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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신비 (요 1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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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일생 동안 하신 모든 말씀과 행동 전체는 다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말씀 속에 담겨진 신비한 의미와 행동 하나 하나가 계시하는 의미를 바로 알고 따르게 될 때 참으로 복있는 사람 이 됩니다. 예수님은 삶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 여 주셨고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기사와 이적 을 나타내시고 어떤 때는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하셨 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기시고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시 면서 이것을 그대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삶의 자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본을 보여주 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본을 받고 사는 삶이 있습니다. 본을 보이며 살든지 본을 받고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선한 일에 본을 보이 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며 또 선한 일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본을 보이며 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 를 본받지 않고 세상을 본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습 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본을 보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 새 역사를 창조하여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 기독교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 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사도 바울이 위대한 사도가 된 것은 그가 참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는 순간 그것 을 곁에서 목격했던 청년 사울은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죽으면서도 원수를 용서하고 끝까지 사랑의 본을 보인 스데반을 보고 강한 사울의 마음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니라 스데반의 죽음에서 이미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속의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의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앞서가는 사람들입니다. 결코 남을 뒤좇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실한 기독교인은 두 세계의 시 민입니다. 하나는 시간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영원의 세 계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으 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삶의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의 창조자인지 환경의 산물인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시인 롱펠로우(Long' fellow) 는 이 세상에서 인간은 못이 되든지 망치가 되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에머슨은 그의 수필 [자기 의뢰]에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세상을 본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라니다. 인간은 본을 보이든지 본을 받든지 하며 살게 마련입니다. 'Being'이 되지 못하고 'BeCOmulg'이 되면 동물적인 인간이 되고 맙니다. 만약 환경 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창조적 형상을 지닌 인간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에게 삶의 본을 보이셨습 니다. 오늘밤 그 본을 보이신 사건을 생각하며 우리도 본을 보이는 제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사랑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사랑의 일생이요, 사랑의 본을 보이신 생애였습니 다. 요한복음 1S장 l절에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 니다. 가장 본받을 만한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때 사랑 하고 다음 순간 미워하게 되었다면 이는 참 사랑이 아닙니다. 끝까지 사랑하였다는 것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종종 사랑함으로 시작하여 미움으로 끝나는 사랑도 있습니다. 미워하 다 사랑하고. 사랑하다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원수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 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나 먼저 사랑하는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대접받고 대접한 것이 아닙니 다. 누가 나를 미워한다고 나도 미워하고, 나를 배신했다고 나도 배신 하며, 내가 사기당했다고 하여 나도 사기치고, 누가 나를 억울하게 하였다고 나도 보복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미움을 받아도 사랑하고 욕을 먹어도 선대하며 핍박을 받으면서도 축복해 주어야 진정한 사랑 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랑의 본을 보이며 살아야겠습니 다.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하고. 선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만 선한 사람이 된다고 하면 결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아닙니다. 혹시 이 가운데 환경을 탓하는 분이 있습니까 원래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시댁식구들 때문에 성질이 나빠졌고 불행한 가정 생활로 우울해졌으며 누구 때문에 약해졌고 누구 때문에 비참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회개하여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 도를 본받지 못하고 세상을 본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자신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예가 되었다는 슬픈 고백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나도 미워하면 나쁜 사람을 본받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을 본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영광으로 보았고 삶의 목적과 의미를 섬기는 데서 찾는 인생관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 증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 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 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l:26-28)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반드시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봉사의 깆은 신앙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로 섬길 줄 알아야 복이 있습니다.주인이 종의 발을 씻기고 선생이 제자의 발을 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예수 님께서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제자가 선생의 발을 겨드리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을법입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드리는 것은 당연 한 것입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은 선행이 아니요 공로도 아닙니 다. 그러나 주인이 종의 발을 씻겨주는 것은 인간의 이치를 초월한 것이요, 사랑의 질서요, 은혜입니다 우리도 넙김'이란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서 얻는 지위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지위는 다릅니다. 디모데전서 3장 I3절에 '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므로 얻는 아름다운 지위가 무엇입니까 장로님이 되는 것입니까 물론 장로직도 아름다운 지위인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시는 장로님은 참으로 아름답습니 다. 그런데 집사는 헬라어로 'JzbroUOS( 디아코노스)' 즉, '섬기는 자' 입니다. 섬기는 직분을 잘 감당해야 아름다운 지위를 얻습니다. 섬김 으로써 얻는 권위는 하늘이 주는 것이요, 영원히 존경과 사랑을 받는 지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갖는 높은 권위는 특수한 전문직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높은 권위는 희생적 권위입니다. 어머니의 권위는 섬김의 지위요. 희생의 권위입니다.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는 자식일 지라도 어머니의 희생적 권위 앞에는 무릎을 는 것입니다. 어머니 가 그토록 귀한 것은 희생의 권위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희생하신 사랑을 알기에 그 앞에서 절대 순종하게 됩니다. 희생하는 권위롤 인정하지 않고서는 참 믿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지닌 희생적 사랑의 권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전존재를 복종케 되고 생명과 재산을 바치며 따르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스승이 되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이 희생적 사랑 앞에 자신의 전존재를 바쳐 서 복종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리를 알고 섬기는 을 사는 사람은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겸손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겸손과 사랑은 일치합니다. 