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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찰하시는 하나님 엘로이 (창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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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하시는 하나님 엘로이 (창 16:1-13)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의 천 년이 하늘나라에서는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께서 “1분이다.” 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의 백만불은 천국에서는 얼마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1센트.”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하나님, 그럼 저에게 1센트만 주세요.” 하고 요청했답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서 1센트만 가지고 이 세상에 오면 백만 불이 될 거라는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다. 1분만 기다려라.”하나님의 1분은 천년이니 이 사람은 백만 불을 받기 위해 천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입니다만 신앙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처럼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창12장에서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12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웬결 큰 민족은 커녕 아브라함은 10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아들 하나 볼 수 없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아브라함은 15장2절-3절에 보면 나에게 왜 자식을 주시지 않느냐고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15장4-5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고 나가 뭇별을 보여주며 말씀하십니다. 셀 수 있느냐?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9-10절에 보면 제물을 쪼개고 하고 17절에 보면 그 쪼갠 제물 사이로 횃불이 지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쪼갠 제물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게 하는 의식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확신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장에 들어서면 아브라함은 또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계획은 아브라함이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아내 사라가 세운 것이죠.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 자녀를 낳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내의 말을 듣고 하갈과 동침하고 하갈이 임신하게 됩니다. 

어 뭐야 하나님이 하갈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나 싶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4절에 하갈이 임신함으로 큰 문제가 없던 아브라함의 가정에 갈등과 고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갈이 임신하게 되자 하갈이 여주인 즉 사라를 멸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니 업신여겼다고 하였고 쉬운 성경에 보니 깔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 보면 이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6절에 아브라함은 이제 나른 모르겠으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하고 결국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결국 광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가정에 왜 이런 비극적인 갈등과 상처 아픔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까? 만약,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고 신뢰하였다면 이런 비극이 발생했을까요? 아니요. 이런 아픔과 상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비극과 상처와 아픔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또 사라가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약속을 인내함으로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계획으로 어떻게 빨리 해결해보겠다는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오늘 아브라함의 가정이 보여준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쯧쯧쯧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지? 참 나 어이가 없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까짓 10년쯤이야 넉근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참 믿음이라고는 눈꼽만도 없어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만약 저나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는 믿음이 좋기 때문에 아브람이나 사라처럼 인간적인 결정을 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잘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나이는 점점 먹어가서 아이를 낳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시간은 자꾸 흘러가는데 큰 민족은 커녕 아들 하나도 생기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했겠습니까? 그것도 1년 2년 아니고 자그만치 10년 동안 기다리고 버텼는데 아무 소식도 없으니 별 생각이 다 들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 어느 누구도 사실 오늘 본문속의 아브라함을 향하여 뭐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더니 이따위야? 아니 참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죠? 우리도 우리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위한 놀라운 계획과 축복의 길을 마련하고 인도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해 일을 그르치고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치고 그래서 즐겁고 유쾌하지 못한 결과를 경험하게 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실은 많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뜻대로 완벽하게 이행할 수 있는 로버트를 만들지 않고 때로 실수하고 넘어지고 실패하는 사람을 만드신 이유는 우리가 전혀 실수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대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단 한번도 실수하지 않고 늘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아무 생각없이 기계적으로 이행하길 원하셨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이 아닌 로버트로 만드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로버트가 아니라 실수할 수밖에 없고 넘어질 수 밖에 없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사람으로 창조하신 이유는 그렇게 넘어지고 실수하고 실패할 때마다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일어나고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서 나가고 자라가길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이 태어나자마자 너 왜 못 걷냐고? 언제 말할 거냐고? 다그치고 때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그런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는 정상이 아닌것이죠.. 모든 자녀들은 제대로 서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고 제대로 걷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며 한 마디 하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짧지 않은 시간동안 부모는 자녀를 못한다고 그게 뭐냐고 버리지 않고 때리지 않고 기다려줍니다.  심지어 그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그 더러워 냄새나는 똥 오줌을 아무렇지 않게 치우면서도 기쁘게 엉덩이를 두드려줍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사랑하는 내가 낳은 아들이요 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인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향하여 그럴진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어떨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하기 때문에 우리 곁에 함께 하시고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를 붙잡아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당장 실수하였다는 것, 우리가 지금 당장 범죄하였다는 것, 우리가 지금 당장 넘어져 있다는 그것 또 우리에게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그 사실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우리가 누구를 바라보며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실수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넘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넘어질 수 없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평생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믿고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자 이제 그렇다면 실수가 없으신 그 하나님이 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발생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 지 살펴봅시다. 
결국 하갈은 임신하였고 그것 때문에 기고만장하여 사라를 멸시하자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였고 결국 하갈은 광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쓸쓸하고 적막한 곳, 메마르고 척박한 사막 한 가운데로 여호와의 사자는 찾아오셨습니다. 7절입니다. 
오늘 말씀의 하나님의 사자는 곧 하나님의 현현입니다. 왜죠? 13절에 보니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피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다고 고백합니다. 즉 여기서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사자로 현현하여 지금 이 가련한 여인 하갈을 향하여 찾아오신 것입니다.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하나님은 실패의 상황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아브람 가정에 있었던 비극은 이렇게 끝나나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했으니 이렇게 벌을 받아도 싸다 싶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끝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인류 최초로 실패했을때부터 성경에 나오는 수 없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그 모든 순간 하나님은 늘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냥 그렇게 두어도 좋을 사람, 그냥 그렇게 내버려두어도 당연한 그 지경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두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지가 그렇게 했으니 벌 받는 거 당연하고 고생하는 거 당연하지 라고 여겨질 수 밖에 없는 그 순간까지라도 하나님은 그대로 끝내지 않으시고 그 실패하고 낙담하고 무너진 한 사람을 향하여 변함없이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찾아오시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식이 사고를 쳤다고 나랑 상관없는 놈이라고 알아서 하라고 하겠습니까? 사고는 자식이 쳤어도 경찰서 가서 빌고 상대방측에게 손이 발이 되게 비는 것은 다 부모몫입니다. 왜요? 보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보호자이기 때문에 부모는 늘 자식이 최악의 상황을 벌여놓아도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최선의 상황으로 돌이켜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 너무 자식이 심하게 그럴 경우 혹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만은 어떤 경우에도 아무리 심한 경우라 할지라도 절대 자식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소망이요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져 있는 우리를 향해 찾아오실 것입니다. 아니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문제는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하갈을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나요?

