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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민 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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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민 6:22-27)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생물들에게 복주셨다(창1:22). 또 사람에게도 복주셨다(창1:28). (히6: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이처럼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복과 축복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복과 축복을 혼동한다. 축복은 사람이, 복을 빌 때 쓰는 말이다. 빈다는 말은, 보다 더 높은 분에게, “복을 빌어 달라.”는 말이기에, “하나님 우리를 축복하소서!”라는 말은, 잘못 사용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 복을 빌어주는 분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을 주실 때,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한다. 특히 주의 종인, 제사장들을 사용하신다. 궁극적인 제사장은 예수님이요, 교회에서는 목사를 통해 성도를 축복하고,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 세상을 축복하기를 바란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세상과, 사랑하는 자녀를 축복하기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싶어 한다. 주고 또 줘도, 전혀 아깝지 않고, 기쁨과 보람이 있다.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면,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는 것을 아까우면, 그 사랑은 가짜일 수도 있다. 부모님의 사랑은 보라. 모두 다 준다. 

사랑하면 다 주고 싶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사랑하는 새끼를 위해, 어미는 자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함을 많이 볼 수 있다. 연어는 알을 부화하기 위해, 수천km를 헤엄쳐 와서,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회귀한다. 거기서 알을 낳고, 자기는 죽는다. 

그때 자기 새끼들에게 몸을 주는데, 몸을 뜯어 먹고 성장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되,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랑을 하셨다.. 자신의 독생자를, 원수를 위해 주시는 사랑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지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도 된다. (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여기에 원한다는 말씀이, 3번 기록되었다. 주님이 복을 주는데, 너를 지키기를 원하고, 네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고, 평강 주기를 원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말씀하신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은 어떤 복을 주기 원하시는가? 

1. 하나님은 보호자가 되기를 원한다(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복을 주시는 분은, 다른 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요,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요, 살아계신 분이다. 

(1) 누구에게 복을 주는가? 

‘네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내게 복을 주신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향해 찾아와 복을 주신다. 우리가 누리는 복이, 하나님에게로부터 옴을 믿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요, 또 복주시기를 기뻐하는 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께 무릎 꿇고 사는 복(바라크)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은, 교만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복을 받지 못하고 허덕이면서, 저주 가운데 사는 사람이 많다. 

(2) 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① 복 주는 분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태양이 복주는 줄 알고, 해맞이하려고, 동해로 달려가는 모습은, 기가 막히다. 태양에게 소원을 빌고, 달에게 소원을 빌고, 돌이나 나무에게 복을 비는, 어리석은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행동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지 못하기에, 엉뚱한 곳에 복을 빈다. 우리에게 복 주시는 분은 태양도, 달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임을 알기 바란다. 지금도 살아계셔, 우리를 사랑하고 지키시는, 하나님임을 믿기 바란다. 

②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원인이다. 
하나님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창조하고, 그곳에서 누리며 살도록 주셨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복을 받았지만, 그만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이유는 불순종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주님의 말씀을 의심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인간에게 치명적인 죄가 찾아왔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땅과 인간은 저주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복을 회복하는 비결은, 잘못된 부분을 다시 살리면 된다. 

(3) 하나님이 주신 복을 회복하려면, 하나님께 다시 나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신명기의 주제는 한 마디로 ‘지켜 행하라.’이다. 순종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복이 찾아오고, 저주가 물러간다. (신28:2-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면, 개인도, 가정도, 국가도, 복을 받게 되어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최고의 순종은,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일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예수님은 안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이는 정말, 미련한 짓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려고,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들의 죄와 저주를 청산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이 사실을 믿고 따를 때,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 임한다. 

(3) 이 사실을 믿는 자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놀라운 복이 임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가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지켜주신다. 아버지이기에, 악에서 지켜주고, 보호해 주신다. 복중에 복은 지켜주는 복이다. 

지킨다(솨마르)는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가시로 울타리를 쳐서, 보호해주신다. 악한 원수 마귀는 조금도 쉬지 않고, 우리 인생을 향해서 공격해온다. 때로는 간교한 유혹으로, 때로는 무서운 핍박과 환란으로 공격한다. 

이때 악한 원수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쳐서 철저하게 지켜주신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인간을 넘어뜨리고, 멸망하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요10:10上) “도둑이 오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고 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얼마나 병도 많고, 사건 사고도 많은가?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로부터, 피할 길을 주시고, 지켜 주신다. 


2.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기 원한다(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얼굴을, 우리에게 비춘다고 했다. 하나님은 영이라, 모양이 없는데, 성경에는 종종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의지를 상징한다. 잠자는 어린 아기를 사랑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엄마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씀이다. 비추다(오르)는 빛나게 한다는 말로, 영광스럽게 빛나게 하다는 말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면, 인간에게는 절망과 죽음이 임하게 된다. 

