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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노하는 자 (마 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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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와 참 함께 계신다 라는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시고 계신 말씀이 참 깊이가 있다 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다른 때보다 더 강하게 함께 하시면서 뒷받침하시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마치 주님이 옆에 계시면서 “그래, 해! 해!” 이렇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대개 설교주제가 공통적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회복’에 관해서 설교할 때에는 더욱 강하게 임재하셔서 뒷받침 해 주십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제 할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뒷받침해 주시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회복을 위한 전국 집회가 횟수를 더해갈수록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나 하나님의 행하심을 지켜보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행하시고 나타나실 때가 매우 가깝다 라고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오늘 본문은 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기 원하시나요 진심으로 원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원하시나요

어떤 분은 “길을 예비하는 자의 영” 에 대해 언급하면서 “과도기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예비하는 자들을 보내셨다” 라고 말합니다. 실례로 엘리야 시대, 사무엘 시대, 예수님 시대를 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말세지말에 놀라운 부흥으로 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요한에게서 보여준 것처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영” 으로 오늘날 임하셔서 길을 예비케 하신다 라고 설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이클 빅클 목사가 그 부분을 많이 연구하였으며 집중적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

오늘날은 시기적으로 매우 절박한 시기입니다. 성경에 예언하신 놀라운 일들이 지금 전세계적으로 곧 일어날 것입니다. 이같이 절박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시고 부르시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부분을 오늘 설교를 통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전 오늘 12절을 중심하여 살펴볼 예정입니다.

12절을 봅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강력하게 확장되고 있다

12절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부분을 영어 성경인 NIV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and forceful men lay hold of it.”. 이 부분을 우리말로 직역하면 “세례 요한의 때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어오고 있으니 침노하는 자는 그것을 붙잡으리라” 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어 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어 오고 있다” 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의미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 전후 문맥을 살피는 일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1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 말은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이 땅에서는 세례 요한보다 훌륭한 이가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보면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낫다” 이런 말이 것같은 데 잘 이해가 안가는 구절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같은 의견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선지자와 율법의 예언한 것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지금도 구약을 세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율법, 선지서, 시가서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이런 의미입니다. 요한은 구약의 질서를 따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입니다. 즉 구약의 선지자 중에서 요한보다 큰 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구약이 언급한 메시야가 오는 예언이 성취되어 주님이 오셨는데, 요한은 바로 그 메시야를 준비하는 자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요한보다 더 큰 기름부음이나 더 큰 사명을 감당한 자가 없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임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은 이 부분을 설명할 때 군사용어를 빌어 표현하곤 합니다. 마치 공수부대원들이 적진에 낙하산으로 침투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임하심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천지창조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주신 권세를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죄를 범함으로 실패하였습니다. 사탄에게 빼았긴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말했던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자신이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자기에게 절하면 이 세상을 주겠노라” 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사탄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탄이 어두움으로 지배하는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공수부대원처럼 침투하신 것입니다. 거점을 확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놀라울 정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요한까지가 구약시대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큰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소개한 자였기에 그는 큰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 이 땅에 임하게 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해서 급속도로 확산되어 가는데 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온 자 중에 가장 작은 자라 할지라도 그는 요한이 가지고 있던 영적인 면보다도 더 큰 영적인 은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나 엘리야를 통해서 이루어진 일들이 그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엄청난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나 히브리서 등에서 보면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어진 그 놀라운 은혜가 그들에게 부어진 은혜보다 더 크다고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십자가를 압니다. 거기서 흘리신 보혈로 구속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섭니다. 거기서 비롯된 모든 은혜를 받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이 성도들은 그림자만 알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의 실제를 알고 모든 영적인 실제를 접하며 살아갑니다.

신약 시대에 사는 적은 성도라 할지라도 구약 시대에 살았던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였던 성도들보다 더 영적인 은혜와 축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으되 그에게 임한 영광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또한 가려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보는 듯 영광에서 더 큰 영광으로 변화하는 은혜를 누립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은혜가 심지어 모세가 보았던 은혜보다 더 큰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세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은혜가 클수록 책임이 더 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고 있다는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어 오고 있다” 는 말은 종합적으로 볼 때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침투조처럼 오셔서 거점을 확보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산시키심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어두움의 세력을 파괴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이 확산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로부터 그 나라는 강력하게 확산되어지고 있습니다. 말세지말에는 말할 것도 없이 더 강력하게 확산되어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산되어지는 본보기가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여기서 주님은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가서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일을 예수님이 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회복되어야 할 주님의 사역이 바로 이것입니다. 현재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는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기도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와 교회 가운데 주님의 사역이 더욱 더 회복되기를 열망해야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어두움을 이기고 사탄의 세력을 멸하여고 사탄의 일을 파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오심을 통해서 특히 주님의 탄생을 통해 이미 우리 가운데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산되며 우리 가운데 더욱 드러나며 확장되기를 열망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고 있다” 는 말의 의미입니다. 말세가 되면 이 일은 더욱 강력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대시대마다 하나님의 길을 에비하는 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자들이 이것을 붙잡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까 침노하는 자들이 붙잡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학자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두 가지 비유