8-9절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실패와 절망의 상황에 찾아오셔서 해결책을 알려주셨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해결책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알려주신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깊이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자가 몰라서 묻고 있을까요? 아니죠.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묻고 있었을까요? 하갈 스스로 무엇이 문제였는지 어디로 어떻게 돌아가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질문은 수 천년전 하갈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무엇인가로부터 도망치듯 어렵고 힘겨운 인생의 광야 한 가운데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가 그토록 밉고 원망스럽고 힘겨워 도망치고 싶지는 않습니까? 뭐가 그렇게 안 되고 안 풀리는지 답답하고 속상하고 마음에 짓눌림이 있어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 버리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하나님의 사자의 질문 앞에 우리는 서야 합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또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왜 이 곳에 있는지? 나의 인생에 혹시 무엇이 잘못되었고 또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깊이 되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돌아가서 다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제 위치를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끔 살다가보면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릴때가 있습니다. 주로 지갑이나 핸드폰이죠. 그때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을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었을 때 혹은 사용했을때가 언제인지 어디인지를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거꾸로 찾아가다보면 찾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었는지를 되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비극의 시작점이 어디였습니까? 4절입니다. 
하갈이 임신하였을때까지는 사실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갈이 교만하게 되고 여주인을 멸시하기 시작했을때부터 비극은 시작되었고 그 때문에 결국 사막 한 가운데 적막한 땅으로 도망 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아가야 하고 또 이제는 본인의 자리에서 여주인에게 복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삶 속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결과 아프고 쓰라린 일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큰 난관이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때마다 깊이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원래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앙이 원래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배가 원래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관계가 원래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흩어져있고 엉망징창이 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 우선 해야 할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하갈은 원래 종이었고 이제 그 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물론 하갈에게 있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사라가 학대하면 어떡하나? 과연 내가 돌아가면 우리 주인 부부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을까? 별 생각이 다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런 하갈의 마음을 모르실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조건 먼저 돌아가라고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깨닫습니다. 10-11절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가 돌아갈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해결책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친히 해결책이 되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무조건 돌아가라고 그러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잘 모르겠지만 돌아가보면 길이 있지 않겠냐고 일단 그것부터 해보자고 불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이 돌아갈 수 있는 모든 여건과 환경을 만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씨가 크게 번성하게 할 것이라는 것, 이스마엘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의미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의 이름을 주신 것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네가 그 자리에 돌아가면 결국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시겠다는 약속이였습니다. 무조건 그 자리에 가라는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가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결국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돌아가라고 하실 때 하나님은 무조건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실 때 아무 대책이나 도우심을 주지 않고 무조건 해내라고 .. 안 되면 되게 하라고 마치 특공대식의 복종을 요구하시 않으십니다. 

