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말씀에 붙잡혀 사는 사람 (행 18:5-11)

첨부 1


저는 몇 년 전에 알래스카에 갔을 때에 회귀성 동물인 연어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떠나서 태평양바다를 헤매고 다니면서 성장해 가지고 3년만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많은 연어들이 모여서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호수로 올라가는데 강물을 거슬러 가는 게 아니고 폭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30m나 되는 높은 폭포가 떨어지는데 이걸 거슬러 올라가는 겁니다. 그 많은 것들이 그리고 올라가기 위해서 밑에서 빙빙 돌고 있는데 마치 죽을 쑤는 거 같더라구요.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또 낚시질을 합니다. 어쨌든 그 많은 물고기들이 이렇게 휘젓고 돌아가다가 그저 헤엄쳐서 올라가는데요 다시 말하면 물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헤엄친다 그 말이예요. 올라가서 저위로 퍼뜩퍼뜩 뛰어올라가는데요 저거 뒤에는 또 곰들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저 어쨌든 이렇게 올라가서 또 그 상류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가지고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알을 낳고 죽습니다. 그런데 그 고향을 찾아가는 그 연어들 그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을 보면서 존경스럽기까지 하더만요. 아, 대단합니다. 대단한 힘이요 대단한 열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회귀성 동물이라고 합니다. 몸 속에 있는 나침반을 따라 태양을 이정표로 삼아 고향을 찾아가는 동물, 이 회귀성 동물입니다. 물고기만이 아닙니다. 이런 포유류 가운데서도 많은 짐승들이 죽을 때가 되면은 반드시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생을 마칩니다. 왜, 존경스러웠냐구요 나도 못 가는 고향을 저들이 가더라구요. 자, 우리 생각해 보세요. 이건 신비로운 것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습니다. 무엇에 끌려가는 것입니까 이 물고기가 무엇에 끌려 3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까 누구한테 배우고 누구한테 듣고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끌려 사는 것입니까 이 회귀성동물 모든 동물은 인스팅트(Instinct), 본능의 끌려 삽니다. 배우고 듣고 보는 것은 별거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원천적 본능 이것에 끌려서 그 생을 살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높은 차원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과 양심입니다. 누가 가르치든 안가르치든 육법전서를 알던 모르던 상관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성과 그리고 그 양심이 그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아무사람 법없어도 살 사람이다.' 아, 그렇지요. 법 없어도 살아요. 괜히 많은 법을 만들어 가지고 골치 아프게 하는 거죠. 이성과 양심이 밝게 작용을 하면 법 없이도 얼마든지 아름답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에 끌려 사는 것이, 또 살아야 하는 것이 그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성령에 끌려 삽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 성령으로 감동해 주시는 그 역사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깨닫고 내가 예수를 따라가는 줄로 생각을 하지만 얼마간 믿고 보면 그게 아니지요. 우리는 다시 깨닫습니다. 내가 믿은 게 아니라 그가 나를 인도한 것이죠. 그가 나를 믿게 한 것이죠. 그가 나를 붙들어 당신의 사람 되게 하고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그 놀라운 주님의 능력과 섭리에 감격하게되고 좀더 나아가서는 그의 뜻에 따라 그 크신 경륜 속에 내가 쓰여지고 있다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손에 의하여 쓰여지고 있다는 정체의식으로 한평생을 사는 것이올시다.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자아를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자아는 물질적 자아, material self 라고 말합니다. 신체와 물질적 소유에 의해서 자기를 평가하면서 사는 존재를 말합니다. 예컨대 골동품 수집가를 생각해 보세요. 골동품 수집가의 기쁨은 얼마나 귀한 골동품을 많이 소장했느냐에 있습니다. 또 이 수집가들끼리 모여서 토론을 합니다. 그 때에 누가 제일 잘났습니까 인물이든 학벌이든 과거든 현재든 묻지 않습니다. 누가 더 가장 소중한 골동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 그 마음 그 긍지로 살아가고, 오늘도 내일도 골동품 어디 좋은 거 없나 이렇게 찾아 헤맵니다. 왜요 그것이 자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억만장자, 자기가 가진 돈이 자기 존재라고 동일시하고 Identify 하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잘 생긴 사람은 자기모양에 자기가 도취됩니다. 요새 흔히 CF모델을 가르쳐서 좀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왜요 아무 탤런트는 몸값이 얼마다 그러대요. 그 사람을 한번 광고모델로 쓰려면 얼마를 내야돼요. 그걸 몸값이라고 그래요. 그거 불쾌한 말입니다. 그러나 본인도 누구도 여기 신경을 쓰지 않아요. 그건 예쁜 동안만 쓰여집니다. 얼굴에 주름만 가면 그만입니다. 몸값이 추락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평가해서 되는 겁니까 이것이 바로 물질적 자아요. 내가 나를 평가할 때에 내 소유에 의해서 나를 평가해도 안되고, 내 외모에 의해서 나를 평가하고 또 평가받아도 안되는 것이에요.