침노하는 자. 하나님의 나라가 말세를 당하면 더욱 더 땅끝까지 확장되고 확산될 터인데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는 자는 침노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침노하는 자는 어떠한 자들을 가리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필 것입니다.우선 본문은 침노하는 자의 반대가 어떠한 자들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6절부터 24절입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 비유를 드시고 계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여기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피리를 분다”에서 그 배경에 무엇이 있나요 결혼식이 있습니다. “애곡하여도” 그 말 뒤에는 장례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하시면서 결혼식을 비유하시구요, 우리가 장송곡을 불어도 라고 하시면서 장례식을 비유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임하심을 이렇게 비유하신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예식은 결혼식과 장례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결혼식과 장례식에 비유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한 편으로는 결혼식과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은 신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신나요. 하나님의 실제를 경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귀신들도 우리들의 말에 복종하고 쫓겨가더이다” 라며 즐거워했습니다. 기뻐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귀신이 쫓겨간 것을 인해서 기뻐하기 보다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고 하셨습니다. “관계가 먼저야. 그 관계로 인해서 그런 역사가 나타난 것이니 관계에 초점을 맞추라” 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은 신나는 것입니다. 그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신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식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장례식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장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나의 장래는 장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통치가 살아있으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그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목표, 내 주관, 내 생각, 내가 원하는 바, 내가 원하는 성도들의 기준 등과 같은 나의 통치가 있고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로 들어가 쓰임받는 것은 신나고 기쁜 일인 반면에 우리 자신에게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의 반대편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침노하는 자의 반대입니다.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무결단, 둘째는 사모함이 없음, 셋째는 무회개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능력으로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떠한 반응도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침노하는 자의 반대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으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와 사고를 버리고 근본적인 하나님의 삶의 방법과 목표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 가운데로 돌아오라고 회개를 촉구하셨음에도 그들은 회개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죄가 아니구요, 주님은 사모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시바 여왕의 비유를 들면서 “솔로몬에게 임한 하나님의 지혜를 보기 위하여 시바의 여왕은 보물을 들고서 솔로몬을 찾아 왔는데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음에도 너희들은 사모하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모하지 않았던 것도 죄인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침노하는 자의 반대되는 자세가 위의 세 가지입니다. 이 자세를 취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을 더 선명하게 보이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없노라” 고 다른 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을 누가복음에서는 “요나가 그 시대의 하나님의 표적이었던 것처럼 인자가 너희에게 표적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신 그 자체가 그들에게 심판이었다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임의로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하나님께서 그곳을 방문하신다 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방문은 축복과 심판을 동반합니다. 그 방문은 만왕의 왕의 방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셔서 요나를 통해 니느웨 성을 방문하셨을 때, 그 성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방문으로 깨닫고 돌이켜 회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여 용서와 구원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이곳에 와 있는 자체가 하나님의 방문으로서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와 있노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사모함으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길로 오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방문을 거역한 그대로 남아있겠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방문은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그것이 어떠한 경로로 왔던 그것이 하나님께로 왔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방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우리가 듣고 “오, 그래! 참 은혜롭다” 하고 넘길 사안이 아닙니다. 왜 방문 그 자체가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는 엄청난 은혜를 주시는 반면에 그것을 거역하고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고 사모하지 아니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왕이 누군가를 소환했을 때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그대로 있지를 못하게 됩니다. 하물며 만왕의 왕께서 우리를 방문하시는데 그대로 있으면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들은 어떠한 자들인가

이처럼 침노하는 자의 반대는 결단도 없고, 회개도 없고, 사모함도 없는 자세인데 이러한 자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침노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저는 오늘 예수님의 삶과 사역 가운데 나타난 침노하는 자들의 예를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난 침노하는 자들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침노하는 자들이 어떠한 자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목회자들대로 배울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도 성도들대로 배울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동기