(욥13:24)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하였다. 하나님의 얼굴을 비춘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과 기쁨을, 충만하게 부어주신다는 의미다. 부모와 자식과의 사이가 좋은 관계라면, 서로 얼굴 마주 대하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이가 결코 좋지 않으면, 아무리 나를 낳아준 분이라도, 꼴 보기가 싫어서, 기쁜 얼굴로 대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사이인가?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얼굴을 비춰서 은혜주기를 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정말 하나님께 은혜 받고, 사랑 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나와야만 한다. 그리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출33장)에 여호와는 모세에게, 내가 맹세한 땅을, 너희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 땅에 거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 그러나 너희와 함께 가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퍼하였다(1-4).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고, 그 땅을 정복하는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조건 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얼굴’을 주심이, 인류최대의 복이다. 하나님은 영광의 빛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비추신다. 성도들이 모인 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들을 복을 주며, 영광을 비추어 주신다. 

그래서 어두움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신다. 실패가 없고, 고통을 모르게 하신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심이, 가장 큰 저주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를 떠남이, 가장 큰 저주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모두 다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다. 

(시51:9-11)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님의 영광이 떠나고, 성령이 떠나면, 나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으니, 제발 주님의 영광을 내게서 떠나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다. 은혜 베푼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난(ן󰗻󰖎)’이다. 이는 본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상체를 굽힌다.’는 뜻이다. 이처럼 은혜는 ‘자격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다. 

우리 인생이, 아주 그럴듯하게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추한 죄인이요, 낮고 천한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의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신다.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세밀하게 응답하여 주시는, 참 좋은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기를 기뻐한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주님의 크신 능력을 믿고, 구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한 여인이 예수님 뒤로 다가와, 옷자락에 손을 댔다. 

그때 그 여인에게, 주님의 능력이 임하여, 12년 동안 고통당하던 질병이, 다 해결됐다. 그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그 믿음대로 치료를 받았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한번 비추면, 어떤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제게 얼굴을, 한번 비추어 주세요. 저를 한번 쳐다봐 주세요.” 그러면 우리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복잡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내게 얼굴을 한번 비춰주면, 질병도 치유되고,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한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하루도 살수 없다. 은혜가 있어야 산다고, 겸손하게 믿음으로 고백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놀라운 은혜를 모르니 문제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세상의 힘과 능력을 더 의지하니, 주님이 얼굴을 돌린다. 


3. 하나님은 평강 주기를 원한다(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평강은 ‘솰롬’ 평안이다. 이 평강과 평안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평화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지 못하면, 그 영혼은 곤고하고, 불안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죄의 은총을 받은 후에, 진정한 평안을 경험한다.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평강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사는 ‘솰롬’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쓰는 인사도 뜻이 같다. 

우리는 ‘안녕’이라고 인사를 한다. 안녕이 평강, 평안, 평화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드사, 평강, 안녕주시기를 원한다. 이 평안을 구하면, 주신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안녕하지 못하는가? 왜 사람들이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떨며 사는가? 그 이유는 죄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 모든 인간은 죄에 종노릇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자, 평안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임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빛이신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두움 속에 있기를 좋아한다. 우리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요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참 빛이다. 예수님 세상에 오셔서, 각 사람에게 빛을 비췄다. 그러나 영접하지 않았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자는, 죄 문제를 해결 받게 되고, 결국 평강을 누리게 된다. 

은혜는 구원의 시작이고, 평강은 구원의 결과다. 은혜는 구원의 시작이고, 평강은 구원의 결과다. 구원은 은혜를 입어야 이루어지고, 평강은 구원받은 사람만이, 누리게 된다. 혹시 우리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왜 구원을 받았어도, 평강이 없는가?” 그 이유는 하나다.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내 친엄마가 아니라고 믿으면, 절대 자식은 평안하지 않다. 그런데 엄마가 친엄마라고 여겨지면, 매를 때려도 좋아한다. 징계를 해도 도망갈 수 없다. 그 품에 있을 때, 평강을 맛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며, 예수님도 평강의 왕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함께 하면, 평안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귀가 내 왕이면, 아무리 많은 것으로, 평강을 누려보려 해도,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평강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하라 했다. (22-2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누가 누구를 축복해야 하는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세운 종들이다. 그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축복하라고 했다. 그들이 축복하면, 어떻게 하시는가?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그러면 축복은 누가하나? 제사장이 한다. 그러면 복은 하나님이 주신다. 주의 종이 믿음으로 축복하면, 책임지는 분은 하나님이다. 

따라서 주의 종들의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한다. 축복하면 하나님이 그 축복대로, 복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는 그 복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 복 주기를 원하는 하나님, 그 분 앞에서, 그 복을 받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복을 비는 마음이다. 남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는 마음은,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가장 아름답고 선한 마음이다.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삭막해 지는 이유는, 남을 축복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은 많아도, 주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남을 해치려는 사람은 많아도, 도우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을 저주하는 사람은 많아도, 축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어두워진다.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을, 따뜻하고, 부드러운 세상으로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다. 그러므로 복 주기를 원하는 하나님께 나와, 복을 받고, 이 세상과 자녀들을 축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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