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원받은 성도의 사회 생활 (딛 03:1-7)

첨부 1


제가 항상 지적하는 바이지만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서 반 드시 극복되어야 할 점은 소위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사고 방식, 즉 이원론 적(二元論的)인 사고 방식입니다.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이란 신앙 생활과 일상 생활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 생활이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신앙 생활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 니다.

 교회에 나와서 봉사를 한다든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복음을 전한 다든지 혹은 예배나 성경 공부 그리고 기도 시간처럼 신앙이 직접적으로 표 현될 때에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강하게 실감하지만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바로 신앙 생활이 며 신령하고 영적인 생활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성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한국 교인들의 의식 구조 속에서 가장 오해되고 있는 단어 중의 하나가 신령하다입니다. 저 사람은 참 신령하다는 말을 들을 때 얼른 떠오르 는 이미지는 저 사람은 식사도 안 하고 아주 열심히 기도한다, 혹은 그는 40일간 금식기도한다, 전도하는 일에 아주 광적으로 열심이다, 종교적으로 지나치다 등등입니다. 설령 의식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정의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보통 신령하다는 말을 그런 방향에서 사용하 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신령하다는 말 은 삶과 유리된 종교적인 행위 속에 우리 자신을 몰두시키는 정도를 가리키 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원리를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 실하게 내 삶의 장(場)에 적용하고 있는가에 달린 문제입니다. 성경에 따르 자면 기도할 때 목소리 톤이 유달리 괴상하다든지, 뱀 쫓는 소리를 잘 낸다 든지, 혹은 기도를 오래 한다고 해서 영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 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 생활과 직접적으 로 관계된 일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마음을 다해 임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 질구레한 사건들, 즉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한다든지, 백화점에서 계산을 잘 못한 사람과 시비를 가린다든지, 혹은 고용주로서 고용인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더불어 삶을 나누는 것 등은 영적이지 못한 일로 취급하여 소홀히 여기기가 쉽습니다.

 자꾸만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다 보니 특별히 한국의 교인들 은 각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주권(Lordship)이라고 하는 중요한 문 제를 놓쳐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야 한다는 말은 내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즉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 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동기가 영적이고 또 그 목표가 영적이라면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영적인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밥 먹는 일도 영적인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하여 하라(고전 10:30).

 내가 이것을 먹고 건강을 얻어 정말로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내 삶을 드 리고 싶다. 내 삶의 전체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 내 삶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타내는 화육(化肉)이 되었으면 하는 의도와 동 기를 가지고 먹고 마시면 그것은 신령한 일이 됩니다. 부흥회 못지않게 먹 는 일도 중요합니다.

동기나 목적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 삶의 모든 영역이 다 주님의 일이 될 수가 있고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全)영역을 다스리는 주인 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주권입니다.

우리가 종종 듣게 되는 비판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많아지 는데 왜 세상은 자꾸만 어두워지느냐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교회 가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주권이 적용되지 못한 까닭이라고 봅니다. 즉, 그리스도의 주권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갖게 되는 그런 열망과 확신을 가지고 가정과 직장과 가게에서 신앙의 원리에 바탕한 삶을 살고 있다면, 저는 정말 문자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우리의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으신 어떤 분이 저에게 두 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보내 주 셨는데 거기에는 이 편지에 실렸던 내용을 1월 첫째 주일에 꼭 이야기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 내용은 꽤 부정적이었습니 다. 종업원을 함부로 다루고 4개월에 한 번씩 종업원을 갈아치우면서도 스 스로는 신앙이 돈독한 사람으로 자처하는 어떤 교인을 고발하며 그를 용납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항변이 적혀 있었습니다. 차라리 정직하게 자기 이름 을 밝혔다면 발표할 용의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 발표를 하지 않기로 했습 니다. 그러나 그 분이 지적하고자 했던 바는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디도서 2장에는 교회 생활과 가정 생활에 대한 교훈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정에서 남편과 자녀들을 어떤 태도로 섬길 것인가 하는 문 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의 윤리도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상황으로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가정 생활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 할지 모릅니다. 가정에서 종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내가 고용하는 종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도 영성(靈性)을 테스트하는 진정한 시 금석이 될 수 있습니다.

 3장에서는 사회 생활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낼 것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사회 생활을 어떻게 했었는가를 지적하며 마지막으로 그러한 사회 생활을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사회 생활 태도

사회 생활에 대한 바울의 권고는 여러 가지이지만 적으로 복종과 평화, 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과 2절에는 대단히 중요한 동사 하나가 나옵니다. 그것은 기억하게 하라는 단어입니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 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1,2 절).

어떤 영어 성경에는 기억하게 하라는 말이 끊임없이 기억시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 다.

