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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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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함없이 우리에게 좋은 날 주시고 여기에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리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이런 생각 해 본적은 없으신가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여기에 앉아 있을 때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피를 보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는 결코 완전하거나 영원한 효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들이 매일 자신들의 죄를 위해 희생제사를 드려야 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조차도 먼저 자신의 죄를 속하고서야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복되는 이러한 의식을 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번거롭고 힘든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하고도 완전한 희생이 드려질 때를 바라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더 이상 죄 때문에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고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는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지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본론

1.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야 합니다(19-20).1) 본문설명
본문은 먼저 예수님께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소는 자신의 죄를 속한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엡3:12)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해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길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년에 한 번 대제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휘장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길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길입니다. 또한 그 길은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길이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인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예수님께서 친히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는 사도행전 4:12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50,51을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20절에 의하면 그 휘장은 바로 예수님의 육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둘로 찢어진 휘장,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3,14)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엡2:18).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정결케 했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힘입었기 때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21-22).1) 본문설명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요 22에 보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음으로써 참되고 올바르게 된 마음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마음이 바로 참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온전한 믿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온전한 믿음은 완전하고도 확신에 찬 믿음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확신에 찬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온전한 믿음은 맹신도, 광신도 아닙니다. 미신은 더더욱 아닙니다. 확신에 찬 믿음은 하나님과 그 분이 하신 일을 굳게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히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단 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21절에서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이와같이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도무지 그런 마음과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6:5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였었다고 골로새서 1:21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18-21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살후1:12)에 속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은”(렘17:5)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17:17; 막9:19; 눅9:41)라는 책망을 받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였던 것입니다(히9:14).
또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마저도 예수님의 은혜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엡2:1-8).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고 “받았다”고 했습니다(약2:1).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같이 우리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마음과 믿음을 갖추어야 했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친히 갖추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만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의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 회개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리라는 확신에 찬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오(빌2:2:5-8). 과연 나는 믿음에 있는지 늘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시기 바랍니다(고후13:5).

3.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23).1) 본문설명
이와 같이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근거라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은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다음으로 본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에게 소망을 굳게 잡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23절 하반절을 보면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고백을 붙잡고 유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은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갈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리라는 소망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소망을 계속해서 고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굳게 붙들고 간직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소망은 계속적인 고백을 통해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소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소망을 이룰 주체가 불확실하거나 미덥지 못하다면 불안감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소망을 굳게 붙잡고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성경적 연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사람은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지니”(시146:3)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사2:22). 만약 사람에게 우리의 소망을 둔다면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쁘신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사46:11;55:11).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결코 식언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민23:9). 우리 사람은 신실함이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미쁘신 분입니다(딤후2:13).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시118:8)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소망을 이루실 분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갈 수 있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셨습니다(딛3:7).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엡2:12).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둡니다(딤전4:10).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소망이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바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시62:5).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굳게 잡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변치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히6:17-19).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으면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을 누릴 것입니다(골1:22,23).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또한 그것을 이루시리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그 소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입으로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1:6)라고 말입니다.

4.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24-25).1) 본문설명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굳게 붙잡아야 할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돌아본다”는 말은 ‘주의 깊게 살핀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서로의 부족함, 연약함 등을 살펴서 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관심을 가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돌아보는 것에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여기서 “격려하다”는 “고무하다, 자극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격려하고, 그 사랑을 바탕이 되어 선한 행실로 구체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서로 돌아보는 것에는 모이기에 힘쓰도록 권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모임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 모임에 참여함으로써 불신자들로부터 당하게 될 불이익이 두려운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구원받았으면 됐지 다른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교회 모임이 자신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영적 교만에 빠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서로 권면하여 모이기에 힘씀으로써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성경적 연결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각 지체로서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다고 했습니다(고전12:25-2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요일4:20).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5)고 하셨습니다. 먼저는 우리들 서로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진실하게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요일3:18). 갈라디아서 6:10에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히브리서13:16에서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면서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모임은 단순한 친목을 위한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임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시95:6). 또한 세우신 사역자들을 통하여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엡4:11,12).
3)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를 돌아보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에게서 보여져야 할 외적인 표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과 삶이 분리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믿음은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무리 큰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미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서로를 돌아본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열매들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해 나아가시기 바랍니다(히4:16).
둘째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마5:8).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11:6).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 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영생의 소망을 굳게 잡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기도 하겠지만 결코 우리의 소망을 흔들어 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들이며,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지체가 건강하지 않으면 온 몸이 고통을 받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은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그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 여기에 어떤 마음으로 오셨는지 질문하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이 질문은 제가 할 질문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우리들 각자가 스스로에게 해야할 질문일 것입니다. 나는 오늘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풍성한 은혜로 만족케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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