겸손보다 더 깊은 원리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겸손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은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으니라' 고 하셨습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사일 뿐입니다.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 앞에서 물질의 부요 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보다 무식한 사람 앞에서 아는 체하지 않고 지위가 낮은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마음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성서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 다. 겸손은 하늘에 속한 것이요, 교만은 땅에 속한 것입니다. 겸손은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늘은 햇빛을 내리시고 비와 이슬을 내리시고 드디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생명이요, 하늘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땅에서 계속 높아지려는 악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서로가 우리들 자신을 낮추는 것, 서로 섬기는 것, 종의 자리를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겸허의 본이요, 남을 자기 자신보다 높은 지위 에 놓은 분이셨습니다. 하늘보다 높으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낮아지 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우리는 좀더 겸손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는 교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의 집이 더 큰가 다투지 맙시다. 또 높은 것을 다투지 맙시다. 아무리 높아도 하늘 아래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발을 씻기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정치가요,교육자였던 가다오카(더짭솜)라는 사람 이 있었습니다. 그가 정치에 관한 일로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 다. 그는 감옥에서 변소 청소를 시키는 것이 대단히 불만스러웠습니 다. 그런데 어느날 요한복음 l3장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 기 는 기사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 죄인이 변소를 청소하는 정도야 문제가 아니라고 깨닫고 그때부터 자진해서 이제부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모든 사람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는 데 헌신하겠다.'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고오치(홉) 교회 장로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낯선 일본 장교가 예배 후 쇼리 신짝을 만지는 노인에게 자기 신이 없어졌다고 호통을 칠 때 '장교님 신은 으신 분이라 잘 간수하느라고 딴 곳에 두었습 니다.' 하고 정중하게 말하며 신발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그 노인 이 제12의회의 중의원 의장( )인 가다오카 장로인 것올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의 더러워진 발을 씻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겸손을 생각하면 자기가 교회에서 사람들이 신는 쇼리를 정리하는 것도 영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 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김을 받았으니 이제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씻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받지 않았다 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섬김을 받을 줄 알아야 하고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알아야 섬길 마음도 생기고 봉사도 하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받은 것은 없고 주기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어떤 자매가 큰 사업체를 경영하는 사장님의 안방마님이 되어 이런 불평을 늘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이라고 하나라도 주려는 사람은 없고 매일 달라고만 하니 주는 것뿐이라고 탄식했습니 다. 저는 그분에게 조용히 '주었다는 것은 받은 것이 있었다는 것이요 지금 줄 것이 있는 것은 그만치 많이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 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저나 직장에서나 자기를 섬기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섬기는 일을 고달프게 생각할 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섬겼다는 절대적인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을 받았기에 마음이 꽉 차 있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받고 살았습니다. 다윗은 이 은혜를 알고 '내가 이 은혜를 무엇 으로 보답할꼬'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이요, 어느것 하나 받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섬기고 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말씀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준 자 가운데 가 유다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행할 수 있으면 그 봉사와 섬김 은 참으로 복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기 실 때 가 유다가 눈에 걸렸습니다. 다 깨끗하지는 않느니라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가려서 발을 씻긴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는 더 캐끗이 닦고 요한이나 야고보는 대층 씻기신 것이 아닙니다. 섬길 때 차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이신 섬김의 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내릴 때 의로운 자의 밭이나 악한 자의 밭을 구별치 않으시며 햇을 악인과 선인에게 고르게 비추어 주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섬길 때 예수님께서 가 유다의 발까지 씻기셨다는 사실을 알고 행하는 자는 복이 있으 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이 이루어짐을 알고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에 성경적 해답을 알고 계셨습니다.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한 성경 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l3:l8)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성경 적으로 이 문제의 해답을 알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서 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다가 붙잡히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검을 빼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떨어뜨럽니다. 그때 주닝케서 '베드로야 네 검을 집에 꽂으라 칼든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열두 명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 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의 말씀을 생각하며 이 어려움을 참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봉사 나 수고에 대한 성경적 해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 말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알고 행하여야 복이 있습니 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자신의 평안과 보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그 선행과 봉사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은혜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한 것이요, 뜻을 이루는 것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이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 으로 살 것이라 '고 말씀하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것 하나 하나님 말씀을 떠나서 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 전부 에 대한 의미를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봉사와 희생이 자기 노력이나 자기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근거하고 말씀을 따라서 하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질 때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겸손하게 섬길 수 있게 됩니 다. 우리는 일을 할 때 높은 차원에서 생각하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떼드로는 마가의 다줘방에서 성령을 받고서야 모든 것이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가 유다의 배신을 아셨지만 하나님의 신비를 성경 안에서 아셨기에 그를 미워하지 않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향하여 '네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라고 한탄하시며 불쌍 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 가운데 살지라도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사건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절대 섭리를 믿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섬김을 알고 행하면 참으로 복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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