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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알에게 꿇지 않은 무릎 (왕상 19: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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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에게 꿇지 않은 무릎 (왕상 19:15-18)


오늘 같은 설날 저는 과거 추억이 생생합니다. 이날이 되면 아버지 형제가 4형제였었는데 온 가문이 큰 집으로 모여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 제사 문제가 꼭 저에게 걸렸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상 숭배냐 아니냐 하는 신학적 논란은 지금도 끝이 안 났습니다. 그냥 교단에 따라서, 목사에 따라서 해석할 뿐이지 이것이 옳다 틀리다 하지 않습니다. 우상이란 뭐냐?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겼을 때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그런데 “제사는 절대로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문화적인 효의 문제이지 이것은 우상의 개념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신학의 기초로 “제사는 지내려면 지내고, 말려면 말아라.” 하는 편이 있는가 하면 그 다음에 아주 보수적인 목사님들은 “절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무엇을 앞에 놓고 절하는 것은 무조건 우상숭배이다.” 이렇게 가르쳐서 혼란스럽습니다. 

아마 오늘 아침에도 교우들 간에 그런 문제가 많이 있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은 제사를 절대 반대하셨습니다. 우상숭배이니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날이 되면 밤새도록 그 전날 잠을 못자고 ‘내일 아침 온 집안의 제사에 참여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때 저는 10대 시절로 열 네댓 살이었는데 문제는 1년 중에 제일 맛있는 떡만둣국을 제사를 안지내면 못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왕따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저를 왕따시켰던 집안 90퍼센트 이상이 다 교회에 나옵니다. 

이제 한 5퍼센트만 전도되면 100퍼센트 나옵니다. 지금 만나서 옛날 이야기하면 재미있습니다. 그때 저는 무슨 생각했느냐? ‘바알에게 무릎 꿇으면 안 된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게 바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알에게 무릎 꿇으면 우상숭배이다.’ 아주 철저했습니다. 이 열왕기상 19장을 많이 읽었습니다. 다니엘이 절대로 절하지 아니한 성경구절도 많이 읽어보았던 과거가 이때가 되면 늘 생각이 납니다. 이 열왕기상 19장은 구약 가운데 비중이 큽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오늘 처음 설교합니다. 

어느 민족이든지 그 민족이 지닌 독특한 성격과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국 민족의 특징이 뭐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단일민족입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그렇게 질문하면 합중국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색깔이 진하고 뚜렷한 민족이 있습니다. 유대민족입니다. 유대 민족에게 물으면 분명합니다. 우리는 택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온 세계 민족 가운데 그렇게 대답하는 민족은 그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 생긴 철저한 사상이 하나 주어졌습니다. 선민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온 세계 모든 민족 가운데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 민족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어떤 고난의 역사에도 살아남습니다. 그게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살아남습니다. 반대로 모든 민족에게 왕따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들 중에 이스라엘 좋아하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습니다. 다 싫어합니다. 

그 선민사상 때문입니다. 같이 못삽니다. 신구약 성경에 아주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선민사상이 시민생활에 준 영향은 혼혈이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해서 배타 감정이 문화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창세기 34장을 보십시오.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이 있습니다. 나그네 생활 하던 중에 히위 족속 마을에 가서 잠깐 머물렀는데 매우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야곱의 딸이 히위 족속 추장 세겜한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겜은 아주 신사적으로 야곱을 찾아옵니다. “내가 당신의 딸을 성추행한 것이 아니고 너무나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한테 시집을 보내면 내가 평생 행복하게 잘해주고 반대로, 우리 히위 족속의 딸들이 여러분 마음에 들면 누구든지 데려다가 사십시오. 그래서 같이 삽시다. 당신들을 보니까 나그네인데 여기서 사십시오. 살 수 있는 땅도 주겠고 당신들 마음대로 매매하고 기업을 만들고 사돈을 맺어 행복하게 함께 삽시다. 우리 딸들 다 데려다 사십시오. 당신 딸만 나한테 주십시오. 정식으로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면 불행이 오히려 복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이 속임수를 씁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할례 받은 민족입니다. 

