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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각자의 십자가 (마 16: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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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십자가 (마 16:21-25)


기독교의 사순절 절기는 AD 325년에 결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온 세계가 지켜오는 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21절부터 읽었는데 바로 윗부분을 보면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 기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동안 많은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시간적으로 3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이만하면 제자들도 나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셔서 제자들에게 아주 심각하고도 본질적 질문을 해서 영적 시험을 보는 기록이 오늘 말씀 위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시험지를 냈더니 제자들이 답안지를 제출했는데 모두 틀렸습니다. 낙제 점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내가 왜 세례 요한이냐?” “더러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언제 사람인데 나를 보고 엘리야라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내가 왜 예레미야냐?” 사실 유대인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왜 믿습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구원의 메시야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왜 안 믿습니까? 메시야인줄 모르기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실망하신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들이 직접 대답하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베드로가 먼저 말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00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100점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네가 만약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 권한을 너에게 주겠다.” 예수님이 너무 기뻐서 안심하시고 ‘이만하면 제자훈련 끝이다. 넉넉하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기 첫 절에 “이때로부터”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후 “이만하면 때가 되었다. 내가 가야할 본질적 사명을 제자들에게 밝혀도 될 만큼 훈련이 잘되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셨는데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다.” 여기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나온 것은 처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말을 해도 괜찮겠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이는가? 그 사람들이 하나님 제일 잘 믿는 사람들인데?’ 이때 주님의 마음은 제자들도 이제 십자가 고난에 대한 마음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마지막 수련의 끝을 장식하는 말씀을 했더니 조금 전에 100점의 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가 오늘 말씀에 돌변을 해서 항변하여 22절에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런 이상한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바로 약간의 내용으로 봐서 신경과민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험악한 단어 하나를 쓰시게 됩니다.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께서 1대1로 사람에게 사탄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입니다. 그 다음에 가룟 유다를 향해서는 “그는 마귀니라.” 이 두 가지 단어를 두 사람에게 쓰셨습니다. 성경 기록의 분위기로 평가하면 베드로가 모범생이라서 우리 목회자들이 늘 수제자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그는 수제자가 대답한 그 말을 “너는 사탄이야.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왜 그렇게 극단적 표현을 하셨는가? 사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 때문에 넘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물리치고 안 넘어지려고 예수님이 애쓰시는 것입니다. 왜 넘어지려는가?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 반갑게 들립니다. “십자가는 지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십자가 지기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일 신임하는 베드로가 “예수님! 그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말했을 때 예수님은 사실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지? 베드로야, 맞지? 네 말이 맞아. 그것은 나도 원치 않고 너도 원치 않아. 그렇지?” 이렇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셨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베드로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습니다. 가장 강력하고 극단적 방법이 아니면 이 위험한 상황을 극복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가장 측근의 신앙 고백자, 수제자로 여겨 천국 열쇠를 선물로 준 베드로를 타고 들어오는 사탄의 유혹을 예수님은 단호하게 “넌 사탄이야! 물러가라.”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는가? 자기도 싫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실제적으로 어떤 꿈이 있습니까? 200마일 이상 세상을 떠나본 일이 없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조상이 물려준 낡은 조각배 한 척의 수십 군데 찢어진 그물 하나로 고기를 잡아서 겨우 겨우 생계유지를 하는 어촌의 영세민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니까 뭔가 보였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의 그 많은 군중이 왕이 되라고 소리치는 현장에 제일 가깝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받은 신뢰가 가장 큰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면 보장된 것입니다. 그런 희망찬 베드로 앞에 지금 예수님이 “이제 그 본 고장인 예루살렘에 가면 내가 이렇게 될 것이다.” 그랬을 때 베드로가 얼마나 마음이 상했겠습니까? 이때 베드로가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얘들아,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겠다. 우리 목표가 눈앞에 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권위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 이 민족이 그토록 소원하는 로마로부터의 국권 회복을 이루어 옛날 우리 조상 다윗, 솔로몬 시대에 누렸던 그 위대한 아브라함 후손의 권위를 되찾겠다. 이 민족적 거사에 너희가 지금까지 동참해 온 것이다. 

내가 그 자리를 회복할 때 너희들도 내 곁에 있게 될 것이다. 약속하겠다.” 이 소리입니다. 그렇게 기대하고 왔는데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평가를 받는 장로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잡혀서 죽는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런 슬픈 패배를 인생에서 내가 겪어야 되는가?’ 그래서 항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더 괴로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24절을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더러 십자가 지지 말라고 말리지 말고 너희들도 져라.”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순절 의미로 내 십자가는 무엇인가? 지고 갈 것인가, 집어던져 버릴 것인가? 나 나름대로의 자기 십자가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십자가 의미는 고난스러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겪어야 될 고난을 어떻게 지고 가야 할 것인가? 저 같은 사람은 일평생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분명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목회를 해야 합니다. 제 친구 목사 한명은 교회에서 회의를 하다가 너무 신경을 써서 혈압이 올라서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습니다. 회복이 되었는데 그 친척 되는 분은 한국에서도 잘 나가는 성공한 기업인입니다. 

