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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이 열린 사람 (행 0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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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복받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복받은 예수를 믿고 그 복을 받으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때마다 ‘복받은 성자 예수여 그 복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런 고백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복받은 예수를 보지 못하면 믿는 것이 허상이 됩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복있는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복받은 남편 만나야 일생동안 복있게 살고, 복있는 아내를 만나야 자기도 일생동안 행복하게 삽니다. 망할 사람 만나면 망하고 복있는 사람 만나면 안될 일도 잘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받은 사람을 만나야 그 은혜가 내게 옵니다. 은혜받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내 은혜까지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무나 만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 곁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 복이 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나타난 많은 사람 중에 사도 바울은 예수 좋아하고 예수 사랑하고 예수님을 항상 흠모하고 살다가 가장 복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 믿고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므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3년동안 동행하고 배우고 따르면서 예수님의 교훈도 받았고 인격적인 지도도 받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도 보았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님 곁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예수를 정확히 알고 정확히 믿었고 예수 복을 정확히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그런 복을 받았는가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슴에 모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그를 이끌어 그의 생을 일관되게 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회심적 사건이라고도 말하고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는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원래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시키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도 그가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결박시켜 예루살렘으로 호송시키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너무 강해서 땅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3일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가라고 하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가서 기도해라” “오, 주여 들은 바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롭게 하고 또 이곳도 성도들을 결박하려고 온 자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아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택한 그릇이니 두려워말고 가거라”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 들어갔을 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보지도 못한채 3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때부터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첫째,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20절)
사울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순간부터 사도 바울로 바꾸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눈을 뜨게 한 이후에 사도로 쓰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보게 됩니다.
눈을 멀게 하신 주님께서 다시 뜨게 하시고 새로운 눈을 열게 하십니다. 우리의 지나온 모든 과거의 사건 속에서 바르게 보지 못하던 눈을 주님께서 멀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 이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이제껏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은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눈은 떴으나 잘못 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가치관, 세계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눈 먼 사람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지식이 없으면 문맹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양심이 마비되면 눈먼 사람이 됩니다.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안이 먼 맹인입니다.
사울이 뜬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이 먼 자였습니다. 어떻게 눈이 먼 자였느냐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기독교 박해하는 것을 끝내고 이제는 선교사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를 보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므로 그의 생애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제 성경에서 예수를 봅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입니다. 성경에서 글자를 보는 것은 지식의 눈입니다. 안믿는 사람도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예수를 보는 사람이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엡 1:17-18)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목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고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고 사는 목적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고 또 눈을 열어야 합니다. 육신의 눈도 자연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눈을 떴어도 빛이 없으면 캄캄한 밤에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어야 됩니다. 또 빛이 있어도 눈이 멀면 보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야 됩니다. 빛과 내 눈이 열려야 됩니다.
이와같이 신령한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시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육신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보는 눈이요, 지식의 눈은 배움으로 열리는 눈이요,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주는 눈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예수를 만나는 것은 성령께서 비추어 주어야 되고, 열어 주어야 되고, 감동해야 되고,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 됩니다. 마치 육신의 눈도 태어날 때는 세상 만물만 봅니다. 그러다가 배우면서 지식을 봅니다. 자라면서 글을 통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의 눈이 열려가지고 세계를 보고 미래를 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양심의 눈이 떠져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알아보고, 돈을 가졌으나 남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선하게 살도록 눈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요 17:3).
성령의 역사로 그를 점점 더 많이 아는 것이 성화입니다(빌 3:10).
부활하여 그를 완전히 아는 것이 영화입니다(고전 13:9-10).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처음에는 구원받은 신앙으로 확신을 갖습니다. 내가 믿으면서 계속 내 자신이 죽어가면서 성화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세상을 보면서 예수를 보고 내가 죽어서 부활된 영화로운 몸을 입을 때 하늘나라에서 가린 것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보는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성화와, 영화로운 경지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눈을 뜨고 겨우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예수를 믿는 초보 단계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희미한 경지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 듣고 깨우쳐서 내 눈이 열리고 열려서 매사에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변화를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도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는 구걸하기 위해서 거지로 여리고 성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나사렛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지”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그쪽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잠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더욱 더 소리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저를 부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할 때 겉옷을 내팽개치고 뛰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을 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떴으니 얼마나 볼 것이 많겠습니까 자기 부모도 보고 싶고, 고향길도 보고 싶고, 뒷동산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즉시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가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신의 눈을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떴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뜨자마자 즉시로 예수를 좇았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란 예수님 보는 것이요, 예수님 찾아 좇는 눈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예수만 보이게 됩니다. 사울도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고 다메섹에 들어가 즉시 회당에 가서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열면 몸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주님을 따릅니다. 생각도 주님을 따릅니다. 내 모든 존재가 주님을 다르게 됩니다. 내 지식도, 내 명예도, 내 권세도, 내 학식도, 내 재산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이 열린 자입니다.
