구를 생성합니다. 그러므로 골수가 약화되면 ‘조혈 기능’까지 저하되거나 마비되어 버립니다. 

생기 설교는 골수까지도 침투해 들어가며 이를 새롭게 하고 온전히 지탱합니다. 만일 병든 부분이 있다면 말씀 속에 있는 생기가 그 속에까지 파고들어가 악한 것, 병들게 하는 것을 제거하고 강건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말씀의 ‘에네르게스’ 즉 생기의 역할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생기 넘치는 말씀은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건강하게 세워주며 유지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생기를 막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마 13:7).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생기가 충만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말씀의 기운이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생기가 충만했습니다. 그 말씀이 역사하자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났고, 죄인 베드로와 세리 삭개오가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생기 있는 말씀이요, 또한 이 말씀을 온전히 받아드리는 성도의 순종입니다. 


3.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함 

12절=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생기가 넘치는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이 사람의 혼(정신)과 영(구원), 관절과 골수(건강)를 지킵니다. 그리고 생기를 통해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함으로 영혼과 육체를 새롭고 강건하게 보존합니다.  

여기 ‘판단하나니’(크리티코스)는 법정적 용어인 ‘재판하다’(크리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인간의 법정은 밖으로 드러난 행동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판결합니다.

성도 여러분!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살아 있고 활력 있는 말씀이 선포되면 말씀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마음과 뜻이 생기에 의해 장악됩니다. 

‘마음의 생각’이란 의식 세계를 뜻하는데, 사람의 ‘감정적인 영역’을 가리킵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의 생각은 대부분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연루되어 부정적인 방면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활력이 넘치는 생기 설교는 이러한 인간 생각의 악함을 뚜렷이 깨닫도록 판결해줍니다. 판사가 판결을 선고하듯이, 생기 설교는 사람의 마음의 어떠함을 확정적으로 판결합니다. 이로써 설교를 듣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악함을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하고 의로운 생각을 갖게 합니다. 

‘마음의 뜻’이란 이성적, 이지적인 면을 표시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생기 설교는 이처럼 사람이 마음속으로 하는 사고 활동, 그가 가진 신념이나 성향까지도 판단하고 해결합니다. 또한 우리의 존재 밑바닥, 세포와 유전자, 내적 자아의 실체의 근간까지도 파헤치고 뒤집어엎을 수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말씀을 붙든 자가 바로 설교자입니다. 설교자가 입으로 선포하는 생기 설교는 이처럼 엄청난 힘과 권세와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설교자로 부름받고도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사람의 지혜나 윤리 도덕 교양강좌 등의 저급한 설교로 만족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본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처럼 강력한 능력을 가진 말씀, 모든 것을 판단하는 말씀이 어떤 이에게는 전혀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중에, 그들 중에는 성경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고대의 문서로 보고 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고고학자일 수도 있고 역사 연구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성경의 내용을 숙지할 만큼 다독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성경을 제대로 읽은 것입니까? 그들 나름대로 감동이 있고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해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읽기만 한다고, 혹은 듣기만 한다고 자동적으로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적 반사작용’과 같이 말씀을 읽었다고 해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참 맛을 경험하게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헛셀포드의 한 예화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화가인 아내를 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그림 솜씨에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잘된 그림이라며 보여줘도 남편은 도대체 그것이 무슨 그림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눈이 침침하고 답답해서 안과에 가서 검진을 했더니, 그는 악성 난시에다 짝눈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특수 안경으로 시력을 보정한 후에야 주변의 모습들을 깨끗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아내의 작품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화가의 남편에게 시력을 찾아줄 특수 안경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바른 안경이 필요합니다. 생기 넘치는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보청기가 필요합니다.  

왜곡된 시력을 교정할 안경이 무엇입니까? 사라진 청력을 되찾게 하는 보청기는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의 계시자이며 해석자이신 성령님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에게 활력 있는 말씀이 아무리 들려진다 하더래도 생기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 붙들리지 않고는 영적 시력과 청력을 회복하지 못하며, 말씀의 세계로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활력, 즉 생기를 체험해보셨습니까? 설교 말씀을 듣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 온 몸에 새로운 기운이 돌아 그동안 못했던 기도 생활을 다시 시작케 된 경험, 삶의 목표가 분명히 세워지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열심이 불같이 일어나던 경험을 가져본 적 있습니까?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 속에 있는 생기의 양과 질에 따라 예배자의 혼과 영, 마음의 생각과 뜻이 결정됩니다. 강단의 설교 속에 어떤 생기가 얼마만큼 들어 있느냐는 결국 교회의 현재와 미래, 성도들의 현재와 미래, 나아가 영원까지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생기가 크게 불어오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생기가 넘치도록 오직 성경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자신의 안경과 보청기를 철저히 준비하여 생기 넘치는 말씀의 축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온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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