  법 질서에 대한 복종 물론 문자 그대로 읽으면 이것은 법 질서를 행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 하라는 것입니다.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복종이 거듭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 게 복종해야 할 이유를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라고 밝 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는 사회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소위 법을 다루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복종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나 사회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기대하 신 법에 대한 복종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언제나 제기되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법 질서를 집행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불의한 것을 요구할 때에도 복종해야 옳은 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불변의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 한 복종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이 될 때는 더 높은 권위, 즉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권위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옳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때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들에 대한 불 복종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요구에 대해서는 아니오를 말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한 순복의 자세는 잃지 말아야 합 니다. 이러한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사도행전 5장이 그와 같은 예(例)를 아주 잘 보여 주는 고전적인 예라고 생각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 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5장의 배경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 체포당하고 전도를 못 하도록 명령 을 받은 것입니다.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 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敎)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 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7,28절).

 사도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지상명령이었고 누구의 명령과도 타협할 수 없는 소중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전도를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냐는 대제사장의 물음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 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5장부터 시 작해서 죽 읽어 보면 관리들이 투옥하는 과정에서 사도들이 저항했다는 언 급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특정한 요구에 관 해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가지고 말했지만, 그러한 순간에도 그들은 순복의 자세, 복종의 자세를 전혀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범위를 좁혀 봅시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요구가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판단했을 때 하나님께 대한 불복종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녀는 부모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부모가 있겠습니까마는 때때로, 부모가 자녀들에 게 거짓말을 요구하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녀는 당연히 순종할 수가 없습 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를 했다고 해서 부모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다든가 당신 같은 아버지하고는 더 이상 살지 않겠소. 당신이 인간이오 하면서 공격하는 것은 그 부모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스스 로 거부하는 셈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때에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명령을 따르 자면 절대로 그 부분에 관해서는 순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관 해서 제가 거절한다고 해서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 말씀 앞에 순종하는 저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권위에 대한 순종' 문제에 관해서는 기독교계 내에 두 가지 극단적인 견 해가 있습니다.

 첫째 견해/극단적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의 자세

이것은 정의를 위해서, 특정 명령에 대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민 불복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칫 잘못하면 반항하는 삶을 살게 되고 맙니 다. 반항을 위한 반항... . 그러다 보면 매사에 반항을 하게 되고 하나님이 세운 질서 그 자체를 거절하는 아주 부정적인 인생이 되고 맙니다. 소위 정 의(正義)의 이름으로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극단적인 삶의 모습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둘째 견해/권위에 순복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불의한 요구에 대해서도 복종할 자세

이것은 결국 불의를 정당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합니다. 우리는 하 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 아니오를 말해야 할 순간에는 분명히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불복종이 아니라 아직도 순종하고 있다는,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분이 세우신 삶의 모든 질서 속에서 근본적으로 복종 의 자세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바울은 여기에서 강조하 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영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경을 많이 알고 암송할 수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 을 할 때 정말 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 앞에 순종하는 자세로 사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끔 저는 우리 교회 임원들이 회의를 할 때마 다 늘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신앙 생활한다는 사람들이 교회당에 들어올 때 주차 하나 제대로 못 한다는 것입니다. 질서를 위해서 주차하지 말라고 선을 그어 놓은 곳에 도 기를 쓰고 차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시정하기 위해 서 이야기하면 오히려 핏대를 올립니다. 도대체 교회에 왜 오는지 모르겠습 니다. 사실 이런 데서 개인의 영성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 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그것을 솔직히 시인하고 고칠 수 있고 그런 작은 부분에서까지도 법 질서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의 평화 바울은 대인 관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와 해야 할 것 두 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훼방이란 말은 본래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입니 다. 즉, 본인이 없는 데서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툼이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사람과 구체적으로 논쟁을 일삼는 것입니 다.

관용이란 본래 어떤 사람의 죄과나 약점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는 상대방의 구체적인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처리 하는 방법과 태도에서 자기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평화를 끼쳐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건 멀리 있는 사람이건, 나 를 축복하는 사람이건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건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고 관용하십시오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2절)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부딪치는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의 이러한 원만한 대인 관계를 가리켜서 샬롬(평화)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사회 생활

바울은, 구원받은 후의 삶이 그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맥락에서 구원받기 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3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본능적으로 불복종이며 반항적입니 다. 반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순종하는 것이 부자연스 럽습니다. 우리가 이렇듯 자연스럽지 않고 본능에 거스르는, 자기 자신을 쳐서 하나님과 그분의 법을 사랑하고 그분 뜻을 따라 살고 그분이 세우신 권위를 존중하는 삶을 살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구원받았기 때문 입니다. 어떤 사람이 순종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거 듭났다는 구체적인 증거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전에는 순종치 아니한 자요... .

그래서 구원받기 전의 가장 주된 실상은 불순종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열거된 수많은 단어는 대인 관계들을 파괴하는 원인들입니다.