침노하는 자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삶 속에 나타난 삶과 사역을 위한 동기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삶을 위해서건, 사역을 위해서건 두 가지 동기가 있었던 것같습니다. 그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Passion For God)과 사람을 향한 긍휼(Compassion For People)입니다. 이순서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METRO Christian Fellowship 같은 곳에서는 「Passion For Jesus(예수님을 향한 열정)」,「Compassion For People(사람을 향한 긍휼)」글귀를 크게 써놓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두 가지 열정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 걸쳐 보여지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열정(Passion For God)을 살피겠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밝히신 것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서 하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4장 32절입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며 제자들이 동네에 먹을 것을 사러 갔다가 돌아와서 그 광경을 볼 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누군가가 주님에게 먹을 것을 준 줄로 알았습니다. 이것을 아신 주님은 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

주님의 양식은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30절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 우니라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By myself I can do nothing; I judge only as I hear, and my judgment is just, for I seek not to please myself but him who sent me.
(나는 내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하노라)

요 14:31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또 반대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던 날이 안식일임을 아시면서도, 유대인들이 반대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아버지께서 오늘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고 하시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는 성전을 깨끗이 하시기 위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하던 자들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성경기자는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나의 집을 향한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셨는데 이것에서도 예수님의 살아가는 삶이나 사역 모두에서 중심,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차고 넘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주님에게 욕하고 대적하고 반대하건 상관없이 아버지의 일을 하셨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의 양식처럼 하셨습니다. 그것을 끝까지 마치는 것이 자신의 소명으로 아셨습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셨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자기의 모든 삶을 불태웠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사역의 확장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인기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을 향한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중에 많은 경우 헬라어 성경에는 이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말로는 여러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창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자의 경우에는 “자궁”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할 때 몸의 부분을 통해 비유하곤 합니다. “창자”, “자궁”은 그 속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인이 자기 태 속에 있는 아이를 불쌍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문둥병자가 와서 예수님께 말하기를 “당신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영어성경에는 이 부분에서 Compassion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수께서 저를 긍휼히 여기사” 혹은 “불쌍히 여기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할 때 이것은 마치 여인이 자기 배 속에 있는 아이에 대해서 가지는 사랑과 애착과 긍휼함을 가지고 주님께서 그를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나인 성의 과부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자 장사 길에서 우는 눈물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청년아 일어나라” 고 외치시며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에는 사람을 향한 긍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서역 하나하나에 이러한 사람을 향한 긍휼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부터 38절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여기서 36절의 “민망히 여기시니” 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볼 때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으로 복음을 전파하시고 전도하시고 사람을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중심에는 이 단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까지도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 하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행위가 죄인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동기는 첫째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었으며 둘째로 사람을 향한 긍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억해야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있을진저 너희 외식하는 자들이여” 라며 꾸짖으셨을 때에도 예수님의 중심에는 그들을 향한 긍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꾸짖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람을 향한 긍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람을 향한 긍휼이 전제된 상태에서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주님은 그 앞에 있던 자들 곧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 바리새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삶을 위해서건, 사역을 위해서건 두 가지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Passion For God)과 사람을 향한 긍휼(Compassion For People)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전제를 갖고 침노하는 자의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오늘 날의 목회자들이 모두다 예수님처럼 목회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어요. 그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사역의 모델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에수님처럼 목회해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보면 볼수록 느껴지는 바는 바가 있어요. 요사이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가 많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미나에서 전파되는 메시지나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은 오늘날로 하면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런 기준으로 보면 예수님은 목회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에수님처럼 똑같이 따라서 해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사역의 가장 온전한 모델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예수님은 실패한 목회자이구요 더 나아가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목회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이것이 고민이더군요.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만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 말을 하는가에 대해 답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한 편으로 보면 예수님은 큰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수천 명, 수만 명씩 따라왔기에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세워 놓고 제자들을 적당히 세워 관리 할 수 있었습니다. 제 말이 맞나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안하실뿐만 아니라 반대로 하셨습니다. 이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의 목회관이나 신앙관에서 보면 예수님은 참 모난 분이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전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동기를 말씀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행하실 때 그 동기들을 가지고 행하셨습니다. 이것을 먼저 반드시 이해하셔야 다음 말씀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동기를 이해하시면서 제 얘기를 들으십시오. 오늘날의 목회자들의 목회관이나 신앙관에서 보면 예수님은 참 모난 분이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7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예수님이 손님으로 초대받고 가셨습니다. 38절부터 입니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보십시오. 예수님이 얼마나 모난 분이신가를. 주님은 지금 손님으로 초대받아 바리새인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대단히 모난 분이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목사님이 손님으로 어느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화있을진저” 하면서 주인에게 말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45절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한 율법사가 기분 나쁘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연하죠. 얼마나 우리 주님은 모난 분이셨던지. 여기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서는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니까 제자들이 말하기를 “주님, 이렇게 말씀하시면 저들이 기분 나빠할 텐데요” 하였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가만 두어라 하나님께서 내게 붙이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자가 없노라” 예수님에게 있었던 두 가지 동기 즉 주님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람을 향한 긍휼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에서 하셨던 말씀 또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참 모난 분이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목회 관과는 매우 달랐습니다.

