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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요 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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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 (요 4:1-15) 

오늘 성경본문은 우리가 어떻게 전도를 하는냐에 대한 예수님의 방법이 적혀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예수님의 전도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에 더욱 쓰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하는데 가장 길게 대화를 나누시며 전도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르실때도 긴 대화를 하시지 않았고 단순한 명령속에서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드로,안드레 요한등을 부르실때는 와보라,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등으로 부르셨고 세리마태를 부르실때도 나를 따르라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부르실때도 내가 오늘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는 말씀으로 그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쉽게 한마디말로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한마디만해도 따라오겠지만 그러나 오늘 사마리아여인처럼 긴 시간을 내어야 하는 경우도 발생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과 여인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중요한 전도의 진리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의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유대를 떠나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는 길어었습니다. 말을 탄것도 아니요 마차를 탄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적어도 이틀이나 걸려서 이 사마리아 땅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정오였습니다. 중동의 햇볕이 가장 강렬한 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지친상태를 성경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대로는 지쳐서 털석 앉으신 모습입니다. 배도 고팠셨고 피곤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우물가에 단지 쉬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로 통과하여야하겠는지라.  그곳으로 오신 이유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기 위하여 계획속에서 들리신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롯 힘든 몸을 이끌고 배고 고프셨지만 이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서 우물가에 가셨던 것입니다. 전도를 할 때 힘이 들고 육신적으로 쉬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을때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것을 이겨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무리도 아닌 단 한 영혼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에 찾아오셨습니다. 지치고 피곤하여 그냥 말도 걸지 않고 쉴수 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피곤을 극복하시며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더욱이 이 사마리아땅은 유대인들이 멸시하며 천대하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앗수르에 의해서 정복을 당한 북 이스라엘땅이었던 이곳은 앗수르의 민족말살정책인 다른 민족이 이곳에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유대의 순수혈통이 사라진 사마리아 땅이 되었고 유대인들은 부정한 땅이라고 생각을 하여 이곳을 아에 지나가지도 않았던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곳을 일부러 방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부정한 사마리아땅에도 복음이 전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사마리아 땅에서는 어쩌면 가장 천대받고 외명당하던 한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땅에 복음을 전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복음이 필요한곳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노인이시든 젊은 사람이든 , 병든자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그 어떤 사람도 그 선진국이든 아마존의 원주민이든 어떤 나라에도 복음은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할때도 사람을 가리기도 합니다. 옷을 깔끔하게 입은 사람을 선호하고, 건강하고 젊은 사람을 선호하고 똑똑한과 착한 사람을 선호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반대 였습니다. 가난하고 천대받고 외면받으며 외로운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사마리아땅에 복음을 전하는 첫 번째 선교사의 역할을 감당하시고 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기준방법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전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1: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아무육체도 하나님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의 미련하고, 약한 사람들, 세상의 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을 택하사 지혜있고, 강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폐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사마리아여인과 같은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민족적으로도 멸시를 받았던 사마리아땅이요, 개인적으로 멸시를 받았던 여인을 부르사 하나님은 사마리아 최초의 선교사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 여인으로 인하여 사마리아땅에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러한 사람을 주님께서 인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철저하게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다른사람과 쉽게 교제하기를 꺼려하며 다른사람에게 자신을 쉽게 내어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더욱더 낮아지는 자세가 요구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먼저 다가가시고 말을 걸어셨습니다. “물 좀 달라” 그러나 예수님의 이 한마디의 말은 쉬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장벽을 뛰어 넘어야만 나올 수 있는 한마디 말씀이셨습니다. 물을 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을 때 이 여인의 대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이 대답하기를 “유대인으로써 어찌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하시나이까?”

