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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눅 22:5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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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눅 22:54-62)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①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가 모른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은 바보이니 피하라. ②아무것도 모르지만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단순한 사람이니 가르쳐라. ③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자고 있으니 깨우라. ④알고 있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니 그를 따르라. 무슨 얘깁니까?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적 지각과 센스가 다 말살되어 버렸습니다. 죄가 우리의 총명을 어둡게 해버렸고 마음을 둔하게 만들어 버려서 영적인 것에 관하여는 보지도 깨닫지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육신의 눈은 멀쩡해서 잘 보이지만 영적인 눈은 감겨있고 마음은 목석처럼 감각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을 위해서는 이렇게 어두워진 감각이 살아나야 합니다. 

인체에는 오관이 있습니다.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이 그것인데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과정의 역할을 합니다. 

먼저는 보는데서 깨달음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 이라는 말처럼 라디오를 통해서 듣는 것보다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는 것이 훨씬 더 빨리 정보를 습득하고 깨달음이 빠릅니다. 그래서 보기는 보는데 깨달음이 없으면 고장 난 인생입니다. 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데 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보는 것에만 깨달음이 있고, 듣는 것에는 깨달음이 없느냐 하면 아닙니다. 사람은 들음으로도 깨닫습니다. 그런데 듣되 잘 들어야합니다.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을 들으면 아무리 많이 들어도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다. 아니 잘못된 것에는 깨달음이란 게 없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옳은 것에 대한 말입니다.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요10장에서 말씀하신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안다.” 는 말씀이 곧 들음으로 오는 깨달음의 모습입니다. 제대로 듣고, 제대로 깨닫고, 제대로 따라가야 양이 살 수 있습니다. 잘못 듣고, 잘못 따라 가다가는 구렁텅이에 여지없이 빠지고 맙니다. 

또한 냄새를 맡고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길거리 식당 앞을 지나가면서 ‘아, 저건 청국장찌개다.’, ‘아, 저건 된장찌개, 김치찌개구나’ 를 정확히 압니다. 냄새를 통해서 깨닫는 겁니다. 또한 그냥 스쳐지나가며 인사를 나눠도 ‘아, 저 사람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구나!’ 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맛을 보고 깨닫기도 합니다. 가끔씩은 눈으로 봐서는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라고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어떤 집에 갔더니 커피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제가 달게 먹는다는 것을 아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설탕인줄 알고 가는 소금을 푹 넣어왔습니다. 제가 워낙 커피를 좋아했으니 망정이지 다 버릴 뻔 했습니다. 자, 볼 때는 같은 흰색이지만 맛을 봐야 소금인지 설탕인지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깨닫게 되는 마지막 과정은 만져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손끝에 눈이 달렸다.” 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손으로 만져보고 무엇이든지 그 질을 알아맞힙니다. 손으로 만져보고 “부드럽다.”, “물렁물렁하다.”, “거칠거칠하다.” 고 깨닫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뜨거운 커피 잔을 놓고 아무리 뜨겁다고 말해보세요. 알아듣나. 그런데 자기가 손으로 만져보고 뜨거우면 그 다음부터는 손앞에 갖다 대도 만지지 않습니다. 만져보고 깨달았거든요. 

이렇듯 인간은 누구나 오관(五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이 있는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 들 그것을 통하여 깨달아지는 바가 없다면 눈, 귀, 코, 입, 손은 액세서리(accessories)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토록 감각기관을 통한 모든 깨달음도 중요합니다마는 정말 중요한 것은 영적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을 밝히 보지 못하면 깨달을 수 없는 게 있단 말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고 영적인 감각을 동원해서 봐야 모든 것이 제대로 보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센스와 지각을 길러나가지 않으면 늘 잠들고 맙니다. 말씀은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고 총명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지식이 월등해 지는 겁니다. 유식해 진단 말입니다. 또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고 보면 깨달음은 의지적 결단이기 이전에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실 때 깨달음이 오고 진리를 보게 된다 그 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하나님은 말씀 했습니다.(신 29:4, 사 6:9.10) 그리고 우리가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은 우리의 강퍅함과 둔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거부하거나, 순종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대로 놓아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은 우리의 지각을 깨워주실 것을 기도할 수 있어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미련 속에 빠진 한 사람, 베드로를 만납니다.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노라 장담했던 베드로,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의 귀를 칼로 내리칠 정도로 정의감에 불탔던 베드로,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법정에 끌려가는 현장에도 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베드로가 보여 줄 수 있는 자기의지의 전부였습니다. 