목사 병문안을 와서 하는 말이 “목사를 왜 그렇게 오래 합니까? 그만 하십시오! 그 정도 했으면 됐어요. 그리고 우리 회사로 오세요. 목사가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왜 말을 안 들어요?” 그런 적이 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목회 사역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요한복음 18장 11절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아버지가 주신 것입니다. 이게 다 다릅니다. 

저와 신학교 4년 동안 같이 공부한 동기생,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는 졸업하면서 “이 목사! 나는 어린이 사역만 평생 할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지금 나와 나이가 동갑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른 사역은 안합니다. “어휴! 어른들은 너무 힘들고 골치 아파. 나는 어린이 사역만 할 거야.” 그래서 대한민국 어린이 사역의 전문 강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보면 어린이 사역하느라 “반짝 반짝!” 찬양하면서 어린이 설교를 합니다. “이야! 잘한다, 잘해!” 그래서 그런지 늙지도 않습니다. 얼굴이 어린이 같습니다. 나만 보면 “이 목사! 은퇴할거지? 나하고 어린이 사역해!” 그렇게 말합니다. 각자 다 다릅니다. 

어느 날 너무 외형적으로 보기에 불쌍해 보이는 아줌마 한분이 남루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목사들 노회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누구십니까?” “여기가 미국 장로교 PCUSA 사무실이죠?” “그렇습니다. 누구십니까?” “이 교단에서는 나 같은 여자도 목사 안수를 준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누구신지 말씀하십시오.” “제 남편이 선교사였습니다.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 불타는 소명감으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다녀본 73개국 중에서 외형적 판단으로 가장 못살고 고난스러워 보이는 나라가 방글라데시와 아이티였습니다. 

전국이 쓰레기통같이 보입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위생시설이 엉망입니다. 그 두 나라가 내 마음에 외형적으로 못사는 나라로 생각되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모두 거지떼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제 남편이 얼마나 신앙이 뜨거운지 그 열악한 환경에 가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사역을 해서 제가 말렸습니다. 평생 목회를 하고 선교할 것을 일 년만 하고 말건가요? 뭐 이렇게 야단인가요? 천천히 좀 하세요. 몸도 좀 생각하세요. 하지만 남편은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계속 열심히 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남편 무덤을 만들어놓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남편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편 그 무덤을 막 주먹으로 때리면서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께 충성하다가 하나님 품에 갔다면 우리 아이들과 나는 어떡합니까? 내가 천천히 좀 하자고 했지요? 이 나라에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고 돈도 하나도 없는데 혼자만 충성하고 주님 품으로 가면 되나요? 하나님도 믿기 싫고 남편도 밉고 선교고 뭐고 다 싫다. 이게 하나님께 충성한 보답인가? 그래서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난데없는 음성이 제 귀에 들렸습니다. 

너도 이 땅에서 죽어 네 남편 곁에 묻혀라. 누구냐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일을 계속 하려면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신학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저에게 목사 안수를 주시면 돌아가서 남편이 묻힌 그 나라에서 일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십자가! 집어 내동댕이치고 싶은데 벗겨주지 않습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고래 뱃속에 집어넣었다 꺼내어 다시 쓰시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버리고 갈 때 하나님이 포기하십니까?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합니까? “만약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미칠 것이라.” 사명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것은 자원적 응답으로 하시라는 것입니다. 불평하려면 교회 일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자원적으로 하십시오. 대개 별로 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큰 소리만 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너더러 그런 일 하라고 했어? 하기 싫으면 그만 둬!” 자원적으로 하십시오. 예수님도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잔을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마셔야 돼. 누구한테 그 잔을 옮길 것인데?” 고난의 십자가! 이것은 우리가 평생 지고가야 될 하나의 사명감인데 힘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도 지금 피하고 싶고 예수님조차도 겟세마네 기도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희생 없는 헌신은 싫어하십니다. 십자가에 피 흘려야 합니다. 제가 LA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가는 교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휴가 때만 되면 수십 명씩 갑니다.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잭팟 터지면 몽땅 건축헌금할거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갔다 와서는 헌금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목사님! 나는 하나님을 하나도 이해 못하겠습니다. 나는 진짜 기도 많이 했고 터지면 한 푼도 내가 안 쓰고 몽땅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는 집사님 많았습니다.