누가복음 6장 22절과 23절 그리고 26절입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날의 목회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택하십시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사역의 모델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처럼 목회해야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만 있는 줄 아세요 예수님은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목회의 실패자입니다. 그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이 좇아 왔는데 커다란 교회를 지어서 많은 사람을 동역자로 세워서 충분히 관리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렇게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목회자의 자질에서 보면 주님은 목회자의 자질이 없었던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4장 25절입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지금 수천 명의 무리가 주님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돌아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26절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지금 성도들이 몰려왔는데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보다 그들을 미워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몇 명이나 떠나갔으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여기서만 끝났으면 좋을 텐데 27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십자가란 죽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여기까지도 그런대로 이해하겠는데 망대 비유를 드셨습니다. 또 전쟁의 비유를 드셨던 것입니다. 3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목회에 성공하지 못한 목회자입니다. 그분의 삶과 사역은 오늘날의 세미나에서 가르치는 바와는 정반대로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목회에 적합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하고 있는 제 설교가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전 지금 신앙의 기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리 적당히 돌아갑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2장 20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로마서 6장 11절에서부터 13절에서는 이렇게 또한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예수님은 모가 나셨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중심을 시험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 여러 군데 나오지만 대표적으로 두 군데만 예로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하신 행동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날이 안식일인줄 아셨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감동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한데 하나님께서 이날이 안식일인 것을 깜빡 잊으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식구들도 다 버린 38년된 병자였습니다. 그가 그 병자가 깔고 있었던 그 자리가 뭐가 소중하다구요. 또 그 누웠던 자리는 얼마나 더러웠겠습니까 똥, 오줌으로 찌든 자리였을 것입니다. 더러움과 냄새로 찌든 그 자리를 뭐가 소중하다고 집으로 가져가라고 했겠습니까 가져가라고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더러운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가라면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안식일관에는 물건을 안식일 날 옮기지 못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곧 벌집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에게 달려들 것을 아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걸까요 그들의 중심을 드러내시기 위함 이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먹는 것이 큰 일중의 하나였습니다. 가난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능력으로 배가 불렀으니 백성들이 얼마나 좋아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배가 부른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잘 다독거리고 잘 양육하여 거대한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기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몰라도 정말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들은 짐승의 피도 마시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목매달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가 피체 먹지말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식인종이 되라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실제로 이 말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아 어렵도다” 하면서 예수님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니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하였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아도 예수님은 오늘날로 칠라면 실패한 분이셨습니다. 오늘날에 관점에서 보면 주님은 목회자의 자질이 없었던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목회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확장될 것입니다. 교회도 성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장은 하나님 나라의 방법을 따른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로부터 20절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님은 자기의 방법대로 제자들도 행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 것은 예수님에 삶과 사역 속에 나타난 침노하는 자를 보이기 위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난 침노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사도행전 1장을 보십시다. 1장 12절에서 15절까지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아까 말씀들인 것인 것처럼 오늘날에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실패한 목회자라고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방법이 틀린지 오늘날 목회적인 방법이 틀린지 분별하십시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삶을 자세히 보면 그 삶은 제자들을 키우는 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침노하는 자들을 선별해 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곁에 왔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아도 20세이상 남자만 5,000명이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굶으면서까지 사모하며 예수님을 쫒아던 무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앞서 말씀드린 과정들을 통해 거의 모든 사람을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들의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신앙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몇 명이 남았는지 아십니까 120명이 남았습니다. 이들이 침노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하시는지 정확하게 아셨던 분입니다. 이들을 분별하시고 이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면 저들이 왜 침노하는 무리들일까요 또 침노하는 무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무리인데 어떻게 하면 침노하는 무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 무리들 가운데에는 몇가지 부류가 있었습니다. 우선 사도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여인들이 있습니다. 여기 여인들은 갈릴리 지역에서부터 치유나 다른 과정을 거쳐 예수님을 자기에 모든 것으로 섬겼던 여인들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도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제일 먼저 찾아간 자들이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자들입니다. 또 다른 부류가 있는데 예수님의 친족들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수가 있습니다. 모두 네 부류이며 합한 숫자가 120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12명의 제자들 외에 보낸 제자들 70명 혹은 72명의 숫자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12 제자들 중에서는 가룟 유다를 빼면 11명입니다. 그리고 70명 혹은 72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합니다. 11명과 70명 가운데에서 상당수, 여인들, 친족들의 네 부류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120명 중에서 이 네 부류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의 수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자, 이들은 어떠한 의미에서 침노하는 자들이었을까요 아까 예수님의 사역의 동기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람을 향한 긍휼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의 목회 관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집중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중심을 드러내시는 행동을 돌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도록 건드리셨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매우 모나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사역의 모든 과정을 통해 남은 것이 바로 이 무리들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분별되어진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침노하는 자들이 될 수 있었을까요 또 어떤 자들이 침노하는 자들일까요 침노하는 자들은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모든 것을 다해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침노하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또한 주님의 오실 것을 예비하는 자들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어떤 자들이 주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자들일까요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모든 것을 다해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오병이어의 사건을 예로 보아서도 알지만 예수님 주변에 모인 자들은 매우 사모하는 마음으로 온 자들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며칠씩 굶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예수께서 서울집회를 여시는데 북쪽의 함경남북도나 남쪽의 거제도, 부산 등지에서 찾아 온 격입니다. 전국에서 몰려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사흘 동안 좆아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침노하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 동참하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은혜받기 위해서 전국에서 몰려올 수 있습니다. 사모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과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주님과 동행하면서 좋은 일만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성경에 좋은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1년 365일동안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교회를 맡기신 것입니다. 이들이 침노하는 자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부류 중에 예외적인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식구들입니다. 마리아, 요셉의 식구들입니다. 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예수를 대적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자기 집에서 핍박을 받는다”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자신도 포함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동정녀가 아이를 가진 것입니다. 그 신앙을 생각해 보십시오. 천사가 말할 때에도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되리이다” 하였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처녀가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니요. 사람들이 얼마나 수군수군 말이 많았을까요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상황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처럼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되리이다” 이 말을 천사에게 한 것입니다. 그러한 마리아가 넘어질 수 있었는지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가운데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가 복이 있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3장 31절부터 35절입니다.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하시고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께서 너무 하시는 것같이 보이는 장면입니다. 왜 주님은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마리아와 형제들이 왜 예수에게 왔는가 하는 것을 보면 깨달을 수 있어요. 21절입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의 가족들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절부터 5절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 함일러라