당신들도 우리처럼 할례를 받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히위 족속들은 “할례가 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합의가 이루어져서 야곱의 아들들이 히위 족속의 아들들을 할례를 시켰는데 제 생각에는 무자비하게 시킨 거 같습니다. 창세기 34장 24절에 나옵니다.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할례를 받으면 남자들은 적어도 일주일동안은 중병입니다. 이 사람들이 의학적으로 세밀하게 했겠습니까? 무자비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 고통 중에 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들이닥쳐서 히위 족속 남자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유대인 문화입니다. 피가 섞이는 문제를 가장 싫어하는 선민사상의 민족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민사상이 자신들의 우월감을 넘어서 타 민족에 대한 멸시 문화로 만들어진 것이 유대인에 대한 불행입니다. 이러한 선민사상은 지금도 존재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에 가시면 조심하셔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제일 많이 갑니다.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 예루살렘에서 빈 접시 하나 달라고 해서 웨이터가 갖다 주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특별한 문화가 있습니다. 

여행 다닐 때 음식을 좀 싸가지고 다닙니다. 고추장, 김, 깻잎, 무말랭이, 멸치볶음, 컵라면을 다 싸가지고 다닙니다. 야금야금 또 먹습니다. 그래서 비닐봉지에서 그 빈 접시에 한국 음식을 놓는 순간 그 웨이터가 빼앗아서 그 자리에서 박살냅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우리 선민의 그릇에다 어찌 이방인의 물건을 담느냐?” 그릇을 깨뜨립니다. 실제로 그럽니다. 왜 그토록 배타 문화가 생겼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게 있습니다. 종교의 혼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유일신 하나님, 한분 밖에 안 계신 하나님입니다. 십계명에도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절대 섬기지 마라. 우상 앞에 절하지 마라.”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절대적 신앙 유일신 개념이 인종 문제까지 번졌습니다. 하나님은 인종 문제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분만 섬기라 하시는 것이지 그 섬기는 신앙을 다른 민족에게도 나누어주라는데 유대 민족은 그것까지 생각을 못하고 아주 배타감정을 가지는 것이 유대인의 불행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 문제는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여러분! 수제자 베드로마저도 유대니즘에 사로잡혀있지 않습니까? “예수의 복음은 유대인에 국한한 것이다.” 베드로도 이방 사람에게 전도를 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로마 사람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환상을 주어서 서로 만나게 하고 고넬료가 최초의 이방인 세례자가 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베드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8절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줄 너희도 알거니와” 위법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심판 받아야 합니다. 유대인은 비유대인과 만나는 자체도 유대인 율법에 어긋나는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사상을 깨뜨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부터 큰 역사를 하셨는데 그것이 요나입니다. “넌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전도하라.” 요나는 말을 안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안 듣습니다. 사실 니느웨로 가려고 하면 동북쪽을 향해서 가야 하는데 그래서 정 반대 서쪽으로 도망가지 않습니까? 더 갈 데가 없는 스페인 바다까지 갔습니다. 

여러분! 지금 스페인 바다까지 가시면 “여기가 요나가 온 배”라고 말해주는 관광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가라고 했으며 요나는 왜 도망갔습니까? 구약의 요나서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선민사상을 깨뜨리기 위한 것으로 니느웨는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데 B.C 722년에 유대 나라를 침략한 역사가 있는 원수국가입니다. 요나의 머릿속에는 ‘저 원수들은 빨리 멸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소멸되어야 된다고 믿고 있는데 거기 가서 나더러 전하라니!’ 그래서 절대 반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양보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요나를 기어코 보내서 니느웨 백성 12만 명을 구하는 역사를 우리가 요나서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 있는 사도행전 1장, 마태복음 28장은 똑같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온 세상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복음 즉, 하나님 구원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보편주의로 성경에 나타나는데 유독 유대인들이 이것을 잘못해서 그런 문화를 만들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철저하게 하신 것은 인종문화가 아닌 신앙의 목표 대상인데 유대인 문화는 인종 문제까지 번져나가서 이게 아주 크게 잘못된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기 32장에 금송아지 사건이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뛰노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사건으로 3천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무자비성이 나타나는 유일신 사상이 있습니다. 구약을 잃어보시면 집안의 나무 조각 이상한 것 하나도 신개념이 들어있는 것은 어떤 내용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이나 만들지 말라. 나 외에는 다른 신 절대 섬기지 말라.”

