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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 (요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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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성공하는 사람 (요 4:23-24)     
 
오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의 사람으로 세우실 것을 믿습니다. 신앙의 비밀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믿는데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가까이서 만나고 느끼도록 도와주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과 은혜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기독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적 생활의 핵심입니다. 만일 예배 생활이 부실하고 예배의 집중력을 잃게 되면 영적 생활이 빈곤해지고 활력이 넘치는 능력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삶에 실패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현대 신자들의 바쁜 생활은 점점 예배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예배생활의 집중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횟수가 감소되고 예배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가 낮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현대인들의 의식과 성향이 자기중심적이고 만족 추구형으로 되어가기 때문인지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 쪽보다는 사람 쪽에 치우치는 경향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되기보다는 인간의 만족을 위한 어떤 감정과 분위기가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켜야만 되는 것처럼 예배의 의미가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공급과 풍성한 삶에 힘을 얻게 만드는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생활에서 지치고 피곤한 영혼에 살아있는 양식을 제공받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에 중요한 예배생활에 모두가 성공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배의 관계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예배에 대해 정의를 해줍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그 사랑을 서로 표현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이고, 하나님과 공동체 안에 있는 나의 위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입니다. 수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수평으로는 공동체와 관계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모두 영적입니다. 학문이나 학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자는 성령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성경에는 산 예배와 죽은 예배, 참 예배와 거짓 예배, 받으시는 예배와 받으실 수 없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고 살아있는 참된 예배라고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예배로 주일이 되면 어쩔 수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나마도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꺼림직 해서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여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 생활에 실패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만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탱하게 하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누구를 찾고 계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기대하고 예배를 즐거워하며 예배드리기를 열심 내는 신자는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예배 생활에 게으르고 나태하며 예배를 소홀히 취급하는 신자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의 실제적인 예배생활을 보면 너무나 자주 예배를 드리다 보니 어느 사이에 예배가 형식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하는 일중에 예배 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교회가 아무 일을 못해도 예배드리는 일만 잘 해도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슨 세미나, 무슨 프로그램, 이런 것을 잘하지 못해도 예배만 잘 드릴 수 있게만 해드려도 우리는 큰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역사입니다. 예배가 일입니다. 이보다 더 큰일이 없습니다. 

교회의 첫째 자리에 예배를 놓아야하는 것입니다. 이 순서를 뒤바꾸면, 그때부터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뿌리 없는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표현하기를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요,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어떤 일도 예배 보다 더 바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와 약속이 되어 있을지라도 예배시간이 되면 약속을 뒤로 미루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만큼 세상일이 아무리 바빠도 모든 것을 뒤로하고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창조자 앞에 나아와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므로 은혜와 복을 받을 수 있는 반면에, 예배를 바르게 드리지 못함으로 은혜와 복은커녕 오히려 책망을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교인들이 예배를 너무 등한히 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배드린다."고 말하지 않고 "예배를 보러 간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배 시간에 보면 구경하는 자세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여기 저기 두리번거립니다. 꽃 구경, 사람 옷 입은 구경, 설교 구경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주보에 낙서를 하거나 잠을 자버리고 맙니다. 아니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예배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것일까요? 먼저 참된 예배 장소는 어디이며 예배 대상은 누구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어떠한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까요? 그리고 예배를 드릴 대상은 누구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간에 예배 장소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전설에 아브라함이 그리심 산에서 이삭을 바쳤다고 생각하고 그 산을 축복의 산으로 생각했고 거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반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법궤가 있는 곳이기에 예루살렘에서 드리어야 거룩한 예배가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 더 큰 반목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과연 어느 말이 옳습니까?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어느 작은 장소에만 국한되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 2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를 성전에서 모이지 못하고 다락방이나 가정에서, 혹은 어느 감옥 안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심지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 땅굴속인 카타콤에서 예배를 드렸고 지금도 북한 같은 곳에서는 그런 땅굴이나 골방교회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러한 곳에서 드리는 예배라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큰 능력으로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예배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배드리는 마음중심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마음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대상자를 바로 알고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는 무엇보다도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는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1)하나님은 우리와 모든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만물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언제나 창조자 하나님을 믿고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우상에게 드리는 예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셨고 아름다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건져주신 분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의 예배의 배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멸망 받을 저주의 땅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바로의 손아귀에서 살려내셨다는 그 은혜가 예배자의 마음속에 꽉 차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의 마음엔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어느 분은 교회를 나올 때 은혜를 받으러 나왔다고 하고 은혜를 받고 돌아간다고 말을 합니다. 순서가 잘못된 표현입니다. 먼저 나를 애굽 같은 죄와 세상에서, 애굽 같은 저주와 멸망에서 우리를 건져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게 하심으로 우리를 멸망 받지 않게 하시고 구원해 주신 은혜를 우리는 먼저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고 찬송 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3)하나님은 우리의 인도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고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00:3에 보면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듯이 오늘 우리의 삶에 발걸음마다 인도하시고 동행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병들지 않게 해주시듯이 우리를 건강하게 지키시고 모든 환난과 시험에서 건지시고 언제나 밤이나 낮이나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 온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며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를 섬기며 그를 예배해야 참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만 경배하고 그만 높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인간을 우상화 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처럼 비춰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무슨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 취득축하 예배 혹은 총회장 당선축하예배를 드리면서 그 사람을 위해 찬양을 준비하고 설교를 하고 축사하고 꽃다발이나 선물을 증정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차지하는 것 같아서 너무나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오직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 되셔야지, 어느 누구도 그 대상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인간이 우상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옛날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생전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느 주일에 왕과 그의 왕족들이 교회에 도착했는데 그 곳에는 왕실 설교자인 프넬론 대주교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교회의 많은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놀란 왕은 "모든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왜 오늘 아침에는 아무도 출석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저는 폐하께서 오늘 이곳에 오시지 않을거라고 광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누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지 아니면 단지 폐하께 아첨하러 오는지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고 대답을 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 입니까? 아마 그동안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 아니고 왕의 눈도장을 찍으러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왕이 오늘 출석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대부분 교회를 나오지 않은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날도 어떤 이들은 교회 출석이 그들의 사업과 사회적인 신분을 향상시키는데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또 어떤 이들은 단지 의무감에서 나갑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합니다. 