또 하나는 사회적 자아올시다. Social self. 이건 누구의 친구냐, 누구의 자녀냐, 어느 회사의 사장이냐 그리고 어디 출신이냐, 어떠한 박사학위를 가졌느냐, 사회적 관계와 그 역할에 따라서 평가합니다. 이렇게 평가하며 사회적 자아를 따라가는 사람의 모습이란 중년이 되면은 '빈 둥지 증후군'이 되고 맙니다. 내 소유가 없어질 때 내 사회적 지위가 무너질 때 마치 그 둥지, 새들이 알을 낳고 새끼를 깨우고 그 다음에 훌쩍 날아가 버리면 빈 둥지만 남아요.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어요. 허망하고 허무하고 절망합니다. 쓸모 없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가장 비참한 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요, 더 비참한 것은 자기를 도적맞는 것이요,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자기자신을 빼앗기는 것이고 그리고 자기자신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세 번째 평가는 영적 자아입니다. Spiritual self. 이것은 외적인 것을 보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할 것도 아니고 소유를 평가할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내면세계에서 평가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생각합니다. 너는 얼마나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있느냐, 얼마나 깨끗한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되었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평가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이보다 더 영원한 가치의 것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은 사도바울은 그 나름의 인생관을 확실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옛날 일을 그 편지 속에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보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아무리 읽어도 너무나 솔직하고 처절한 시간입니다. 너희 가운데에 있을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바울도 이런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그는 다시 십자가만을 알기로 작정하고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재기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바로 그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그의 지식도 아니오 그의 능력도 아니오 그의 의지도 아니오 변화되는 환경에서 온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복음을 재발견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하시기를 '말씀에 붙잡혔다'라고 말합니다. '쑤네케토' 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Occupied, 점령되었다는 겁니다. 완전히 포로 되었다. 점령되고 완전히 붙잡힌,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이리하게 될 때에 생각도 의지도 운명도 이제는 다 그를 붙잡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게는 자유가 없다고. 강권적인 역사가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보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부득불 복음을 전한다. I have no choice, 내게 선택권이 없어요. 이 길 밖에 없어요. 내게 자유가 없다. 자유를 그리스도에게 반납해버리고 말았어요. 바로 그 상태가 바울의 모습입니다.

저는 가끔 북한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저렇게 북한이 어려운데 어떻게 북한이 그렇게 계속해서 체제와 함께 서있는지 궁금하다 그래요. 그럴 때 제가 설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보고 듣고 확증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 김일성 수령과 그 부자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충성을 다하고 있느냐" 이제 대답합니다. "우리는 다같이 전쟁고아입니다." 6·25전쟁 때 많은 폭격을 했어요. 아주 다 융단 폭격을 해가지고 다 망해 다 죽어버렸어요. 고아들만 어린아이들만 남았는데 이 우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탁아소를 세웠어요. 그래서 수령님께서 우리를 잘 키워주셔서 이렇게 컸고 또 그 중에서 우수한 사람들을 김일성대학을 나오게 했어요. 최고의 대학을 나오고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도 모릅니다. 오로지 수령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고로 그 어버이 수령이라는 말이 절대로 과장된 말이 아니에요. 진짜로 어버이 수령밖에 몰라요. "그런 고로 우리는 그 큰 은혜에 감사해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하도기가 막혀서 지금 물었어요. "당신같은 사람이 몇 사람이요", "20만명입니다." 그 20만명이 있으므로 북한은 서 있는 거예요. 이걸 잊지 말아야돼요. 전적으로 헌신해요. 그에겐 자유가 없어요. 아무 선택권도 없어요. 오로지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있을 뿐이요. 보세요. 참으로 믿음의 사람은 선택권이 없습니다. 특별히 결과에 대해서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라' 하신 분이 책임질 겁니다. 가라하는 말씀을 듣고 가면 그 책임은 나에게 명령하신 그 명령자가 책임을 지는 겁니다. 그런 고로 갈 때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잘될까 못될까 걱정 안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당신 마음대로 입니다. 그가 아시니까요. 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전가합니다. 나는 그저 순종할 뿐이요. 아무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용기와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 나간다면 "나는 깨끗하니라"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His part and my part. 내가 할 일, 내가 다한 다음에는 나머지 일을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말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주고, 우리가 다같이 순종하지마는 잘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내가 할 일, 내가 다했어요. 그런고로 나는 깨끗한 거요. 에스겔 3장 18절, 19절에 보면 유명한, 아주 엄격한 말씀이 있습니다. 전쟁상황 중에 나팔수가 있습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어요.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저 적이 올 때 나팔을 붑니다. 일어나라고. 나팔을 분 다음에 정황이 잘못돼서 전쟁이 이겼든 졌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에 지더라도 그래도 나팔을 분 그 사람만은 깨끗합니다. 손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나팔수와 이 파수꾼이 졸아버렸어요. 불어야할 나팔을 불지 않았어요. 이 때문에 적이 들어와서 포위하고 그만 이 부대가 전멸됐다 하자. 그리하면 이 모든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습니다. 나팔을 불지 아니한 책임들. 그런 고로 성경은 엄하게 말합니다. 피 값을 찾으리라 그랬어요. 여러분 내가 전해야될 것은 전해야 되고 내가 해야될 일은 내가 해야됩니다. 그 다음에 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길 것이요. 나는 손이 깨끗합니다. 내 할 도리를 다 했어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만이 진정한 용기와 자유가 있는 것이예요. 내가 모든 일을 다 하는 게 아니요. 내가 할 도리만 되면 되요. 내가 전할 복음을 전하고, 내가 해야할 희생을 하고, 내가 해야할 사랑을 다하고 그 다음엔 하나님이 하실 일이요. 그런 고로 나는 손이 깨끗하노라 그랬거든요.