 저는 대답을 “정말 못 드리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름해서 갖다 바친 돈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집사님이 땀 흘려 번 돈으로 헌금하시고 그렇게 큰 돈 안하셔도 됩니다.” 십자가 없는 헌신은 헛된 것입니다. 자존심만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 받아도 자기 영광이나 찾으려 하고 그게 무슨 십자가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흉괴를 꾸민 사람은 서기관, 제사장, 장로들이고 거기에 놀아난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못 박으라고 공개적 고소를 한 사람들은 유대 백성들입니다. 민중의 데모가 두려워서 공개 처형을 명령한 사람은 빌라도, 못을 박은 사람은 빌라도의 부하들, 영문도 모르는 군중은 군중 심리에 휘말려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중에 누구를 향해서 싸움을 하셔야 됩니까? 아무도 싸움의 대상이 안 됩니다. 그래서 아무 대답도 안하시고 십자가 위에서도 그들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십자가!” 하나님하고만 상대를 했습니다. 빌라도가 물었을 때도 “내가 너를 놓아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다.” 아무 대답도 안하십니다.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살려달라고 변명을 하면 내가 살려줄 텐데….”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을 네가 말한다고 될 거 같으냐? 나는 이 길을 가야 돼. 아버지가 내게 주신 십자가!” 하늘만 쳐다보셨습니다. 

갈보리산 올라가는 길이 너무 힘들어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그게 너무나 힘듭니다. 사실 그 비아돌로로사 길을 갈 때 베드로 같은 수제자가 나서야 합니다. “나는 베드로야! 예수님! 비키세요. 이 나쁜 놈들! 우리 예수님을 이렇게 하다니!” 자기가 들어가서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나이가 젊고 사랑을 제일 많이 받은 요한이 “예수님! 비키세요. 제가 젊지 않습니까? 제가 지고 갈게요.” 서로 그래야 했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십자가는 싫어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눈을 뜬 사람이 이럴 때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눈을 뜨게 해주신 그 사람입니다. 예수님! 비키세요. 제가 십자가 지겠습니다.” 중풍병으로 일어나지도 못한 사람이 건강해졌지 않습니까? “예수여! 제가 그 사람입니다. 비키세요.”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먹은 사람이 남자만 5천명이라고 했습니다. 5천 명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서 “예수여! 이게 웬일입니까? 아니,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다니! 비키세요. 제가 지겠습니다.” 이래야 합니다. 열 문둥병자가 문둥병이 다 나았습니다. 

“제가 열 문둥병자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그랬구나.” “비키세요. 제가 지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다 싫어합니다. 우리 사회는 몇 가지 십자가 표시가 있습니다. 무덤 앞에 꽂혀있는 십자가는 영생입니다. 푸른 색깔의 십자가는 병원을 상징하는 질병의 구원 표시입니다. 적십자, 붉은 색깔의 십자가는 우리 사회 고난 문제의 해결 기관입니다. 교회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걸이나 옷에 달고 다니는 십자가는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라는 뜻입니다. 제가 북유럽에 갔을 때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이 나라는 전부 왜 국기가 십자가로 되어 있느냐고 물었더니 당신 목사인데도 그것을 모르냐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웃으면서 대답했는데 맞는 말인지는 제가 확실히 모릅니다. 십자가는 희생,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내가 지불하는 피 흘림입니다. 말들은 잘하는데 정말 십자가는 안 진다는 말입니다. 자기만 중요합니다. 주님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세계 여러 곳에서 십자가 행사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비아돌로로사 세계 각국에서 이때에 맞추어서 갑니다. 그래서 온 세계인들이 웃통을 벗고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고 그 길을 올라가는 행사를 해마다 합니다. 필리핀에서는 실제로 자원봉사에 의해서 못을 박습니다. 진짜로 박습니다. 그 고통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죽지는 않습니다. 금방 빼서 끝난 다음에 치료해 주는데 실제로 못을 박는 행사가 해마다 열립니다. 코르시카의 사틴 마을에서는 주님이 지셨던 크기의 십자가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고 비아돌로로사로 올라가는 거리의 길을 험악하게 만들어놓고 항상 행사를 하는데 거기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자원봉사자로 내가 지겠다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지는데 로마 군병들이 실제로 때립니다. 