눅 18장에서 보면 바리새인이 열심히 기도했으나 인간을 바라보고 한 기도이기에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한 탓에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크고 화려한 교회당에서 수 천 명이 모여서 엄숙히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외면하는 예배가 될 수 있는 반면, 비록 두 세 사람이라도 진정 오직 하나님을 향해 진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흑인 농부가 동부의 도시생활에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당시 희망이 넘치는 서부 개척지를 향해 떠났습니다. 가다보니 교회당에서 종이 울립니다. 그 때야 그날이 주일인 줄 알고 교회당 밑에다 마차를 세워 놓고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교회당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안내위원이 '여기는 백인만을 위한 교회당입니다. 흑인은 못 들어갑니다.'라면서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흑인 가족은 교회 옆 창이 있는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교회당 안에서 들리는 인도자의 소리를 따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보니 어느 분이 인자한 눈빛으로 자기 가족들을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흑인은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흑인이 아닌데 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 분은 대답합니다. '오, 신실하고 착한 나의 아들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니라. 이곳 마을에서 나를 찾고 내게 진정 예배드리는 이는 너희뿐인데 왜 저곳으로 들어가겠느냐? 저 곳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안내하는 자가 나를 가로 막고 있는구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이야기입니까? 아무리 크고 화려한 교회당에서 최고의 찬양대, 최고의 명 설교와 함께 드려지는 예배라도 하나님을 향해 드리지 않는다면 참된 예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개척교회에서 몇 명이 모여서 드리는 초라한 예배라도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2. 예배자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신령한 면이 있고 인간이 가져야할 진정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신령해야 합니다. 

신령이란 영어로 번역하면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애쓰면서 신령한 예배를 드리려 할지라도 불가능합니다. 잘못하면 갈멜산에서 자기 몸을 자해하면서 부르짖던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의 재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모든 예배 순서가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신령한 기도, 신령한 찬송, 신령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드리기 전에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인도자나 설교자, 기도 자나 찬양대, 모든 예배위원과 성도들이 성령의 강하게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신령한 예배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들 면에서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감추는 것이나 속이는 것이 없이 다 열어 내놓고, 정직하게 다 드러 내놓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죄를 감춰놓고는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앞에 우리가 거짓말로 속이고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 시간에 우리의 죄를 드러내놓고 하나님 앞에 솔직히 내놓고 용서받고 그래서 진실 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 예배를 드리어야 합니다.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다른 데에 가있다면, 두 마음을 품고 드리는 자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를 드리러 올 때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기 전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다. 죄를 철저히 회개함으로 마음을 단정히 하고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심을 기울여 예배를 드리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주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영어로 예배란 용어는 두 가지입니다. '워십(worship)'과 '서비스(service)입니다. 이 두 가지 단어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워십'이란 말은 '경배한다.'는 뜻으로 오직 예배를 받으실 분은 유일하신 하나님뿐인 줄 알고 경배하는 자세를 가질 때 참된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영어로 예배를 '서비스'라고 하는데 이는 '섬긴다'는 뜻으로 우리가 예배를 드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고 우리는 그의 종으로 그만 섬기겠다는 것과 함께 예배드리는 공동체인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섬기겠다는 결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없이 예배를 마쳤다면 그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산 제물을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고 만나주시며 은혜와 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교우는 교인 중에 서로 미움을 품고 예배를 드립니다. 심지어 어느 교회는 교인들끼리 싸움이 벌어져서 목사 패와 장로 패로 나누어 한 쪽은 이층에서 예배를 드리고 한 편은 아래층에서 예배드립니다. 한쪽이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찬송을 부르면, 한쪽은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요'라고 맞불 찬송을 부르고, 한쪽이 사탄을 물리치는 통성기도를 하면, 한쪽은 저주의 통성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서로 만나면 원수나 마귀 취급을 합니다. 

예수님은 마 5:23-24에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형제가 네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두고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그런 증오심에 가득 찬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결코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의 예배가 능력이 없고 왜 기도의 응답이 없습니까? 원망하는 마음이나 남을 미워하는 미움을 그대로 가슴에 품고 회개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기에 하나님이 받지 않고 응답이 없이 침묵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렇게 예배 생활을 실천해 보십시오. 먼저 철저하게 회개하십시오. 잘못된 인간관계나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나 없나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진실하고 사람 앞에 진실하십시오. 바로 이런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고 열납하는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배 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가 살아있고 하나님이 임재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영적으로 풍성한 예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준비에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주일 예배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목사님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순서를 맡은 분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위해 더욱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일을 빠지지 않는 기다리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가장 중요한 예배의 생활은 계속해서 빠지지 않고 성수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배의 축복을 체험하기 위해서 세상에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주일을 구별하여 주님의 날로 삼고 철저하게 2년, 3년, 5년, 10년, 그리고 평생을 성실하게 예배드리는 생활을 실천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모두가 받게 될 것입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모든 것에 성공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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