오늘 본문 54절에 보면 예수님이 잡혀가는 그 현장에서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겁한 태도입니다. 정의의 사도였던 그가 기회주의자가 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가봐서 예수가 불리하면 도망하고, 이적이라도 행하셔서 보좌에 앉게 되면 “나는 그의 수제자” 라고 나설 참이었는지 모릅니다. 결과를 보고 적당히 행동을 취하겠다는 자기중심적인 신앙, 이것이 오늘 베드로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밤이 깊어 어두워지자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줄 알고 슬쩍 대제사장의 집안에 끼어들어 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피하려고 했으면 불빛이 비치지 않는 뒤쪽에라도 서 있을 것이지 성경에 보니까 “불빛을 향하여 앉았다.” 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얼굴이 훤하게 보인 건 말하나마나 입니다. 불빛이 번득일 때마다 불안과 초조감에 쌓인 베드로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한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봅니다. 

오늘 성경에는 여종이 베드로를 쳐다보는 것을 “주목하여” 라고 표현했습니다만 표준 새 번역에는 “그를 빤히 노려보고” 라고 되어있고, 현대어성경에는 “자세히 뜯어보고” 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리 저리 몇 번이고 다시 보고 기억을 더듬고 또 다시 보고하다가 확신하며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던 자다!” 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당황한 베드로가 재빨리 부인합니다.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생사람 잡고 있네!” 시치미를 떼고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또 다른 사람이 아무리 봐도 본 사람이기에 또 한 마디 합니다. “너도 그 도당이라.” 고하자 또 베드로는 곧장 받아칩니다. “야, 이 사람아 사람 잘못 봤네!” 정말 당당하게 대답하며 한 시간을 더 버티고 있습니다. 한 시간 후 지켜보던 한 사람이 참다못해서 장담하며 “이 사람 말투가 갈릴리 사람말투야, 예수와 똑같은 말투잖아!” 하고 강경하게 몰아붙이자 베드로 역시 강한 어조로 되받아칩니다. “아,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네. 글쎄 나는 저 예수라는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어!” 라고 소리치는 순간 닭이 웁니다. 

지금까지 그는 예수님께서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고 하신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닭이 우는 그 순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쳐다보셨고 순간 베드로의 가슴이 철렁해 졌습니다. 깨달음이 오는 순간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는 말씀이 생각나서 가슴을 찢으며 통곡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말 없는 눈길이었습니다만 가슴을 아리게 하는 뭉클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노려보지 않았습니다. 원망의 눈초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셨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와 닿는 지척에 있으면서 세 번씩이나 저주와 맹세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자신을 과연 주님이 바라 볼 가치가 있는 자입니까? 쳐다 볼 가치조차 없는 배신의 제자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당하는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는 제자가 안타까워서 한 번 더 돌아보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시선입니다. 

곧 주님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나를 위하여, 우리 때문에 십자가를 지십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멀찍이, 주님과 상관없는 자로 살아가려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께서 돌이켜 보신다면 베드로처럼 통곡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주간에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던 주님을 생각합니다. 베드로 같은 나, 때로 베드로이기를 자처함으로 비굴해지고, 나약해지는 우리들이지만 십자가를 지시는 고난 주간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돌이켜 우리를 보십니다. 마음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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