예수님과 이 여인의 사이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라는 장벽 또한 있었습니다. 더 나아간다면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과 남편다섯이나 바꾸며 살았던 죄인이라는 장벽 또한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상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물건을 함께 쓰지 않았다는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인들이 사용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했던것입니다. 그 만큼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땅에도 발을 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낯선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쉽게 말을 걸지 않았던 시대였습니다. 남성우월사상이 가득히 깔려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분의 높고 낮음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부자 가난한자. 권력을 가진자 없는자, 학식이 있는자 없는자등 이러한 장벽이 사람들 사이에는 언연중에 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쉽게 다가가기를 꺼려합니다.  “내가 저런 사람들과 어울려야 되겠나?” 하는 우울감속에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유상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셨습니다. 복음은 전하는데 있어서는 그 어떤 장벽도 있을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너무나 겸손한 어쩌면 비굴하기까지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무엇을 주장하는 말씀이 아니라 아쉬운 듯 부탁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영광보좌를 버리시고 우리를 구워하시기 위해서 낮고천한 이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의 죽기까지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구원에 있어서는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었고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가 무엇이 아쉬워서 당신들 같은 사람에게 차 한잔 하고 가세요라고 말을 해야하고 또 고개를 숙이고 낮아져서 그들의 푸념과 또 무관심과 외면을 당해야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머 니 잘되라고 전도하지 내 잘되라고 하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존심이 심하게 상할때는 “지옥가든 알아서 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 유대인의 신분, 남자의 신분, 부탁을 해야 하는 자존심까지 다 내려놓으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시며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역사는 이렇게 낮아 짐으로부터 시작”이 됨을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낮아지지만 전도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과 외면과 비난입니다. 마치 이 사마리아 여인에 예수님께 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여인은 똑 쏘아붙이듯이 예수님께 대답을 합니다.“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한마디로 왜 나에게 말을 거는냐는 것입니다. “말걸지 말세요..대답하기 싫어니간”  여인의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그만 전도를 두셨다면 이 여인에게는 인생의 문제의 해결도 메시야를 만나는 기쁨도 최초선교사로써의 영광도 누리 지 못하였을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이 여인이 알면 정말 정말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고 그것을 알려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하나님의 선물과 메시야가 필요함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이 필요합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영혼의 만족함을 가져다 줄 생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러한 것이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불신자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자가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영혼의 목이 말라 갈급하는 그들에게 영혼의 만족을 줄 수 있는 생수가 있음도 알려주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찾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찌라도 그들의 내면에는 하나님을 찾고 무엇인가 만족함을 찾고 있어며 그래서 결국 구원자를 찾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왜 고통당했어며 왜 힘들었는지  그들이 진정으로 찾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영적으로 무지하기에 깨닫지 못합니다.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을 깊은데 당신이 어디서 생수를 얻겠습니까?

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닙까?“ 

육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요즘사람들은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돈만 주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사는데 어떻게 교회다닌다고 하나님이 먹여주고 입혀주냐? 
 
예수믿기만하면 돈이 벙벙벌리는냐? 일하러 안나가고 예배만 드리면 돈이 벌리는냐? 그들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돈을 벌려면 주일에도 뼈빠지게 일해야 하고 하는데 바빠죽겠는데 무슨 예배냐? 주일에는 쉬야지.. 또 교회가면 헌금하라 머하라 하는데 돈아까워서도 못가겠다 고 합니다. 라고 말을 하는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에서 돈이 다가 아님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돈이 많이 있다고 잘먹고 잘산다고 영혼의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욕심은 끝이 없고 그래서 벌어도 벌어도 더벌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돈 많은 삼성재벌그룹의 딸이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은 자살을 하였습니다. 최진실, 그 동생, 현대그룹 정몽헌의 자살, 중고등학생들의 자살등 그들이 돈이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만족 행복이 없다면 사람들은 방황하게 되고 결국에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자살로까지 가게 됩니다. 한국은 자살공화국, 우울증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고있습니다. 과거보다 훨씬 잘먹고 잘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의병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예수님 안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있습니다. 
이 생수를 마시면 다른 그 어떤것으로도 만족함을 얻을수 없었던 갈급함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속에서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 여전히 물질적인 것을 요구합니다. “그 물을 나에게 주어서 다시는 여기에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눈에는 여전히 물질적인 것이 있어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꽐꽐 솓아나는 생수만 있어면 여인의 물 떠러 오는 고달픈 인생은 끝이 날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마치 롯또에 당첨만 되면 인생이 한방의 모든문제가 끝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적인 것이 주어진다고 영혼의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습니다.“행복은 도리어 자신이 현재 가진것에 만족할 때 찾아온다”고 합니다. 더 많이 벌고 더 가질려고 할수록 갈증은 더 심해지고 행복은 더욱더 멀어지기만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영혼의 만족이 있을 때 찾아옵니다. 오직 영혼의 만족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는 여인의 요구에 예수님은 이 여인이 이제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제 무엇인가를 찾고자하는 소원이 생겼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뛰어 넘어야할 부분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죄문제이자 ,인생의 문제였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남편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그 여인에 있어서 인생에서 가장 큰 희망이었지만 가장 크게 고통을 주는 문제였습니다. 여인은 남편으로 인하여 자신의 꿈을 펼쳐보고자 하였지만 도리어 그것이 그 여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올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돈을 쫓아가면 돈이 사람을 무너뜨립니다. 사랑을 쫓아가면 그 사랑이 자신에게 아픈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사람을 믿고 따라가면 그 사람이 자신에게 깊은 배신감을 가져다 줍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남편이라는 존재는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은 꺼집어내어서 이 문제를 이해해주시고 해결해주심으로써 여인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볼수 있는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도울 때 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을 터치하고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그 부분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함께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이 됩니다.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 어쩌면 그냥 건드리지 않고 싶은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건드리면 내가 함께 힘들어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괜히 건드려서 터져 버리면 내가 그것을 어떻게 수습하나하는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니가 해결하고 나는 고상하게 복음만 전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가장 아픈, 인생에서 어느 누구도 그 문제를 꺼내기 힘들어 하는 어려운 고통스러운 문제를 터치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받아들였습니다. 한단계 영적인 진보가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사람의 문제를 안고 함께 아파하고 기도해줄 때 그들은 한걸음 한걸음 예수님께 나아가 주님의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 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의 진정한 영적인 고민을 예수님께 털어놓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궁금했던 예배의 장소의 문제였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은 사마리아땅인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문이 이제는 영적인 관심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대한 마음이 생겨난것입니다. 세상의 고민 , 물 떠르오는 세상 살이의 힘듬 남편 문제 이러한 모든 것을 떠나서 이제는 진정코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전도를 통해서 만난  사람들이 “그럼 어떻게 하면 되요? 교회가 어디에요? 언제 예배들 드려요?”라고 물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역사가 매주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자세히 설명을 해줄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이것이 만나서 반갑습니다 교제로 교육을 해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배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때가 오니니 곧 이때라 