그 피를 흘리며 맨발로 십자가를 지며 그 거리를 올라가는데 피투성이가 되고 반도 못가서 쓰러지고 일어나서 쓰러지고 일어나는데 올해는 이것을 누가 질 것인가 자원봉사 명단을 봤는데 앞으로 40년 행사 자원봉사자가 밀려있다고 합니다. 자기들이 모두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주님 고통의 체험을 하는데 얼마나 감격했는지 주님이 이런 고난을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나같이 신앙이 뜨거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겠다며 서로 먼저 하려고 합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도 하나님의 영적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로마서를 보십시오.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구레네 시몬의 부인은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 진 이후에 얼마나 변했느냐 하면 바울 사도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곧 내 어머니라. 그가 없었으면 내가 선교도 못했다.” 연령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선교를 위해서 어머니 역할을 항상 해주었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성경에 남겼지 않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저는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내 목회를 어머니같이 도와준 사람이 기억에 없습니다. 아버지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만큼 내가 신앙 고백할 사람, 나를 위해서 목회를 열심히 하라고 도와준 사람이 실제로 없습니다. 이 사도 바울은 구레네 시몬의 아내가 어머니라고 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 교회의 유명한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잠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영적 축복을 그 가문에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려운 십자가를 우리가 어떻게 지고 갈 것인가?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십자가가 기쁩니다. 사도 바울은 육신적 조건이 좋은 것이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매 맞고 헐벗고 굶주리고 고소당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좋은 조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 서신에 끊임없이 나오는 말이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가 즐거운 것입니다. 불평하면서 교회 봉사하려면 하지 마십시오. 원망하면서 봉사하려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며 자원봉사 하십시오. 

‘아! 이게 너무나 기뻐! 나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돌아오다니!’ 네로는 자기 어머니와 아내까지 모두 죽여 버리면서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했다고 덮어씌워 기독교인들에게 험악한 핍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워 베드로는 잠시 동안 십자가를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는 베드로의 모습에 “베드로의 시”라는 제목을 붙인 시가 있습니다. 

“오! 나의 십자가여! 내가 버리고 떠났던 그토록 보고 싶었던 내 십자가여! 주께서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에 내가 또한 죽게 되니 감격하여 그대를 맞노라. 나 잠시 동안 이것을 버리고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했던가? 나 얼마나 그대를 사랑했던가? 그대는 오늘 나를 주님 곁으로 인도하니 나 이제 그대의 품에 달리겠노라.” 그리고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했지 않습니까? 십자가! 희생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희생 부분은 안하려고 합니다. 모두 다 영광스러운 제자들과 같이 되려고 합니다. 

제가 이민 목회를 할 때 어느 여 집사가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30대 후반인데 저에게 와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이렇게 원수를 갚으실까요?” “뭔데 방정맞은 소리를 합니까?” 자기는 모태신앙이랍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자기가 다니는 교회 전도사님이 얼마나 좋은지 자기도 그 전도사 보기만 하면 평안하고 좋고 아버지, 어머니도 “너 저 전도사한테 시집가면 좋겠다.” 말씀하시고 그 전도사님도 자기와 결혼하고 싶어서 굉장히 마음을 쓰시고 자기도 전도사님이 좋아서 마음을 먹고 둘이 교제를 했는데 한 가지가 걸려서 그만 안했다는 것입니다. 

“왜 안하셨나요? 돈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새벽기도 때문에 못했습니다.” 자기는 체질적으로 밤늦게까지 밤새우는 것은 자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벽은 절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체질이 그래서 늦잠 자야지 날마다 집안에서 꾸중 듣고 학교 지각하고 대학까지 마쳤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목사 사모가 되면 남편이 나 때문에 사모가 새벽기도 한 번도 안 나오고 잠만 잔다고 교인들에게 욕먹지 않습니까?” 사실 그것만 밝히는 은사가 있는 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전도사님! 안되겠습니다. 전도사님은 나 때문에 목회도 못하세요. 나는 전도사님 사랑하고 전도사님도 나를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만 현실이 이런 거 어떡합니까? 나뿐만 아니라 전도사님까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그 전도사님이 그렇게 결혼하자고 눈물의 호소를 하는데 자기는 눈물로 뿌리치고 결혼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지금 사는데 미국에 와서 먹고 살려니까 자기는 새벽일을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벽 3시에 매일 일어난다고 합니다. 3교대 하는 회사에 취직했는데 월급도 잘 주고 그거 아니면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생계가 달린 일이니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4시까지 시장 출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와서 ‘아! 내가 그 십자가를 왜 버렸던가? 그 전도사님과 결혼해서 평생 내가 그렇게 살았어야 되는데….’ 후회가 되고 하나님이 이렇게 원수 갚으시는 것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막 총체적 혼란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잘됐다.’ 생각했습니다. 십자가!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십자가! 여러분! 주시는 십자가는 괴로워도 좀 피를 흘려도 지고 하나님 나라까지 가시기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십자가가 커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각자 형편과 사정에 맞는 십자가를 주님이 저희들에게 내려주시는데 자원 봉사적으로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기쁘게, 아주 기쁘게 생각하며 십자가 지는 것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는 충성된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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