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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 생활의 삼대 요소 (살전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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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다른 사람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 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때때로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특히,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행실이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거나 욕되게 하므로, 더욱더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기억되는가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기억의 창고에 아름다운 기억 거리를 채움으로써 쓰라린 기억이 자리잡을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종에게 아름다운 기억 거리가 됨으로써, 주님의 종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해 주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이 항상 기도하며 감사하는 이유

주님의 종인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함’의 헬라어는 므네이안(μνεαν)으로서, ‘생각 또는 기억하게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함께 믿음의 연조가 짧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때문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그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 특히 하나님의 사자에게 항상 감사 거리가 되시고, 하나님의 사자가 기도할 때마다 기억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목회하는 목사와 성도가 늘 영적으로 교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가 어린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인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그들이 기억나서 기도해 주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들의 믿음의 역사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 주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 인격적인 응답입니다. 전 인격적인 응답이란 우리의 삶 곧 생각, 의지, 정서 및 행위의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복종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맺는 믿음의 결단은 이미 인간이 출생할 때,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재 은혜에 근거된 것이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의 공로일 수가 없으며, 반면에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것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구원의 방도인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역사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에서 비롯되는 행위, 또는 믿음에 의해 성취한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정말 구원받게 한 믿음이라면 반드시 믿음에 따르는 행위의 열매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앙 생활의 삼대 요소
야고보서 2:17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하였고;2:22에는,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바클레이는 “일하는 자세보다 더 그 자신을 말해 주는 것은 없다. 어떤 이는 채찍이 무서워서 일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보수를 목적으로 일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엄격한 의무감에서 일할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이는 믿음으로 고취되어서 일할 수도 있다. 이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이므로, 결국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그들의 사랑의 수고 때문입니다. ‘사랑’의 헬라어는 아가페(γπη)로서,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사랑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대상에게 그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이 마땅한 대가일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화목제로 독생자 예수를 주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해 화목제로 주셨다는 말속에서 우리는 참 사랑이란 진리와 정의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부어져야만 누구든지 사랑할 수가 있고, 더 나아가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물질적인 면에나, 육체적인 면에나, 혹은 정신적인 면에나, 영적인 면에서 결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결핍을 채워 주는 사랑의 수고를 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어야 사랑하지 않습니까” 하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됩니다. 한때 “정말 그렇겠구나.” 하고 이해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을 사랑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또한 남을 사랑할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찢어지게 가난하나 훌륭한 믿음을 가진 늙은 여자는, 재벌 총수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 믿음의 사람이란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대신에,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흔히 생각하듯, 사랑한다는 것은 손해나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놀라운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사랑의 분량을 그대로 작용되게 하시지 않고, 엄청나게 부풀려서 작용되게 하십니다. 내가 가진 한 가지 지식이나 지혜를 나누어주면, 수십 명, 수백 명, 수천 명에게 확산되어 심겨지고, 또한 그 지식이나 지혜로 얻는 유익도 수십 배, 수백 배, 수천 배로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지식이나 지혜가 내 머리 속에서 없어지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심화되고 확실하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물질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을 나눠주는 내 손보다,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도록 내게 복 주시는 하나님의 손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주 예수께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주의 재림과 그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확고한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인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소망은, 복음 전파와 신앙 생활에 따르는 모든 핍박과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게 해 줍니다.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세상적 소망을 가진 사 람도, 고난과 역경 속에서 쉽게 쓰러지지도,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소망이란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 모릅니다.
여기의 ‘인내’의 헬라어는 휘포모네스(πομον)로서, 단순한 인내라기보다는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사람이나 여건을 극복하거나, 변화시키는 승리의 인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님께 대한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하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한 바울 사도는, 그 궁극적인 이유에 대해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아 선택된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3. 맺음말

우리 모두는 죄의 종으로 멸망의 길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끌려가는 생활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앙 생활을 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좇아 행하고, 항상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의 수고를 다하고, 주께서 주신 영원한 소망을 굳게 붙잡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성도들로 기억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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