이 말을 들은 여인은 드디어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녀는  진짜 메시야를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진짜 자신을 죄악에서 구원할 구원자를 찾았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그녀가 찾았던 구원자는 자신의 앞에 서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네가 말하는 내가 그로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나타나신 메시야 구원자였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눈앞에 계신 메시야를 보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직접 구원자가 자신에게 다가오시고 그분이 자신을 만나주시고 대화해주시고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새신자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그 사람의 마음을 만지시면 그 사람은 메세야를 만난기쁨으로 어찌할줄을 모를것입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릴것입니다. 그리고는 달려갈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무엇을 하러 왔는지도 잊어 버린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당장 먹고사는 물문제가 급한 것이 아니라 구원자를 전하는 것이 더욱더 중요한 삶이 되었습니다.그리고는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여인은 자신 동네에가서 자신을 멸시하고 멀리하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간증을 하면서 구원자 곧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제까지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삶에 대해서도 떳떳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그는 그리스도가 아닌가? 

우리가  새신자에게 보고 싶은 모습이 이러한 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현재 이렇게 예수님을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너희들도 와서 보라 그는 진정코 우리 인생을 구원할 구원자가 되신다.” 

이렇게 외칠 때 그것을 바라보는 주님의 기쁨이 얼마나 크시겠습니까? 그리고 전도자의 기쁨이 얼마나 커겠습니다. 

이 여인의 간증으로 통하여 사마리아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세상에 오신 구주로 영접하는 일들이 벌여 졌습니다. 
이 여인으로 인하여 이방땅 멸시천대 받던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었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을 준비해서 달려온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따로 있다 그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고 눈물로 기도했던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 볼때에 우리는 예수님처럼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것입니다.

정말 이 기쁨 때문에 이영희 장로님과 여기에 계신 분들이 지금도 복음을 전하고 있는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이 지금도 세상의 밭은 희어져 있습니다. 추수할때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세의 때요...대구인구의 90% 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은 대구의 밭이 희어져 추수할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 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축복이라는 이미 삯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삯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영혼을 추수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행할 때 씨를 뿌리신 사람과 그것을 거둔 사람 모두 함께 즐거워 하게 될것입니다. 

저 또한 제자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사명을 받고 왔습니다. 제를 이곳에 보내신 이유를 어제사모님과 대화를 하면서 또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대학4학년때 들어간 대학생성경읽기 선교회는 오로지 믿지 않는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대일로 성경공부를 하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회개하고 주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훈련시켜서 또 다시 복음을 전하는 목자로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해도 저는 제자삼고 일대일하는 사역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경험과 소원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아닌가 생각을 하였습니다. 
 
우리 제자교회가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이 여인과 같은 사람을 구원하여 다시 또 제자를 삼는 역사가 일어나는 귀한 교회가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되실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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