정욕, 욕심, 행락, 악독, 투기, 가증함, 미움, 이러한 우리의 욕구들이 결 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샬롬의 인간 관계, 즉 원만한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주범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이러한 삶을 살았다. 그 러나 구원받았으므로 달라진 이러한 삶을 마땅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스 스로에게 상기시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워진 사회 생활을 추구해야 할 이유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 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하려하심이라(5-7 절).

 바울 사도는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기 시작한 다음부터의, 구원받은 삶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맨 처음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출발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우리구주 하나님의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때에(4절).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전의 삶에 도전을 하며 새로운 삶을 추구해 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사랑 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잘난 것이 하나 도 없었던 나,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던 나이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 로 말미암지 아니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삶의 출발이었습 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삶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순간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삶 전체를 묘사하는 아주 놀라운 말씀이 그 다음 대목에 있습니다.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 로 하셨나니(5절).

여기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씻음'이라는 단어는 단회적(單回的)인 사건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한 번 씻음으로 완전히 씻어졌다는 것입니다. 중생의 씻음은 이미 그리스도인 들에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거듭났을 때 완전히 근본적으로 씻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더 씻을 필요가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은총에 근거해서 우리는 단회적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성령 의 새롭게 하심이 따르게 됩니다. 이 말은 계속해서 새롭게 하심이란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하십니다. 교리적으로 이것을 성화(聖化)라고 부릅니다.

 흔히 회개라는 단어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 안 믿게 된 상태에 서 예수 믿게 된 것, 그것이 근본적인 회개다, 또한 회개한 사람은 그 다음 에는 자백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란 단어는 구원받을 때의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쓰인 회개라는 단어는 굉장히 폭이 넓습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들도 날마다 회개해야 하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개념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 다. 근본적인 회개는 예수 믿지 않고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방향을 돌이켜 이제 그분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근본 적인 회개는 이 순간부터 뒤따를 수많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회개란 돌아선다,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회개 는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까 아직도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지 못한 부분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 다. 내 개성, 가정 생활, 직장 생활, 내 삶의 방식... .

 우리는 계속해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럴 때, 계속 새로워질 수 있도록 성 령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남으로 씻음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을 성령이 계속해서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정, 사회, 교회, 모든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삶, 하 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사회 생활을 추구할 수 있는 그 동력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사회 생활의 영역까지 포함하여 성화의 추진력으로서의,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물인 성령의 역할을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이 6절에 있습니다.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 사.

여기서 풍성히 부어 준다는 과거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부 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그분은 우리 속에 오십니다. 그런데 우 리 속에 오신다는 말을, 즉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을 그분이 공간 적으로 우리 안에 꼼짝도 않고 머물러 계신다는 뜻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 찾아오신 성령님은 계속해서 내게 오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기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회 생활까지 포함해 서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의도적인 결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부어 주시는 성령에 의해서, 그 성령의 능력에 계속해서 사로잡힐 때에 모 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궁극 적으로 우리는 왜 이러한 삶을 추구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7절에 있습니 다.

우리가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후사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 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신앙 생활의 출발을 이야기합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은 성화의 출발이지 끝이 아닙니다.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답게 그때부터 새로운 삶을 출 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즉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 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시 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것이 저 영광 속에 감추어져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누리기에 합당한 상속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우리에게 경건한 삶을 살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 다.

 록펠러의 자서전에 보면, 그가 한번은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당 신의 재산을 후손들에게 남기기 위해서 당신이 그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 그는 세 가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첫째, 나는 감사할 줄 아는 후손들에게 내 재산을 남기겠다. 둘째, 내 재 산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남기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내 후손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지금까지 훈련시켜 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 하나님께서도 저와 당신을 위해 영원한 기업을 준비하셨습니다.

 귀한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잘사는 분들이, 전혀 훈련되지 않은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이유로 거대한 재 산을 그냥 물려줍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마냥 흥청거리 다가 있는 재산을 다 탕진하여 넘어지는 재벌 2세들의 추한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로 후사 역할을 감당할 만한 인격을 갖추게 하려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부 단히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손해도 보게 하시고, 엄청난 손실도 입게 하시고, 그러면서 부단히 우리의 인격을 쳐서 주님 앞에 복종시키시며 주님을 바라보도록 계속 훈련시키십니다. 그래서 진실로 영광의 날에 주님 앞에서 받을 기업을 누릴 만한 후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회 생활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고 사소한 대인 관계도 후사가 되게 하기 위한 훈련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훈련을 알아차리지 못한 순 간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장차 저 영원한 기업을 누리며 하나님과 더불어 왕 노릇 할 그 영광의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어 그 것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께서 오늘 나를 훈련시키십니다. 사람과의 대인 관계 속에서, 내 직장에서 신경질나는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나를 그분이 기뻐하시는 후사가 되도록 훈련하십니다. 여기에, 주(主)의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