이러한 그들의 사상이 민족사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만난 때가 왔습니다. 아합이 왕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 아합은 정치적 능력이 좋은 사람입니다. 이웃 나라 시돈과 자꾸 전쟁이 나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침략을 안당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그 집 딸을 내가 데려다 부인으로 삼으면 되겠다.’ 그래서 시돈 왕의 땅 이세벨을 부인으로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로워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세벨이 와서 “우리나라 국교는 바알이야.” 유일신 하나님 섬기는 것을 다 없애버리고 바알을 장려했고 아합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정신적으로 혼란해졌습니다. 

여러분이 마귀 평가를 과소평가했다가는 큰일 납니다. 일본은 한국에 왔을 때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 대신 신사참배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공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존경받는 목사님들 다 그 앞에서 절했습니다. 안하면 다 죽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순교당한 것입니다. 북한 공산당 정부는 북한에서 교회 다 없애는데 성공했지 않습니까? 교회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마귀의 능력입니다. 유대 나라도 아합 왕의 협조로 말미암아 이세벨이 성공해 바알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때 이것을 마지막까지 물리친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한때는 엘리야가 성공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죽였는데 이세벨이 물리적 힘을 동원하니까 도망가지 않습니까? 40일이나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호렙산 로뎀나무라고 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가시나무입니다. 그 밑에 머리를 처박고 “하나님! 날 죽여주십시오.” 우리 사람이 어떤 고난을 당할 때 그 괴로움의 극치를 나타내는 말을 죽고 싶다고 표현합니다. 엘리야는 죽고 싶었습니다. 왜 죽고 싶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있는 일 아닙니까? 그 성역의 실패가 주는 회의감 때문에 엘리야가 지금까지 다른 일을 했다면 모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했다가 망했다든지, 국회의원 되려고 했다가 떨어졌다든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사상을 끝까지 붙들고 지키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것만 버렸다면 엘리야는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생명을 걸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나까지 생명이 위태롭게 한다면 내가 이세벨의 칼에 죽어야 되겠습니까? 그 비참한 죽음을 내가 보지 않게 지금 나를 죽여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 모욕감과 패배감에서 나를 구원하여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더 살아야 될 이유도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지금 떼쓰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 일 하다가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6·25 세대는 기억나실 것입니다. 6월 28일에 서울은 벌써 함락 되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세상은 벌써 뒤집혔습니다. 남한의 예배당들 삽시간에 공산당 사무실로 바뀌었습니다. 일주일 전에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예배드리던 거룩한 성전이 마귀 집단 소굴로 변했습니다. 예배당 안에서 공산당 군인들이 군화 신은 채로 강대상에서 다 잠자고 성찬기 꺼내다가 담배 재떨이로 삼았고, 십자가 떼어버리고 김일성 사진 매달았습니다. 

여러분! 서울 영락교회를 가보십시오. 김응락 장로 순교비가 예배당 옆에 있지 않습니까? “너 뭐야? 이 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죽여 버렸습니다. 일주일 만에 이렇게 세상이 변해버렸습니다. 그때 “하나님! 저런 마귀들을 왜 저렇게 버려두시나이까? 그러면 하나님도 눈감아주고 이제는 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땅은 완전히 마귀 집단으로 만드시려고 그냥 두시는 겁니까?” 얼마든지 우리도 똑같이 엘리야의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지금 “죽는 것이 낫겠다. 이 꼴 보기 싫다. 이세벨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에 죽겠습니다. 영광스럽게 죽여주십시오.” 

