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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달랴와 여호세바 (왕하 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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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있습니다. 만사(萬事)는 반드시 바른 이치(正理)로 돌아간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삶의 표현들은 사실상 역사를 공의롭게 통치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거룩한 이스라엘의 등불이었던 다윗의 정통 가문의 맥을 끊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마 1:1)를 도전한 아달랴를 보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왕명을 도전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시간 거룩한 하나님의 왕명을 따라 목숨을 걸고 왕도를 걸었던 여호세바도 보려고 합니다.

Ⅰ.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한 아달랴

열왕기하 11장 1절에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달랴는 북조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습니다. 그는 남조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가 된 자였습니다. 그가 남조 유다의 왕가로 시집을 오게 된 것은 남조의 4대 왕 여호사밧의 정략적 결혼 정책 때문이었습니다(대하 18:1). 그래서 아합과 여호사밧은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녀 때문에 남편 여호람은 북조 이스라엘의 우상 바알 숭배를 도입하게 되고(왕하 8:18),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그 부왕의 우상 숭배 사상을 계승하게 된 것입니다(대하 22:3). 그녀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시야는 병중에 있던 북조 왕 요람을 방문하러 갔다가(왕하 8:29), 예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왕하 9:27).

남조 유다 왕 아하시야가 죽었을 때 왕의 어머니였던 아달랴는 그 왕실의 약한 틈을 타서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 하였습니다. 여기 ‘왕의 씨’란 왕위를 계승할 적통 왕자들을 가리킴인데, 말하자면 그녀의 친손자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권력에 눈이 어두워져 왕위 찬탈을 위하여 자신의 친손자들까지 비정하게 떼죽음을 시켜 버렸습니다.
그녀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혈관 속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우상 숭배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왕하 8:18, 25-26). 그녀는 남조 유다로 시집오자마자 그 아버지 어머니가 섬기던 우상 종교를 펴는 데 전력을 기울였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권력을 잡고 6년 세월 동안 전(全)남조 유다에 우상 숭배적 폭정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왕손 진멸의 소행’은 단순한 정권 찬탈이 아니라, 바로 거룩한 다윗의 왕통을 진멸하고자 하는 무서운 사탄적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 경륜 속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적통 왕손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시려고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사탄의 책동을 힘입고, 다윗 왕손들의 적자를 진멸함으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무모화 시키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아하시야의 왕자들이 그녀에게 떼죽임을 당하는 것은, 역사 중에 일어난 단순한 정권 찬탈의 희생 제물이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왕가를 향한 아달랴의 반역은 단순한 정치적 악순환에 그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계사의 중심은 인간 자신들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인간을 통하여 주도해 나가시는 구속사가 그 중심이라고 생각할 때, 아달랴의 반역과 아하시야 왕손의 죽음은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사의 맥을 절단시키는 반신(反神)적이요 배약적, 배도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Ⅱ. 왕명에 산 여호세바

열왕기하 11장 2절에 「요람 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여호세바’라고 하는 여자는 바로 죽은 아하시야 왕의 누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람 왕의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남조 5대 임금 여호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당시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였습니다(대하 22:11). 그렇다면 친 왕손을 멸하고자 하는 아달랴는 바로 여호세바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녀는 아달랴가 왕자들을 떼죽음시키는 무서운 학정 가운데서 갓난 왕자 요아스를 도적해 내어, 6년 동안 하나님의 성전에서 숨겨 키웠습니다. 그동안 아달랴의 우상 폭정이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왕하 11:3).

여호세바는 이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제사장인 자기 남편과 함께 그 왕자 요아스를 살려 내는 데 존재적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왜 그러했을까
그것은 왕명에 대한 신앙과 충성이었습니다. 그녀가 그 왕자 요아스를 구출함은 단순한 동정심이나 아니면 의분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왕이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요 충성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의 왕손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7장 16절에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열왕기하 8장 19절에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고 하였습니다(삼하 7:12-17).
열왕기상 11장 36절에도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다윗에게 약속한 ‘한 등불’, 항상 하나님 앞에 있게 한 등불이 무엇인가
이는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왕손들이 끊어지지 않고 예루살렘을 다스릴 사실을 예언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오실 메시아 예수에게까지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입니다.