고전 10:13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하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으면 하나님이 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순종만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을 우리가 감당할 때 피할 길을 내사 감당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스스로 어쩔 수없이 마지못해 겨우 겨우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넉넉히 감당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일들만 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감당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저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나님이 가라는대로만 하나님이 이있으라는 곳에만 있기 바랍니다. 
그럼 됩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하루는 유명한 제지공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왕은 공장 안을 시찰하다가 휴지와 걸레 같은 너저분한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방을 보고 놀라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저것은 깨끗하고 질이 좋은 종이가 될 원료들입니다." 공장장의 설명을 들은 여왕은 더욱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렇게 더러운 것들이?" 궁전으로 돌아온 여왕은 며칠 후 그 제지공장으로부터 아름답고 깨끗한 편지지 묶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것은 며칠 전 여왕이 보았던 바로 그 더러운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공장장의 편지 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걸레 같던 종이들이 아름다운 편지지로 변화되어 지금 여왕 폐하의 궁전에 가 있듯이 완악한 죄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면 언젠가 주님이 오시는 때에 하나님 나라 궁전에 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지금 어디인가가 아닙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는데로 가고 하나님이 있으라고 한 곳에 있으십시오. 그럼 쓰레기 같던 종이들이 아름다운 편지지가 되듯 우리의 인생도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편지지의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기도의 자리입니까? 예배의 자리입니까? 말씀의 자리입니까? 아내의 자리입니까? 어머니의 자리입니까? 며느리의 자리입니까? 어떤 자리입니까? 어느 위치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자리를 깨닫게 하셨다면 힘들고 어렵지만 돌아갑시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다시 은혜를 베푸시고 넉넉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행복하고 축복된 또 다른 시작이 이루어지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40일 캠페인중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바로 하갈이 만난 그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 엘로이입니다. 
엘은 하나님, 로이는 보다입니다. 엘로이는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살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엘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아브라함의 가정에 나타나셨습니까? 
첫째, 아브람과 사래 하갈까지 모두 실수하고 넘어졌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사고를 쳤지만 엘로이 하나님은 그 모든 사고를 해결하십니다. 

어떻게 해결해나가십니까?
첫째, 실패의 현장에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으로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둘째, 해결책을 제시하여 주십니다 

해결책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깊이 생각해보고 원래 있어야 할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돌아가라고 하셨나요? 아니죠. 돌아가게 하시겠다고 축복해주시겠다고 책임져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해결책만 던져주고 알아서 하라고 하시는 분이 친히 해결될때까지 함께 하셔서 결국 해결해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우리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이 엘로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실수와 실패와 넘어짐가운데서 어떻게 우리를 회복시키시며 문제를 해결하시며 다시 온전케 하실지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엘로이 하나님이 늘 우리를 바라보고 있듯 이제 우리도 눈을 들어 이 엘로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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