그 다음에 더 낙심이 온 것은 동역자도 하나도 없어진데서 낙심이 왔습니다. 여기 10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앞장서서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고 칼로 주의 선지자를 죽이고 있나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리의 파수꾼은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시나이까?” 성경에 보면 똑같은 경우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만 서있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의 일생을 통해서 가장 간절한 기도를 한 대목이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당할 때입니다. 

천사의 통보를 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 나가서 몇 번 동안 반복기도를 합니다. 마지막에는 “만약 의인 10명이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이 10명만 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그러지 않습니까? 하지만 의인 10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멸망했습니다. 모세의 경우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기도했는데 신학자들은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때 모세에게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지 않았다면 모세는 거기서 그냥 죽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백성을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없었을 때 하나님 앞에 담판 기도를 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면 될 것이다.”라고 해서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새로운 이정표를 이렇게 하라.”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똑같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세 제자를 데리고 가셔서 “내가 동역자가 필요하다. 한 시간만이라도 나와 함께 기도 좀 해라.”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 동역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나 혼자 남았나이다. 이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이 엄청난 마귀의 세력을 이겨낼 수 있겠나이까? 죽여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오늘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7천인을 남겨두었으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는 지금 혼자만 남았다고 소리를 쳤는데 하나님은 “7천명이나 그대로 있다.” 말씀하십니다. 

어느 때 우리는 외로이, 외로이 혼자만 나만 이렇게 남았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영국 사람이 평양에 다녀온 간증이 세상에 많이 퍼졌습니다. 평양을 갔는데 어떤 사람이 따라붙었습니다. ‘외국 사람이니까 호기심이 나서 따라붙었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조금 가깝게 따라오더니 아무도 사람이 없는 으슥한 골목을 돌아갈 때 주머니에 쪽지 한 장을 쓱 집어넣고 도망갔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래?’ 한국말로 쓰여 있으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잘 숨겨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통역을 부탁했는데 그 말은 이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자유세계에 가시면 지금 북한에는 자유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수없이 많이 기도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오.” 한국말로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영국 사람이니까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가 그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간증하며 다녔습니다.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엘리야에게 새 역사를 제시합니다. “일어나 기운을 차리고 너는 나의 구원의 역사에 이제부터 새 역사를 창조하라.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라. 님시의 아들 예후를 찾아가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후계자를 삼으라.” 

하나님 구원의 역사의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고난은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다 심판했는데 새 역사가 창조됩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십시오. 다 심판받았는데 새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새 역사 창조에는 반드시 어떤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학대 역사 속에서 약속과 자유의 땅을 찾아갈 때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 정복의 험난한 그 과정에는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없으면 안 됩니다.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민족의 침략으로 인한 민족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세계 선교의 역사 출발은 누구도 쓸 만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니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끄집어내셨습니다. “네가 해라.” 그래서 했습니다. 쓰러지는 유대민족의 야훼 신앙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오늘 말씀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끝까지 붙들고 “너와 일을 해야 돼.” 하셨습니다. 영국의 신앙 부흥 운동을 위해서 요한웨슬리와 찰스웨슬리를 하나님이 세우신 영국 기독교 역사를 우리가 다 배웠고, 덴마크의 부흥을 위해서는 그룬트비 목사를 하나님이 앞장세우셨습니다. 사람을 세워서 역사를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데 죽여 달라고 하는 기도를 바꿔서 “하나님! 하나님의 새 역사 창조에 나를 써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긍정적인 신앙입니다. 주님은 이때 똑같은 대답을 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시대에 쓰시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역사는 꺼져가는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을 되살려내는데 하나님이 엘리야를 끝까지 붙드셨던 역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숨겨진 하나님의 역사 진행을 따라서 오늘도 내일도 찬송을 부르면서 순례자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설날이라고 하는 민족 절기를 만나서 길을 떠난 많은 성도들 오늘 다 행복한 시간이 되고, 돌아오는 길도 평안할 수 있는 아버지의 돌보심이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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