여길 보아도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데 사도행전 본문에 이름이 나온 것을 보면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부으신 것 같습니다. 전환점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심으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5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의 다락방에는 120명만 있었습니다. 부활한 주님을 본 자들 중에 380명은 떠났습니다.

우리가 이들 남아있었던 침노하는 자들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행하심을 따라 동참하려면 주님의 행하심의 중심부에 있어야 합니다. 120명 모두의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행하심에 중심부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드려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단지 주님의 행하심이 놀라워 은혜받기 위해 모여든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들고 삼일씩이나 굶어가며 주님을 좇기는 하였지만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드려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행하실 때에 중심부에 있지 않으면 시험 들기 마련입니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잘 넘어집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그 얘기는 당시에 팽배해 있던 종교적인 편견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형제들은 넘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로 건져주셨기에 나중에는 돌아와서 야고보의 경우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 됩니다.

결론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강력하게 확장되어 오고 있습니다. 전국 집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횟수를 거듭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강력해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때에 침노하는 자들이 그것을 붙잡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대시대마다 그러한 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침노하는 자들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매우 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과정을 통해서 침노하는 자들을 분별하셨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120명을 분별하셨습니다. 120명 면면을 보더라도 그 누구하나 똑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출신성분이나 출신지, 배움, 직업이 특별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똑같이 하신다고 믿습니다. 이 시대에도 그러한 자들을 쓰실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지금 그러한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기 원하신다고 하셨지요 제가 어떨 때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셔야 합니다. 보시고 동참해야 합니다. 그게 길입니다” 라고 하면 어떤 분은 생각하기를 “아니 내가 언제 동참 안한 적이 있나 일주일 한번 씩 꼭 동참하는데”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사흘씩이나 주님을 굶으면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좇았습니다. 여러분 은혜를 받으려고 좇아 다니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침노하는 자들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침노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자신의 삶을 모두 드려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그 중심부에서 동행하는 자들입니다. 때론 눈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론 괴로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삶을 다해 예수님과 동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변화시키시던 주님은 이 시대에도 우리들을 들으셔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침노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고 동참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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