특별히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그는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많다. 이 고린도의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는 최종 승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너를 해롭게 할 자가 없느니라. 그런 고로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자체를 믿고 열심히 그 복음을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토마스 에디슨의 이러한 말을 사랑합니다. 그는 한평생 발명가로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한평생 일한 사람입니다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루라도 소위 말하는 노동이라는 것을 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재미가 있어서 참을 수 없어서 한 일이니깐.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난 노동을 한 일이 없다. 너무 재미가 나서 미쳐서 한 일이니까 말입니다. 성공만 했었던 게 아니에요. 이 전등 하나를 발명하는 데 600번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한번 성공한 겁니다. 그래도 그는 그가 하는 일이 너무 재미가 있어서 이걸 억지로 이걸 할 수 없어서 돈벌려고 그렇게 했던 일이 아니에요. 신바람이 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한평생 이랬노라고 말합니다.

미국 시카고에서 기독교대회가 모였을 때 '성서오류 유무'에 대해서 3일 동안을 토론을 벌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온 대표 세사람은 3일 동안 참석하면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맨 끝에 당신들도 몇 마디 하시구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면 오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텐데 뭘 토론하고 있노." 모든 사람들이 숙연해졌습니다. R. A. 토레이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성경 번역이라는 게 많습니다. 이런 번역 저런 번역 소위 버전이라는 version 이라는 그런 많은 번역이 있는데, 요새는 유머도 번역이 있더라고요. 어느 버전이라고……. 그런데 그는 말합니다. 가장 위대한 번역은 내 삶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다. 내 생활 속에서 성경을 확증해 나가는 것이죠.

나는 무엇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입니까 나를 완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길은 말씀밖에 없고, 말씀에 붙잡혀 사는 길 외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붙잡혀 자유할 때 말씀을 사랑할 때 말씀을 기뻐할 때 그리고 충성을 다하여 순종했을 때, 우리의 영혼은 기뻐합니다. 그 속에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세상 떠나기 직전에 제자들은 될 수 있는대로 많은 귀한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모여앉았습니다. 아직도 그 의식이 분명할 때에 제자들은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로부터 배운 예정론, double predestination 이중 예정이라는 문제는 아무리 들어도들어도 좀 납득이 가지 않는데 선생님 혹 그 문제에 대한 의심은 없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칼빈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Bible said so." 성경이 시작하는 데서 시작하고 성경이 가는 대로 가고 성경이 멎은 데서 멎었노라. 성경이 그와 같이 말한다, 성경말씀에 충실할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성경을 사랑했습니까 얼마나 성경말씀대로 살았습니까 말씀에 붙잡혀 사는 바로 그 사람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영광과 능력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말씀으로 일깨워 주시고 말씀으로 새롭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원컨데 그 말씀에 살아있는 능력이 함께 하사 말씀에 온전히 붙들려 사는 자유인이 되고 전파자가 되고 지혜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