그렇다면 아달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등불, 예루살렘의 등불을 끄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세바는 하나님이 다윗의 왕가에 약속하신 이스라엘의 등불, 예루살렘의 등불을 끄지 못하게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다윗 왕가를 향한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 실행에 충성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왕명에 자기 삶의 존재 의미를 불태웠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때, 그 장소에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자기 존재 의미와 목적을 바로 깨달았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출입하며 섬기는 그 하나님의 성전을 왕손 구원의 방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한 등불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 언약 성취에 신실하신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실로 왕명에 살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눈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렇게도 엄청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Ⅲ. 왕도를 행하는 백성들(왕하 11:4-21)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고 말았습니다. 아달랴의 학정이 6년이 지날 때였습니다. 그동안 어린 요아스 왕자는 성전에서 숨겨 보호를 받고 자랐습니다.
아달랴 집권 제7년에 요아스를 다시 유다의 왕으로 모시는 새 역사의 장(章)이 열렸습니다.
여호세바의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물샐 틈 없는 계획을 따라, 여호와 전에 살아남아 있는 다윗 왕가의 적손 요아스를 백성 앞에 보였습니다(왕하 11:4). 그리고 단과 전 곁으로 왕자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머리에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습니다. 이것을 본 백성들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불렀습니다(왕하 11:11-12).

그리고 제사장의 지휘를 받은 군인들은 도망가던 아달랴를 칼로 죽였습니다(왕하 11:13-16, 20). 제사장 여호야다는 이스라엘의 적통 왕자로 하여금 거룩한 다윗의 전통을 잇도록 만드는 데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충성은 바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36, 왕하 8:19)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이 여호와의 거사에 기용을 당한 백부장들의 이름을 남겼는데 곧 여로함의 아들 아사랴, 여호하난의 아들 이스마엘과 오벳의 아들 아사랴, 아다야의 아들 마아세야, 시그리의 아들 엘리사밧이라고 하였습니다(대하 23:1). 저들은 모두 그 시대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왕명을 좇아 왕도를 걷던 사람들이었습니다.

7세에 다윗의 위를 계승한 요아스는 3대 과업을 선언하게 되었습니다(왕하 11:21).
그 첫째가 언약의 동맹입니다.
왕과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언약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워 새 왕도의 출발을 튼튼히 하였습니다(왕하 11:17).
그 둘째는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선왕 때 자리잡은 바알 신당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바알 제사장 맛단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을 세워 하나님의 전을 수리하게 하였습니다(왕하 11:18).
그 셋째는 중단된 왕정을 복구함으로 명실공히 다윗의 왕통을 계승하였습니다(왕하 11:19).
그 결과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안하더라(왕하 11:20)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신명(神命)을 좇아 왕도를 걷는 새 역사의 걸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역사는 우연의 산물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역사는 무의미의 반복도 아닙니다. 물론 변증법적 진화의 산물도 아닙니다.
역사는 하나님 자신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이 성을 세우고 지키십니다. 하나님이 집을 짓기도 하고 헐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공간을 주시고 역사를 존속시키는 시간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창조해 나갈 사람도 주십니다. 역사는 구속사 성취의 내용과 목적을 가득히 담고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님 자신의 운동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 세계에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통치 역사에 수종들도록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달랴 같은 악한 여인의 학정을 통하여, 하나님 떠난 인간의 도모가 얼마나 무섭고 또 그것이 얼마나 천벌 받을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떠난 인간의 도모는 그 자체가 무서운 심판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한 인간의 소행은 바로 사탄의 도구임을 보여 줍니다. 그녀는 알고 보면 하나님과 싸우는 극악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주구(走狗)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벌을 받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세바 같은 신앙의 여인을 통하여 꺼져 가는 이스라엘의 등불을 꺼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호세바에게 주신 신앙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과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이어 가실 구속의 약속 곧 이스라엘의 등불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거룩한 왕명이었습니다. 불신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지존무상의 왕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왕명에 따라 목숨을 걸고 다윗의 적손 요아스를 죽음에서 구원해 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왕명이 그녀의 존재 의미와, 가치와, 목적과, 사명을 성립시킨 것입니다. 그 왕명이 그녀로 하여금 그처럼 신나게 살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나 그와 동맹한 여러 류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저들은 거룩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자신의 왕명에 따라 놓쳐 버린 왕도를, 잃어버릴 뻔한 선민의 왕도를 되찾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과 백성들이 함께 즐거워하면서 새 왕도를 걸었습니다. 이것은 새 역사를 창조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받는 축복이요 영예이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 경향인들이 받은 오늘의 왕명, 오늘의 왕도를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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