성경 가운데 영안이 열린 위대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예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그는 모리아 산상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고 결박시켜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이삭을 보면서 부활하실 예수를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최고 밝은 눈이 믿음의 눈입니다. 이 눈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요, 이 눈은 하나님을 아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지식의 눈입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보는 눈입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는 눈이요, 먼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죽음 이후까지 보는 눈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눈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보통 눈은 남을 보는 눈이지만 믿음의 눈은 자기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다른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를 볼 수 있는 눈까지 열어주는 것이 영안입니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밖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은을 칠하면 거울이 자기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 속에서 자기의 허물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비젼도 영광스러운 존재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 앞에 설 때만이 내 존재를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나를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다윗과도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그도 죄인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볼 때 내가 죄인 됨을 보며 주의 의를 봅니다. 주의 의가 나를 덮어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별세는 예수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그 안에서 나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나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슨 눈이 밝아졌는지요.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돌아가서 남편을 보면서 주님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비전은 허황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눈으로 현장에서 삶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보면서도 ‘내 아내이면서도 주님의 신부야 함부로 건드리면 내가 벼락을 맞지’ 하고 두려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별세의 영성을 가지면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보면서 은혜가 됩니다.
오늘날 분리된 거룩을 너무 가장하는 사람들은 꼭 거룩해야만 은혜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별세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고 이 속에 예수가 있으면 그 사람은 시장 바닥에 들어가도 그 속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유행가를 부르면 사단의 노래라고 정죄하지 말고 유행가를 들으면서도 ‘아,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지’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가 내 눈을 열면 자식을 보면서도, 아내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 저 분이 내 남편을 낳아주신 분이야 저 분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아내가 될 수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사도 바울은 천하만물이 다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범신론의 얘기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눈을 뜨고 창조의 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손길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벌레먹은 나무를 보고 그 속에서 탄식의 음성을 듣습니다.

둘째, 사랑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은 떴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고, 모든 악을 합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제 그가 과거의 눈뜨고 본 것은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과거의 눈은 멀었고 그의 눈에서 편견과 아집과 살기의 비늘을 벗기니 사랑의 눈으로 섬김과 봉사, 용서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서 율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눈이 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눈을 열게 하니 보는 것이 이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정죄하던 눈이 멀고 이제 이해하는 눈으로 바꾸어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을 알았기에 용서하기를 힘썼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본다는 것은 자기 속에 좋은점이 있기 때문이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음에도 나쁘게 보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늘이 벗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눈에 비늘이 덮혀있을 때는 정죄, 증오, 살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비늘이 벗겨지니 사람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성공자는 성공자의 장점을 바라보며 실패자는 실패자의 단점만 보고 산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행복합니다. 화평합니다.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할 때 자기 인격은 성숙하고 마음에 평안도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어두운면만 보고 삽니다. 태양을 등지고 삽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좋은 세상으로 느끼면서 행복하여집니다.
이 역사를 보면서 종말로 가는 망할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고 종말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보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을 열어서 똑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좋은 세상을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셋째, 소망의 눈이 열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하늘나라 영광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니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으며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던 마음이 변하여 긍휼의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눈은 온통 예수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도 예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 가면서도 찬송하면서 그리스도를 보고 죽습니다.
그가 이런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스데반의 옷을 들고 서 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희한한 광경을 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쓰러지고 등이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잠이 드는 모습을 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신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울은 여기에서 스데반의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광경을 보고 ‘아, 내가 훌륭한 공부를 했다고 남들로부터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남을 그렇게 용서하거나 남을 널리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 아닌가 저 분이야말로 위대한 분이구나! 저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난 자의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스데반의 영성이 각인되어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제가 군에 입대해서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 고향집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20리를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입대해서 1년 있다가 처음으로 휴가를 받아서 고향집에 가게 되었습니다. 모아놓았던 건빵을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용산역에 가서 야간 군용열차를 탔는데 군대에서 휴가 나오는 장병들과 밤새도록 노래를 부르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향집이라는 것이 군대 막사만도 못합니다. 우리 고향집에 비하면 군대 막사는 고급입니다. 먹는 것도 군대가 좋지 집에 가도 별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휴가 얻었다고 좋다고 가느냐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서, 짝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려고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나를 기다리지 않지만 나는 보고 싶어서 부모님에게는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달려갑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서 우물가에 나오는 것을 기다리다가 물 긷는 것을 멀리서 보고 돌아갑니다. 가까이 가야 할 말도 없으니까요. 제가 고향을 찾아오려고 했던 것은 짝사랑하는 사람을 보려고 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할 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밤이 오면 집에 돌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요, 만약에 잠 자러 온다면 그곳은 하숙집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소망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의 전부였고 곧 행복이었습니다.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어떤 분은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다고 말합니다. 돈도 많이 잃었고 사업도 번번이 실패했고 돈도 많이 사기당했습니다. 악한 마음으로 싸워야 받을 수 있는데 교회에 와서 주일날 설교 들으면 용서하라고 하니까 그럴 수도 없고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 손해 많이 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예수 잘못 믿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큰 복을 받았습니다. 물질로는 잃어버린 것도 있지만 믿음어 얻었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세상의 명예를 잃었지만 성도라는 거룩한 명예를 얻었습니다. 생각하여 보니 잃은 것은 얻은 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렇습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은혜는 별세의 은혜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곧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의 은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곧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나깨나 그런 심정으로 살았기에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로 살았습니다. 이것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그의 생애는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의 눈은 말씀과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저 하늘나라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자의 길로 가면서까지 한번도 자기 자신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승리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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