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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대답 (합 0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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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다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 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2:1중)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시는 일에 대해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려야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심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2:3상)

기다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을 기다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옵니다.

이 세상에서 즐거운 생활을 라는 사람들, 세상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인생을 연락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되 파수군이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2).하나님의 말씀의 보호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2:2중)

하박국이 기다림에 하나님은 응답했습니다.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라’ 애 하나님의 말씀을 판에 크게 새겨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 말씀이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교만해지고 규범이 흔들립니다.

방향감각도 없이 자기 생각과 뜻대로 움직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말씀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우리는 기도만 해도 안되고 찬송만 불러도 안됩니다.

말씀이 함께 있어야 됩니다.

말씀이나를 지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도를 받아야 삽니다.

생명의 양식을 듣고 먹어야 우리의 행동에 방향과 규범이 정해져서 움직이게 됩니다.

때문에 급한 일이 생기거나 어떤 일을 하다가도 늘 말씀을 기억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쿡 찔로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고 쥐어 박혀도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 그때마다 필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는다’ 는 급한 일이 생길 때에 말씀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3). 말씀에 대한 믿음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는 약속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이 고난의 때, 고난의 파도를 헤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내의 방법은 신뢰이고(1절) 인내의 근거는 약속입니다(2-3).

인내의 힘은 겸손한 믿음입니다(4절).

약속을 믿고 신뢰하므로 인내는 가능합니다.

내 힘과, 내 인격, 내 노력으로는 인내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믿음은 선물이니 하나님의 은혜로만 인내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인은 살리라’(2:4). 교만함이 아닌 겸허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요, 선물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믿음의 교만’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의 교만보다 더 무서운 교만입니다.

믿음이 제것인 줄 알고 자기가 만들어 내는 줄 아는 사람이 믿음에 교만한 자입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로마 교황청을 가려고 알프스 산을 넘어가는 때에 산이 얼마나 험했는지 몸에 병이 들어서 한없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로마에 도착해서 그 유명한 세인트 죤스 루터란 교회의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면서 참회를 하는 예법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계단을 올라 가다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롬1:17,갈3:11,히10:38 에도 나와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마음 속에 로마서1:17절 말씀이 자꾸 떠오른 것입니다.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몸도 쇠약한데 무릎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데서 구원을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신학교 교수였습니다.

그는 로마서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시편도 강의했습니다.

강의를 하는 가운데도 이 말씀이 자꾸 떠오릅니다.

이 진리가 성경에 가득 채워진 진리입니다.

결국은 종교개혁의 횃불이 이 말씀으로부터 붙기 시작했습니다.

루터는 벌떡 일어나서 그 순간부터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게 되었습니다.

행위는 다만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는 열매일 뿐인 것입니다.

행위를 먼저 갖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열매가 감사와 감격 때문에 나오는 것이지 구원을 위해서 율법적으로 이루는 행위가 아닙니다.

새벽기도 나와야 구원 얻고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생각으로 나오셨다면 그것은 율법입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하루의 첫시간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럼으로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지 형식으로 드리면 안됩니다.

‘저가 죽었으나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이 말씀이 너무나 좋습니다.

믿음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죽었으나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옮기 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자기 집안을 구원했습니다.

그는 돈과 인격이 아닌 믿음으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을 했습니다.

순종은 내 인격으로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냥 순종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 생활을 하시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시오” 그게 야단치고 붙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되는 것입니다.

사라는 믿음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믿음이 가능으로 일으켜 준 것입니다.

믿음의 방법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신뢰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별 수 없이 먹은 대로 뱉고 먹은 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말씀을 먹고살아야 됩니다.

사람의 약속은 신실하지 못해서 무너질 수 있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과거를 회상도 하고 미래를 바라도 보고 신실한 약속을 믿는 근거를 가지고 인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거이 감사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예배에 충실히 참여합시다.

말씀을 통하여 인내를 배웁시다.

 2. 화를 피하라

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화있을찐저’ 는 본문에 다섯 번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1). 부정 축재하는 사람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2:6중)

화가 있어야 할 사람은 부정 축재하는 사람입니다(6-8).

오늘 우리 사회에 이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부정 축재는 도적질이요 하나님의 질서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계를 정해 주시고 재산을 정해 주셨으므로 그 외로 모으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에 위배됨으로 거두어 가십니다.

부정 축재는 또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미워하며 빼앗고 시기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에도 위배됩니다(6상).

강포를 행하니 의의 사상에도 혼동을 가져옵니다(8절).

축재는 마음을 비굴하게 하여 붙안케하며 축재는 죄로 이루어질 때 헛된 것입니다.

축재는 영성에 해롭고 수치를 낳았습니다.

축재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돈 벌었다고 성공한 것도 아니며 횡재했다고 성공한 것도 아닙니다.

매점 매석하는 자는 어떻게 보면 똑똑하고 경영학의 원리에서 보면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회 윤리로 볼 때에 모리배입니다.

상업도 상도의와 윤리가 있습니다.

8계명만 도적질이 아닙니다.

내 돈 가지고 내 재주로 내가 돈 벌었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땅장사, 집장사 해서 돈 벌었는데 왠 상관이냐 하면 안됩니다.

너무 지나치게 이를 본 것도 잘못이며 남에게 돌아갈 기회를 중도에서 가로채는 것도 도적입니다.

 땅장사를 하고 계십니까. 집장사를 하십니까. 땅은 본래 하나님의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땅의 사용료를 내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사용하지도 않는 집을 몇 채씩 사 놓고 투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물건 사용의 법칙에 위배됩니다.

내가 만족하고 있는 동안 집없는 많은 사람들이 울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인 중에도 여러 채의 집을 사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계약을 한다고 합니다.

정부를 속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속이는 거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고객을 속여서 지나치게 이를 얻고 고객의 뒤통수를 보며 하하 웃지만 하나님은 부정 축재자의 정면을 향하여 노하실 것입니다.

 2). 불 의한 사람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2:9하)

두 번째 화를 당한 사람은 의를 무너뜨린 자입니다(9-10.

대개 축재를 하면 마음이 좁게 되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긁어모았으므로 늘 불안합니다.

그래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높은 곳에 숨으려고 합니다.

‘담에서 둘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 너무나 무서운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을 착취하여 뺏은 물자를 가지고 집을 짓고 좋다고 하나 실상 그 건축 재료들이 착취한 죄악을 소리쳐 말하니 자연물이 죄악을 성토하도록 그 죄악이 사무쳤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는 가정에도 욕을 부르고 자신의 영혼에도 화를 자초합니다.

 불 의한 이를 남겨 하나님께 헌금하기보다 의로 상윤리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예물이 될 것입니다.

말로, 폭행으로 타인을 죽이는 불의도 행치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심령과 육체가 죽을 때 내 영혼과 내 육체에도 하나님의 화가 가깝다고 하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맙시다.

가족을 부양한다는 핑계로 불의를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가족에게 화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가족을 사랑하기에 의를 지킵니다.

 3). 폭력을 행하는 사람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2:12)

피흘리는 죄가 폭력입니다(12-14).

피로 읍을 건설했다는 말은 혁명을 일으킨 것을 말합니다.

요즈음의 폭력은 피를 흘리는 체형뿐 아니라 경제 폭력, 성폭력, 정치적인 인권 폭력 등 갖가지 폭력이 있습니다.

경제력은 돈으로 사람의 목을 꽉 죄는 것입니다.

폭력은 반드시 폭력을 몰고 옵니다.

인류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은 그의 동생의 피를 흘린 자입니다.

베드로는 칼로 말고의 귀를 잘라서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4). 타인을 범죄케 한 사람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 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2:15)

죄를 지으면 혼자나 짓지 자른 사람까지 죄짓게 만드는 사람입니다(15-17).

남에게 죄를 짓게 했으니 자기도 수치를 당하게 되려니와 죄값은 배로 받습니다.

조용히 있는 사람 할퀴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분노케 하고 살인케 하고 죄짓게 유도하며 조정하는 사람, 돈으로 죄짓게 하여 이익을 보려는 사람은 화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죄들을 교회가 지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 받으십시오, 은혜 받으세요’ 하면 구름 때처럼 몰려오고 ‘화 있을찐저’ 하면 설교에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이 바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때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화를 당하게 됩니다.

 5). 우상 숭배하는 사람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2:19상)

민족의 흥망성쇠가 여호와 하나님께 달렸고 헛된 우상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우상은 거짓 스승이요(18절) 우상은 생명이 없으며(19절) 산 사람이 우상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악입니다.

금과 은으로 입혔다는 말은 금과 은에 마음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속이고 불의하고 빼앗고 땀흘리지 않고 모으고 폭력을 행사하고 타인으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일이 내게, 내 가정에, 내 이웃에, 내 교회에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모든 것이 결국은 우상 숭배로 떨어질 것이고 그 결과는 우상과 함께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명예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받고 함께 하시는 복을 받으면 하나님의 일만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높임을 받고 인도함을 받는 데 막힐 것이 없습니다.

먼저 찾을 것을 먼저 찾을 줄 아는 작 되어야 합니다.

 3. 잠잠 하라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2:20)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하박국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천하는 성전에 계신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밖에 없습니다.

이유와 별명과 고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 하나 밖에 없습니다.

성전의 개념은 구약의 개념입니다.

성전이 있으면 제사장이 있어야 되는데 제사장이 없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므로 성전의 상징은 끝이 났습니다.

오늘은 교회라는 개념이 더 신약 적이고 성경 적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서 너희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박국이 할 일은 잠잠하고 오직 기도할 것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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